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어찌하야 사나이와 일반이거늘…죽은 사람 모양이 되리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 2024-07-15 08:29:12

12년에 걸쳐 집필한 '한국여성문학선' 전7권 완간
1898년 독자투고에서부터 1990년대 작가들까지
기존 문학사에서 배제됐던 새로운 작가 작품 포용
"완성된 여성문학 계보 바탕, 진전된 문학사 기대"

'어찌하야 일향 귀먹고 눈먼 병신 모양으로 구습에만 빠져 있나뇨. 이것이 한심한 일이로다. 혹자 이목구비와 사지오관 육체가 남녀가 다름이 있는가. 어찌하야 병신 모양으로 사나이의 벌어주는 것만 앉아서 먹고 평생을 심규(深閨)에 처하여 남의 절제만 받으리오.'

1898년 9월 8일자 '황성신문'에 두 여성이 공동 기고한 '여학교설시통문(女學校設施通文)'이 실렸다. '귀먹고 눈먼 병신 모양'으로 구습에 빠져 있지 말고 여자들도 배워서 사나이들의 압제에서 벗어나 세상 형편을 알자고 강력하게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다음날인 9월 9일자 '독립신문'에도 같은 내용 전문이 게재됐다. 전문 끝에는 '구월일일 여학교 통문 발기인/ 이 소사 김 소사'라고 적혀 있거니와, '소사(召史)'는 결혼한 여성을 일컫는 명칭이다. 
 

▲한국 여성문학 100년 계보를 완성한 '여성문학사연구모임' 필진들. 왼쪽부터 이선옥·이희원·김양선·이명호·김은하·이경수 교수.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한국 여성문학의 시작을 이 시점으로 앞당긴 '여성문학사연구모임'이 한국 여성문학 선집(전7권·민음사)을 12년 만에 완간했다. 이전의 문학사는 통상 나혜석의 단편소설 '경희'가 여성교양지 '여자계'(女子界)에 발표된 1918년을 여성문학의 원류로 본 데 비해 '한국 여성문학 선집'은 그보다 20년 앞선 1898년 '여학교설시통문'을 시발점으로 삼았다. 제도적인 장르 구분 방식에서 탈피해 편지나 독자 투고 같은 자유로운 글쓰기를 문학의 자장으로 포괄한데 따른 발상이다. 

'한국 여성문학 선집' 공동 필진으로 참여한 여성문학사연구모임 6인(김양선 김은하 이선옥 이명호 이희원 이경수)은 "지금까지 간헐적으로 여성문학 선집이 출판되었으나 시기적으로는 일제강점기나 1960년대까지로 국한되고, 장르는 주로 소설에 한정되었다"면서 "우리 선집은 특정 시기와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근현대 한국 여성문학의 성취 전체를 포괄하고, 여성의 지식 생산과 글쓰기 실천을 집대성하고 아카이빙한 최초의 작업"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단일한 존재가 아니라 민족, 계급, 섹슈얼리티 등 다양한 사회적 범주가 교차하는 복합적 존재인 여성들의 다면적 경험을 표현하는 글쓰기에 주목해 작품을 선정했다"면서 "기존의 제도화된 문학 형식만이 아니라 잡지 창간사, 선언문, 편지, 일기, 독자 투고, 노동 수기 등 여성문학의 발전에 토대를 이루는 다양한 글쓰기들도 포괄했다"고 덧붙였다.

한국 여성문학 선집은 김양선 교수(한림대)가 집필한 1~2권 '1898년~1920년대 중반 여성문학의 탄생' '1920년대 후반~1945년 계급·민족·여성의 교차', 김은하 교수(경희대 휴마니타스칼리지)가 맡은 3~4권 '1945년~1950년대 전쟁과 생존' '1960년대 세대교체와 저자성 투쟁', 이선옥 교수(숙명여대)가 책임 편집자로 참여한 5~6권 '1970년대 개발 레짐과 여성주의적 각성' '1980년대 운동으로서의 글쓰기', 이명옥 교수(경희대)가 맡은 7권 '1990년대 성차화된 개인과 여성주의적 각성'으로 구성됐다. 이희원 명예교수(서울 과학기술대학교)가 희곡을, 이경수 교수(중앙대)가 현대시 부문을 맡아 참여했다.


지난주 서울 종로구 노무현시민센터에서 기자들과 만난 공동필진 6인 중 먼저 발언에 나선 김양선(한림대학교 일송자유대학 교수) 연구원은 "그동안 문학사나 문학 선집은 대부분 특정시기와 특정 장르에 한정돼 있었다"면서 "근대 초기부터 여성들이 공론장에서 글 쓰는 주체로 부상해 생산한 내용과 전통을 지금까지 계보화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100년 정도의 문학사를 쓰기 위해서는 원재료가 필요한데 이를 계보화 하고 구축하는 적업이 이번에 내놓은 7권의 결실"이라면서 매 시기마다 특성을 지닌 여성들의 글쓰기가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독자들이 경험하기 바란다"고 밝혔다. 

