신라 수도 경주에 정말 100만 명 넘게 살았을까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 2025-10-21 10:02:15
[김덕련의 역사산책 33] 천년 고도 경주 인구
'100만 넘었다' 주장 핵심 근거는 삼국유사 기록
일연 '신라 전성기 수도에 17만8936호 있었다'
학계 해석 엇갈려…100만 명 평가 연구자 많지 않아 ▲ 경주 APEC 정상 회의 공식 홈페이지. [APEC 2025 KOREA 메인 화면 갈무리]
주장의 핵심 근거는 삼국유사다. 일연은 신라 전성기에 17만8936호(戶)가 수도에 있었다고 삼국유사에 썼다. 1호 즉 한 집의 가족이 5명이라고 가정하면 인구가 약 90만 명이었다는 추산이 나온다. 100만 명이 넘으려면 호당 6명 이상으로 가정해야 한다.
그러나 당시 경주 인구 규모를 100만 명 정도로 보는 연구자는 그리 많지 않다. 경주 지역의 지형과 면적, 신라 전체의 추정 인구 규모 등을 고려할 때 믿기 어렵다고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17만8936호 기록과 관련해 그간 여러 해석이 나왔다. 그중 하나는 일연이 '구(口, 구성원)'를 '호'로 잘못 표기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다. 그 근저에는 신라 전성기의 역사적 조건을 감안하면 17만8936을 가호(家戶) 수가 아니라 사람 수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판단이 자리하고 있다.
학계에서는 17만8936을 인구 수치로 여기는 견해가 우세하다. 그 무렵 왕경 인구가 20만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과 비슷한 규모였을 것이라는 시각이다.
이와 달리 17만8936호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여 당시 경주 인구가 100만 명에 육박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연구자도 있다. 이 주장의 특징 중 하나는 신라 수도 범위가 지금의 경주는 물론 울산 등까지 아우를 정도로 매우 넓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이다.
일연이 '구'를 '호'로 잘못 표기했을 가능성이 낮다고 보면서도 100만 명 육박설과 거리를 두는 시각도 있다. 17만8936호는 실제로 경주에 거주하지 않은 가호도 상당수 포함한 수치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신라가 왕경인과 지방민을 차별 대우한 나라였던 것과 관련 있는 주장이다.
신라에서 왕경인은 지방민을 통치하는 지배자 집단으로 여겨졌다. 그러한 왕경인이 5소경(小京)을 비롯한 지방으로 집단 이주한 사례가 여럿 있다. 그렇게 지방으로 이주하면서도 왕경인으로서 정체성과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적(籍)은 그대로 왕경에 두었을 수 있다는 추정이다.
이처럼 삼국유사의 17만8936호 기록에 대한 해석은 엇갈린다. 더욱이 인구 100만 명 육박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해석은 그중 소수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당시 경주 인구가 100만 명이 넘었다'고 사실로 확인된 것처럼 서술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두 번째는 경주에 비하면 서울은 수도로서 역사가 짧다는 주장이다. 경주가 신라 수도였던 기간이 서울이 조선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수도였던 기간보다 훨씬 길다는 것을 주장의 근거로 제시한다. 그러면서 경주가 유구한 역사를 지닌 도시라고 강조한다.
경주는 천년 고도로 불린다. 신라가 존속한 992년 내내 수도였기 때문이다. 조선 왕조는 1394년 서울을 수도로 정했다. 1399년 고려 수도였던 개경(개성)으로 환도했다가 1405년 서울로 다시 천도해 1910년까지 수도로 유지했다.
서울이 조선의 수도였던 기간은 510년인 셈이다. 식민지 조선의 중심지였지만 공식 수도는 아니었던 일제 강점기 35년은 논외로 하면, 서울이 조선 이래 수도였던 기간은 총 590년(510년+광복 후 80년)이다. 경주가 신라 수도였던 기간인 992년보다 402년 적다.
이렇게만 놓고 보면 앞의 주장은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백제를 빠뜨렸기 때문이다. 백제의 수도는 서기전 18년 건국 시점부터 475년 고구려군에 패해 웅진(충남 공주)으로 천도할 때까지 493년 동안 지금의 서울 지역이었다. 이 493년을 조선 이래 수도였던 기간 590년과 합하면 1083년이다. 경주의 992년보다 길다.
'역대 수도 가운데 경주는 서울보다 한 수 아래'라는 주장을 하려는 게 아니다. 서울은 백제의 수도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부지불식간에 가리는 무리수를 둘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무리수를 두지 않아도 경주의 역사가 유구하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주요 참조=강봉원 논문(「신라 왕경의 인구수에 관한 역사 및 고고학적 고찰」, 『대구사학』 90, 2008), 하일식 논문(「신라 왕경인의 지방 이주와 編籍地」, 『신라문화』 38, 2011), 이동주 논문(「기와로 본 신라 王京의 변천 연구」, 동국대 사학과 석사 논문, 2007)
'100만 넘었다' 주장 핵심 근거는 삼국유사 기록
일연 '신라 전성기 수도에 17만8936호 있었다'
학계 해석 엇갈려…100만 명 평가 연구자 많지 않아
오는 31일부터 내달 1일까지 경주에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열린다. 이를 앞두고 개최지 경주의 역사와 전통을 강조하는 기사를 여러 언론에서 내보내고 있다.
