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꽂이] "시는 어린아이, 물이나 음악처럼 흐른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 2025-08-14 14:29:18

세 번째 시집 '그림자의 섬' 펴낸 영문학자 김구슬 시인
어린아이 상태 같은 시의 근원 탐색, 성찰 담은 시편들
"알아본다는 것은 죽음처럼 강렬한 사랑이며 깨달음"

우리는 기다림 속에 있다. 마음 깊은 곳에 잠재해 있는 '씨앗'이 싹트기를 기다린다. 그 '씨앗'이 잉걸불처럼 우리 의식 밑바닥에 남아 있기에 우리는 삶을 견디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_ '시인의 말' 

 

▲ 새 시집을 펴낸 김구슬 시인. 영문학자이기도 한 김 시인의 시론이 눈에 띄는 시집이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마음 깊은 곳에서 희미하게 타고 있는, 늙어 낡아도 채 꺼지지 않는 그 불은 어떤 의미일까. 김구슬 시인은 최근 펴낸 세 번째 시집 '그림자의 섬'(서정시학)의 머리에 저 시인의 말을 내걸었다. 그는 아무리 혼탁한 거리를 통과해온 생이라도 잉걸불로 남은 순수의 원형, 어린아이 같은 상태야말로 우리를 언제나 오염 이전으로 이끌 수 있는 힘, 시인의 정신이라고 설파한다.

이번 시집은 '비어 있으면서도 충만하고 있으면서도 없는 존재의 근원' 같은 '영도'(零度)의 세계를 확장해 노자와 릴케와 니체가 갈망했던 어린아이 같은 상태에 이르는 성찰과 관찰이 지배한다. 김 시인은 "1부에서는 기억과 시간의 문제, 2부는 인생이라는 삶의 문제, 3부는 관념적인 깊이로 접근한 시편들, 4부에는 이를 종합하고 아우르면서 주제를 끝까지 밀고 나아가는 시편들을 배열했다"고 밝혔다.

-'시는 어린아이'라는 시론이 눈에 띈다.
"인간은 모두 시인의 마음을 가지고 태어났다. 어린 시절이란 결국 시인들이 추구하는 어떤 지점, 조화로운 세계, 너와 나라는 구분이 없는 그런 순수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마음속에는 그런 순수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 우리는 의식을 하지 못하지만 살아가는 과정에서 그것이 마치 안내자처럼 그곳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힘이 되는 것이고, 힘든 순간일수록 그 힘이 더 강해서 그곳으로 돌아가야 하다는 것을 환기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시는 물이나 음악과도 같다'고 썼다.
"시에는 자본주의 잣대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힘이 있다. 그 힘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인데, 노자 '도덕경' 36장의 이 말을 좋아한다. 깨끗하고 부드럽고 정말 그 미약한 것이 결국은 강한 것을 이긴다는, '유약승강강(柔弱勝剛强)'. 시라는 것이 힘은 없지만, 다투지 않고 아래로 흐르면서 결국 모든 걸 하나로 만드는 음악처럼 내면에서 출렁이면서 다른 사람의 내면과 하나가 된다. 그 과정에서 공감과 사랑이 생겨나고 이 세상을 조금 더 살만한 세상으로 만들어준다."

어둠이 내리는 저녁/ 보스턴 공립도서관 앞 산책길에/ 개들이 주인과 하나 되어/ 새벽을 향해 긴 유랑을 떠난다.// 20년의 세월이 흐른 후 귀환한/ 오디세우스를 제일 먼저 알아본 것은/ 그의 충견 '아르고스'/ "유럽 역사상 갑작스레 생각한 최초의 존재는 '개'다."/ 인간을 생각한 것이 '개'라니/ 생각한다는 것은/ 머리가 아니라 온몸으로 알아보고/ 온몸으로 죽는 것이다./ 아르고스는 주인을 알아보고는/ 길게 뻗어버린다// 알아본다는 것은/ 죽음처럼 강렬한/ 사랑이며 깨달음인 것을,// 누구도 알아볼 길 없어/ 오늘도 하릴없이/ 밤길을 걷는 유랑자들이여! _ '새벽을 향한 유랑' 전문

오디세우스가 길고 험난한 전쟁에서 귀환했을 때 그를 제일 먼저, 온몸으로 알아본 존재가 그의 충견이었다는 이야기에서 시인은 사랑의 본질을 깨닫는다. 머리가 아니라 온몸으로 그냥 알아본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죽음처럼 강렬한 사랑의 본질이라는 성찰의 울림이 크다. 모든 삶은 불완전하기에 동력을 얻는다는 역설이 함축된 시편도 흥미롭다.