-공론장에 출현한 여성의 글을 한국 여성문학사의 기원에 둔 이유는?

"'여학교설시통문'과 '애국가' 두 개가 1898년 같은 해에 나와서 이 해를 1권의 시작점으로 잡았다. 그동안 나온 문학사들이 근대 문학의 기점을 어떤 작품으로 꼽고 있는지 유심히 보고, 논문을 쓸 때마다 복기했다. 1898년 여성이 공론장에 등장한 것이 중요한 이유는 여성이 자신의 목소리와 언어로 글을 쓴다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통 얘기하는 소설, 시, 희곡, 수필, 평론 같은 고정된 장르는 문학과 비문학의 경계가 무너지고 문학 개념도 계속 유동하고 있기 때문에 변화할 수밖에 없다. 고정된 장르 규범을 깨는 '대항 정전'으로서 의미를 생각했다."(김양선)

-선택과 배제는 어쩔 수 없는 과정이겠지만 선정된 작가와 대표작이 기존 시각과 다른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어떤 기준인가. 

"1990년대 들어서 한국의 여성문학은 더이상 주변이 아니라 중심부로 진입했다는 판단을 내렸다. 90년대부터는 판권 문제로 일부 실리지 못한 작품들도 있지만, 다 실렸을 때는 엄청난 분량이 될 정도로 많은 여성 작가가 등장했다. 단순히 숫자만이 아니라 90년대 문학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견인했던 것이 여성문학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100년 역사의 끝 무렵에 이르렀을 때 한국 여성문학은 더이상 마이너리티가 아닌 일정한 성취를 이루어냈다. 미국의 경우 1970년대 들어서 여성문학은 마이너리티가 아니라고 선언하고 여성이라는 좁은 잣대로만 판단하지 않을 정도의 단계에 올라선다. 한국에서는 그 시기가 1990년대가 아닐까 생각한다."(이명호)

 

"상당히 민감한 질문이다. 근대의 작품은 많지 않으니 괜찮은데 1950~60년대, 특히 1970~90년대로 오면 작가들이 많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논의되는 과정에서 빠진 작가나 작품군이 있다. 지금까지 기존 문학사에서 선정한 대표작이라 하더라도 고정된 관점이 아니라 시대나 역사에 따라 끊임없이 유동하는 복합적 시각으로 본다면, 어떤 작품들은 그 작가의 대표작에서 배제될 수 있다."(김양선)
 

김양선 교수는 대표작을 교체한 예로 그가 집필한 2권에 수록한 소설가 박화성(1904~1988)의 작품을 들었다. 기존에는 박화성 대표작으로 '하수도 공사'(1932)를 내세웠으나 이는 "여성이 집필한 경향파 작품이 드물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면서 대표작으로 '추석 전야'(1925)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경향파 작품이면서도 아이를 키우는 주인공 여성이 그 당시 노동 현실과 함께 공장에서 당하는 성적 차별의 현실, 이런 부분들을 상당히 밀도 있게 그렸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한국 여성문학사를 집필한 필자들은 '선택과 배제'의 과정이 민감하고 힘들었다고 말한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이번 작업을 통해서 새롭게 발견된 작가나 작품들은?
"희곡은 거의 다 새롭게 발굴됐다고 할 수 있다. 김명순(1896~1951)은 소설이나 시로만 알려졌는데 '두 애인'이란 희곡을 썼고, 박화성과 김자림(1926~1994)의 희곡도 문학계에서는 전혀 주목하지 않았다. 1980~90년대 정복근, 엄인희(1955~2001)의 작품들은 일부 소개가 됐지만 우리가 뽑은 것들은 새롭게 소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이희원)


"박순녀(1928~ )나 이정호(1930~2016) 같은 작가들은 기존 선집이나 문학사 서술 안에 들어간 적이 없다. 이정호의 경우는 향토색이 짙은 관북 지역 사투리라든지 야생의 자연을 얘기하는 작가로 알려졌는데, 우리는 그를 6.25전쟁에 대해 고발하는 작가로 보았다. 전쟁이라는 것을 남성적 카니발리즘, 여성이 교환되고 희생되는 구조로 굉장히 독특하게 그려냈다. 1960년대 한국 문학사에 최인훈만 있었던 게 아니라, 박순녀도 있었다. 그는 월남 작가이고 문단 활동도 별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변화 되어 있는 작가로, 작품성도 상당하다. 난민의 이방인 시선으로 한국사를 짚어보는 방식과 여성의 시각이 돌올하다."(김은하)


