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광복군] ④ 일본 '치욕의 참패', 그곳에 우리 공작대가 있었다
송창섭
realsong@kpinews.kr | 2023-11-21 16:02:03
올 초 부족 갈등으로 수백 명 사망한 마니푸르주, 임팔 전투 현장
임팔 전투, 인도·미얀마 전선 최대 격전이자 日선 '패전의 대명사'
공작대, 임팔·비슈누푸르·캉글라통비·우크룰 등에서 전투 활약
메이테이족이 많이 사는 마니푸르 주도(州都) 임팔에서 쿠키족 거주지인 캉글라통비까지는 차로 1시간 정도 걸린다. 캉글라통비에 가까이 오니 시가전을 위한 모래더미가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UPI뉴스 취재진을 안내한 나가족 출신 아카주는 "외국인들은 무조건 돌려보낸다. 그나마 다행인 줄 알아라. 당신들이 메이테이족이었다면 즉시 사살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임팔에는 영국군 제4군단 사령부가 있었다. 일본군은 이곳에 거점을 확보해야만 인도 본토로 진격할 수 있었다. 반대로 영국군은 여기가 마지노선이었다. 임팔까지 밀리면 콜카타가 일본군 손아귀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 임팔전투 당시 공작대가 활동한 캉글라 포트. 마니푸르 왕국의 왕궁으로 쓰였던 곳이다. 지금은 개보수를 이유로 외부에 개방하지 않고 있다. [UPI뉴스 송창섭]
임팔 시내에 위치한 캉글라 포트는 영국 식민지가 되기 전 이 지역을 지배한 마니푸르 왕국의 왕궁이었다.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궁성 주변을 해자로 두른 캉글라 포트 안은 옛 왕궁의 모습이다. 지금은 개보수 작업 중이어서 문이 닫혀 있다.
임팔 전투(1944년 3~7월) 당시 영국군 전지선전대는 이곳에 머물면서 전선을 오간 것으로 보인다. 인면전구공작대(이하 공작대) 대원들은 1944년 5월 11일부터 6월 10일까지 전지선전대 본부에서 일본어로 된 선전물 '병대동무'를 10회 발행했다.
▲ 임팔 일대의 인면전구공작대 활동 관련 장소(빨간색 표시 지명). [UPI뉴스]
전투는 임팔 주변에서 광범위하게 벌어졌다. 임팔을 기점으로 북쪽에 있는 코히마와 남쪽 미얀마 국경에 이르는 도로를 중심으로 동쪽 우크룰(Ukhrul), 타무(Tamu), 서쪽 실차르(Silchar) 등 곳곳이 격전장이었다.
공작대장 한지성 지사 일기 등 여러 기록에 따르면, 공작대는 영국군 201‧204 '전지선전대' 소속이었다. 이들에게 부여된 업무는 투항 권유 등이 담긴 일본어 전단지 살포, 선무 방송, 노획된 일본군 문서 해독 등이었다. 이런 이유로 일부 학자는 공작대를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정부가 비정규전 특수공작 임무를 위해 만든 부대인 SOE(Special Operations Executive) 소속으로 보기도 한다.
임팔은 험준한 아라칸 산맥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있다. 일본군은 미얀마 국경을 넘어 우크룰, 티딤, 타무 3곳을 통해 임팔로 진격했다.
캉글라통비도 격전지다. 1944년 5월 중순 박영진 공작대원은 캉글라통비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방송으로 투항을 권유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이 방송을 들은 일본군이 전선을 뒤로 옮겨 영국군이 일본군 진지를 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고 한다.
캉글라통비를 거쳐 북쪽으로 내달리면 나갈랜드주 대표 도시 디마푸르와 코히마가 나온다. 디마푸르는 인도 동북부의 교통 요지다.