 

 

모든 점은 꼭짓점을 향한다./ 평형을 뒤로 한 채// 인생은 삼각형이다/ 한 지점을 응시한다/ 한 점을 그리워한다.// 욕망과 그리움이 강해질수록/ 한 변은 길어지고/ 다른 한 변은 짧아진다.// 찌그러진 삼각형일수록/ 꼭짓점을 향한/ 투쟁과 갈등은/ 더 날카로워진다.// 긴장의 역사가 삼각형을 만든다.// 정삼각형이 될 수 없는/ 고요와 갈증의 불균형,/ 숙명의 삶이다. _ '삼각형 인생' 전문

김 시인은 "불균형이 주는 힘과 폭발력이 크다"면서 "그것이 우리 삶의 운명이고 숙명인데, 거기에서 버티는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기실 정확하게 균형 잡힌 정삼각형의 삶은 AI나 가능할 터이다. 바벨탑을 쌓아 절대자의 높이에 도전하는 인간들을 징치하기 위해 소통 불가능한 언어들을 내린 신의 뜻을 인간들은 이제 AI를 통해 저항하면서, 새로운 바벨탑을 올리고 있는 셈이다.

어린 시절,/ 어둠 내린 겨울/ 저녁 대문을 밀고 들어서면/ 신비의 달빛 스민 순백의 마당 가운데/ 차갑게 가라앉은 고요가/ 숨죽이며 나를 맞이하곤 했다.// 창백한 나무가 희미하게 그림자를 드리운/ 비밀의 마루를 따라가면서/ 습관처럼 얼핏 들여다본 서재엔/ 언제나처럼 작은 책상 앞/ 꼿꼿한 형상의 아버지의 뒷모습이 나를 숙연케 했다.// …/ 긴 시간의 터널 끝에서/ 이젠 좀 더 큰 책상 앞에/ 낯선 형상이 등을 구부리고 앉아 있다.// 또 다른 시와 또 다른 번역, 학술서들이/ 무너지는 바벨탑의/ 소란한 시간과 공간을 넘어/ 서로 다른 언어를 하나로 연결해/ 오늘 이 자리에 무연히 섰다. _ '바벨문학상'

번역과 창작에 기여한 공로로 지난해 미국 텍사스 주립대학에서 수여하는 '바벨문학상'을 수상한 김 시인은, 불교학자이자 시인으로 족적을 남긴 부친 월하 김달진(1907~1987)을 회상하며 아버지의 자리에 다시 선 시인 자신을 돌아본다. 그는 앉은뱅이 책상 앞 희미한 그림자를 바라보던 어린 딸이 "나이테처럼 누렇게 바랜 종이 사이에서/ 또 다른 생명의 언어를/ 중얼거리고 있는 것"이라고 '바벨문학상'을 맺었다. AI가 바벨탑을 쌓아올린다 해도, 생명의 언어를 놓지 않는 시인이 있는 한 희망은 사라지지 않을 터이다.

실체를 보지 못한 채 허상에 사로잡혀 다투는 세상에 대한 안타까움을 담은 '그림자의 섬'으로 '황순원문학상 시인상'도 수상한 그는 "소설가로 알려진 황순원 선생은 사실 시로 시작해서 시로 끝낸 분"이라며 "제임스 조이스를 능가하는 그의 세계성을 차제에 연구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그림자 섬'에서 배들의 무덤을 내려다보며 떠올린 상념.


배들은,// 부두도 아니고 뱃길도 아닌 곳에서/ 부동도 움직임도 아닌 상태로/ 닻을 내리고 호명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도,/ 죽음과 탄생 사이에서/ 부름을 기다리며/ 외롭게 서성이고 있다. _ '묘박지' 부분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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