"시의 경우에도 기존 문학사나 선집에 포함되지 않았던 시인들이 꽤 추가됐다. 1980년대 노동 시인으로는 박노해·백무산을 떠올리게 되지만, 묻혀 있던 여성 노동자 시인들도 있었다. 최명자 정명자 시인이 그들인데, 최명자 시인은 버스 안내원으로 일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시를 썼다. 이들의 작품은 기존 문학사나 선집에서 한 번도 다뤄지지 않았다. 1980~90년대 현대시의 경우는 최근 들어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 이전 시기 여성 시에 대한 연구는 많이 축적되지 못한 상황이다. 현대시 연구자들이 여성 시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면 좋겠다."(이경수) 

 

-1950~60년대 여성 작가들이 상대적으로 더 위축된 이유는?
"페미니스트 연구자들마저 1950~60년대 작가들이 '여류'라는 것을 권력으로 내세워 체제에 굉장히 순응적인 여성 역할을 했고, 여성의 해방과 각성을 유도하기보다는 여성을 길들이는 역할을 했다고 봤던 것 같다. 이러한 분석들이 만연했기 때문에 오정희·박완서 이전에는 여성작가가 없는 것처럼 취급되어 온 게 아닌가 싶다. 문학 제도라는 제한된 마당 안에서 여성 작가들이 일종의 교섭과 타협, 뒤집기를 한다고 볼 때 그들의 작품을 새롭게 읽어낼 수 있는 틈이 열리지 않을까."(김은하) 

 

▲여성문학사연구모임은 향후 한두 권으로 압축한 문학사와 깊이 있는 대중 해설서도 펴낼 계획이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찔레꽃'처럼 통속 소설로 알려진 작품들도 새롭게 평가했다.
"사실 대중소설을 충분히 담지는 못했다. 나중에 보완이 된다면 여성 작가들의 대중 서사가 지니고 있는 전복적 의미를 더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김말봉(1901~1962) 장편 '찔레꽃'에 대해 임화(1908~1953)는 통속의 최고봉으로 평가하기도 했지만, 당대의 자본 질서 속에서 여성들이 무언가를 얻어내려고 했던 능동적인 노력을 주목하면 다시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의외로 여러 여성들이 연재 소설 형태 등으로 많은 장편을 썼다. 그 작품들을 통해 여성이 어떻게 욕망을 드러내고 균열된 모습을 보이는지 적극적으로 해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통속 소설로 폄하했던 텍스트들을 새롭게 읽어낼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히 열려 있다."(김양선)


-각별히 교육 현장을 염두에 둔 이유는?
"문학이 점점 주변부로 밀리는 상황으로 보이는데 정확한 텍스트가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것들도 문제라고 본다. 원본 텍스트를 확정해주는 작업이 있어야 후속 세대의 학문이 가능해진다고 생각한다. 이번 한국 여성문학 선집이 정본을 정리해 놓은 첫 작업으로 받아들여지기 바란다. 출판사의 사전 예약 판매가 큰 호응을 얻었다는 소식에 깜짝 놀랐다. 이 정도로 갈급한 수요가 있었다니 늦게 낸 것에 대한 죄송한 마음도 있다. 많은 대학에서 교재로 활용하기를 기대한다."(이선옥)


이번 선집에는 원문과 함께 작금의 맞춤법으로 다시 풀어낸 작품들도 수록했다. 향후 계획에 대해서는 "한두 권 정도로 압축된 선집이나 대중 독자들이 읽을 수 있는 깊이 있는 해설서를 내고 싶다"면서 "궁극적으로는 이번에 펴낸 여성 문학사 100년의 원재료를 바탕으로 더 제대로 된 여성 문학사 공동작업을 하고 싶다"고 김양선 교수가 대표로 밝혔다.

이날 간담회 사회를 맡은 박혜진(문학평론가) 민음사 한국문학 팀장은 "책이 나오기도 전에 인터넷서점에서 295세트 펀딩을 받았다"면서 "통상 대형출판사에서 펴내는 한 쇄가 다 판매된 셈인데 예상했던 것보다는 두세 배 이상의 반응이었다"고 밝혔다. 박 팀장은 "1990년대를 지나면서 (여성) 작가들이 많아지고 창작자들이 풍성해지면서 지금은 폭발적으로 독자들이 많아졌기 때문에 이런 작업이 성과를 보이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여학교설시통문'의 비분이 100년 만에 거둔 결실이다.

'슬프도다. 전일을 생각하면 사나이가 위력으로 여편네를 압제하려고 한갓 옛글을 빙자하여 말하되 여자는 안에 있어 밖을 말하지 말며 술과 밥을 지음이 마땅하다 하는지라. 어찌하여 사지 육체가 사나이와 일반이거늘 이 같은 압제를 받아 세상 형편을 알지 못하고 죽은 사람 모양이 되리오.'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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