나갈랜드주 역시 격전지였다. 미얀마 국경을 넘어선 일본군은 나갈랜드 주도인 코히마에서 1944년 4월 영국군과 대치했다. 영국군이 테니스코트로 쓰던 곳을 중심으로 양측이 교전을 벌였다고 해 '테니스코트 전투'로 명명됐다. 현재 영국·인도군 전사자 묘역도 이곳에 들어서 있다. 일본군은 코히마에서 대패하면서 전세가 꺾였다.
▲ 인도 나갈랜드주 코히마 언덕에 자리한 전쟁 묘지. 기념탑 주변에 있는 흰색선이 테니스코트 라인이다. 당시 영국군과 일본군은 이곳에서 격전을 벌였다. [UPI뉴스 서창완] 임팔에서 남쪽 방향으로 내달리면 또 다른 격전지 비슈누푸르(Bishnupur‧옛 비센푸르)가 나오고 비슈누푸르를 지나 1시간가량 더 가면 미얀마 국경이다. 1944년 3월 대반격에 나선 영국군이 현재 미얀마 땅인 티딤까지 내려갔다가 일본군에 포위되는 위기 상황에서 공작대 문응국 부대장 기지로 겨우 빠져나왔는데, 그때 지나온 길이 바로 이 도로다.
임팔 전투는 동남아 전쟁사에서 손꼽히는 대혈투였다. 승자인 영국군에게는 자랑스러운 전사라면 일본에게는 치욕의 역사다. 일본에서 '임팔'은 '패전의 대명사'다.
비슈누푸르에는 일본 민관이 합동으로 지은 추모시설이 있다. 인도평화공원, 임팔평화박물관 등등 하나같이 '평화'를 강조한다. 비슈누푸르 전투에서 사망한 일본군 넋을 기리는 추모탑도 부근에 있다.
일본재단과 마니푸르 주정부가 함께 지은 임팔평화박물관에 들어서자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쓴 '평화'라는 편액이 눈에 들어왔다. 전쟁을 시작한 가해자 일본이 '평화'를 외친다는 것이 쉽게 납득되지 않았다.
박물관 내부 전시물은 당시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보여줬다. 일본군 군속 자격으로 참전한 한 일본인이 당시 상황을 그린 삽화가 눈길을 끌었다. 험난한 산비탈에서 수십 명의 일본군이 커다란 군용 트럭을 밀고 있는 이 그림은 보급로마저 원활하지 않았던 당시 전투가 얼마나 무모한 것이었는지를 드러낸다.
▲ 인도 임팔에서 남서쪽으로 약 30km 떨어진 비슈누푸르 시가지. 임팔 대회전 당시 격전지다. 공작대는 1944년 4, 5월 이곳에서 대적 선무 방송과 노획 문서 번역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UPI뉴스 송창섭] 이외에도 일본 정부는 캉글라통비, 우크룰 등지에 당시 전투에서 사망한 일본군의 넋을 기리는 추모탑을 세웠다. 전쟁이 끝난 후 영국도 임팔에 영국과 인도 군인들을 위로하기 위해 묘역을 조성했다.
임팔 동북쪽에 있는 우크룰에서도 공작대원들의 선무 방송은 주효했다. 한 지사 일기에는 선무 방송을 들은 일본군이 스스로 진지를 포기하고 철수했다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일본군 전문가인 최종호 변호사는 "당시 영국‧인도 연합군에는 일본 본토 수준의 일본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반대로 일제 치하에 있던 우리 국민들은 일본어가 능수능란했기에 공작대의 선무 방송이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기록에 따르면, 1944년 4월쯤 비슈누푸르에서 공작대원들이 일본군 2개 대대 650명을 대상으로 선무 방송을 했다. 이외에도 적으로부터 노획한 문서를 분석해 일본군의 작전계획, 무기와 병력 배치 상황 등을 파악했다. 무선 도청과 암호 해독에서도 공작대원들의 기여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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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PI뉴스 / 탐사보도부 송창섭·서창완 기자 tamsa@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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