이 중엔 오해 소지나 논란이 있는 내용을 사실인 것처럼 단정적으로 서술한 경우가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두 가지 사례만 살펴보자.
첫 번째는 신라 왕경(王京), 즉 수도 경주의 인구가 100만 명이 넘었다는 주장이다. 여기에는 경주를 제외하면 세계에서 8세기 무렵 인구가 100만 명에 이른 도시는 장안, 바그다드, 콘스탄티노플 정도에 불과했다는 이야기가 따라붙는다. 세 도시는 당나라, 아바스 왕조, 동로마제국의 수도였다.
주장의 핵심 근거는 삼국유사다. 일연은 신라 전성기에 17만8936호(戶)가 수도에 있었다고 삼국유사에 썼다. 1호 즉 한 집의 가족이 5명이라고 가정하면 인구가 약 90만 명이었다는 추산이 나온다. 100만 명이 넘으려면 호당 6명 이상으로 가정해야 한다.
그러나 당시 경주 인구 규모를 100만 명 정도로 보는 연구자는 그리 많지 않다. 경주 지역의 지형과 면적, 신라 전체의 추정 인구 규모 등을 고려할 때 믿기 어렵다고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17만8936호 기록과 관련해 그간 여러 해석이 나왔다. 그중 하나는 일연이 '구(口, 구성원)'를 '호'로 잘못 표기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다. 그 근저에는 신라 전성기의 역사적 조건을 감안하면 17만8936을 가호(家戶) 수가 아니라 사람 수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판단이 자리하고 있다.
학계에서는 17만8936을 인구 수치로 여기는 견해가 우세하다. 그 무렵 왕경 인구가 20만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과 비슷한 규모였을 것이라는 시각이다.
이와 달리 17만8936호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여 당시 경주 인구가 100만 명에 육박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연구자도 있다. 이 주장의 특징 중 하나는 신라 수도 범위가 지금의 경주는 물론 울산 등까지 아우를 정도로 매우 넓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이다.
일연이 '구'를 '호'로 잘못 표기했을 가능성이 낮다고 보면서도 100만 명 육박설과 거리를 두는 시각도 있다. 17만8936호는 실제로 경주에 거주하지 않은 가호도 상당수 포함한 수치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신라가 왕경인과 지방민을 차별 대우한 나라였던 것과 관련 있는 주장이다.
신라에서 왕경인은 지방민을 통치하는 지배자 집단으로 여겨졌다. 그러한 왕경인이 5소경(小京)을 비롯한 지방으로 집단 이주한 사례가 여럿 있다. 그렇게 지방으로 이주하면서도 왕경인으로서 정체성과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적(籍)은 그대로 왕경에 두었을 수 있다는 추정이다.
이처럼 삼국유사의 17만8936호 기록에 대한 해석은 엇갈린다. 더욱이 인구 100만 명 육박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해석은 그중 소수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당시 경주 인구가 100만 명이 넘었다'고 사실로 확인된 것처럼 서술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두 번째는 경주에 비하면 서울은 수도로서 역사가 짧다는 주장이다. 경주가 신라 수도였던 기간이 서울이 조선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수도였던 기간보다 훨씬 길다는 것을 주장의 근거로 제시한다. 그러면서 경주가 유구한 역사를 지닌 도시라고 강조한다.
경주는 천년 고도로 불린다. 신라가 존속한 992년 내내 수도였기 때문이다. 조선 왕조는 1394년 서울을 수도로 정했다. 1399년 고려 수도였던 개경(개성)으로 환도했다가 1405년 서울로 다시 천도해 1910년까지 수도로 유지했다.
서울이 조선의 수도였던 기간은 510년인 셈이다. 식민지 조선의 중심지였지만 공식 수도는 아니었던 일제 강점기 35년은 논외로 하면, 서울이 조선 이래 수도였던 기간은 총 590년(510년+광복 후 80년)이다. 경주가 신라 수도였던 기간인 992년보다 402년 적다.
이렇게만 놓고 보면 앞의 주장은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백제를 빠뜨렸기 때문이다. 백제의 수도는 서기전 18년 건국 시점부터 475년 고구려군에 패해 웅진(충남 공주)으로 천도할 때까지 493년 동안 지금의 서울 지역이었다. 이 493년을 조선 이래 수도였던 기간 590년과 합하면 1083년이다. 경주의 992년보다 길다.
'역대 수도 가운데 경주는 서울보다 한 수 아래'라는 주장을 하려는 게 아니다. 서울은 백제의 수도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부지불식간에 가리는 무리수를 둘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무리수를 두지 않아도 경주의 역사가 유구하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주요 참조=강봉원 논문(「신라 왕경의 인구수에 관한 역사 및 고고학적 고찰」, 『대구사학』 90, 2008), 하일식 논문(「신라 왕경인의 지방 이주와 編籍地」, 『신라문화』 38, 2011), 이동주 논문(「기와로 본 신라 王京의 변천 연구」, 동국대 사학과 석사 논문, 2007)
KPI뉴스 /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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