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개골 변형은 필수?…APEC 빛내는 신라 금관 미스터리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 2025-10-28 15:14:17
경주박물관 특별전 '신라 금관, 권력과 위신'
현존 신라 금관 6점, 104년 만에 첫 한자리
출토 위치, 무덤 양식, 제작 시기 등 공통점
금관 주인·용도 등 풀어야 할 수수께끼 다수
국립경주박물관 특별전 '신라 금관, 권력과 위신'이 28일 막을 올렸다.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기념해 열리는 이번 특별전은 현존하는 신라 금관 6점을 모두 선보인다. 6점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1921년 신라 금관 최초 출토 후 104년 만에 처음이다.
금관은 '황금의 나라' 신라를 상징하는 문화재로 오랫동안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여전히 많다. 금관 현황, 미스터리와 관련된 주요 사안을 살펴보자.
① 신라 6점, 가야 2점: 신라 금관 6점 중 5점은 1921년 금관총을 시작으로 1924년 금령총, 1926년 서봉총, 1973년 천마총, 1974년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됐다. 나머지 1점은 도굴됐는데, 국가가 압수한 것이다. 도굴 장소는 경주 교동 폐고분으로 알려져 있다.
출토된 5점은 고분 위치 등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모두 경주 대릉원 일대 고분에서 출토됐다. 무덤 양식은 돌무지덧널무덤이다. 만들어진 시기는 5~6세기라고 보는 이들이 다수다. 김씨가 박씨와 석씨를 제치고 왕위를 독점한 4세기 말 이후 제작됐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말이다.
금관이 신라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가야 금관으로 전해지는 것도 2점 존재한다. 1점은 국내에, 나머지는 일본에 있다. 고구려와 백제 유적에서는 금관이 출토되지 않았다.
② 주인은 누구: 금관 주인은 당연히 왕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듯하다. 그러나 발굴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북분(北墳)과 남분(南墳)이 표주박 모양으로 붙어 있는 황남대총이 잘 보여준다.
금관은 여성 무덤으로 추정되는 북분에서 나왔다. 남성 무덤으로 여겨지는 남분에서는 금관보다 아래 등급인 금동관과 은관이 출토됐다. 황남대총 조성 시기는 신라에 여왕이 출현하기 이전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북분 금관 주인공을 여왕으로 보기 어렵다.
발굴 결과를 근거로 왕만이 아니라 왕비, 왕자 등도 금관 주인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연구자가 많다. 금관 주인이 무당이나 제사장이었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신라 왕비가 금관 주인으로서 제사장 역할을 하며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③ 생전에 썼을까: 금관 용도가 무엇이었을지도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큰 틀에서 연구자들의 견해는 비실용품설과 실용품설로 나뉜다.
비실용품설은 금관이 죽은 사람을 위해 부장한 장송 의례용품이었을 것이라고 본다. 금관이 너무 약하고 장식물이 많아 주인이 생전에 금관을 쓰고 활동했을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해석이다. 무덤 주인이 이마에 금관을 쓴 모습이 아니라 금관이 얼굴 전체를 덮는 형태로 출토된 사례가 있다는 점도 중시한다.
실용품설은 금관이 왕의 권위를 세워야 하는 주요 의식 등에서 실제로 사용됐을 것이라고 여긴다. 의식에 쓰인 관이기 때문에 굳이 일상생활에서 착용하기 편한 형태로 만들 이유가 없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학계에서는 비실용품설에 더 무게가 실리는 분위기지만 실용품설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만만찮다.
④ 왜 작고 좁을까: 신라 금관은 작고 폭이 좁다. 가장 긴 천마총 금관 지름이 20cm에 불과하다. 신라 금관의 평균 둘레는 성인 남성이 아닌 열두 살 남자아이 머리둘레 정도다.
금관 크기가 편두(扁頭) 풍습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다. 편두는 뼈가 무른 갓난아기의 두개골을 돌 등을 활용해 납작하게 변형시킨 것을 말한다.
중국 사서인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삼한 가운데 진한에 편두 풍습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사로국 즉 신라는 본래 진한의 여러 소국 중 하나였다. 신라 지배층이 편두 풍습을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본다면 금관이 작고 폭이 좁은 이유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신라 금관과 유사한 유물이 발견된 아프가니스탄의 틸리아 테페 지역과 흑해 연안에서도 편두 흔적을 찾을 수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금관을 쓴 집단에서 편두를 한 국외 사례들이 확인되며 신라에서도 편두가 유행했을 것이라는 시각이다.
편두 관련설이 사실이라면 두개골 변형이 금관 착용의 필수 조건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눈길을 끄는 해석이지만 신라 지배층이 편두 풍습을 광범위하게 따랐음을 입증하는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⑤ 어디서 유래했을까: 신라 금관과 그 장식물의 연원에 대한 의견도 각양각색이다. △시베리아 샤먼의 관이나 북방 기마 유목민 문화의 영향을 받았을 것 △경주 김씨 시조인 김알지 신화와 관련됐을 것 △고조선 때부터 이어진 한민족 특유의 양식이었을 것 등 다양한 의견이 제시된 상태다.
KPI뉴스 /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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