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팩트를 이기는 권력은 없다"
윤흥식
| 2019-06-27 14:44:11
얼핏 보면 동네 아저씨처럼 순하게 생겼다. 그런데 알고 보면 세상에 독종도 이런 독종이 없다. 한번 물면 놓는 법이 없다고 해서 '불독 기자'라는 별명이 붙었다. <시사IN> 정희상 탐사보도 전문 선임기자 얘기다.
국내 언론계에 탐사보도(Investigative Reporting)라는 개념조차 생소하던 1989년 월간 <말> 기자로 시작해 <시사저널>과 <시사IN>을 거치며, 강산이 세 번 바뀔 만한 세월 동안 한 우물을 파온 그가 신간 <팩트와 권력>(은행나무)을 펴냈다.
'탐사보도 전문 기자의 권력형 사건 X파일'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그의 집요한 추적이 아니었더라면 영원히 묻혀버렸을 수도 있었을 '권력형 범죄'의 추악한 민낯과 그것들을 파헤치기 위해 몸부림쳐온 '기자 정희상'의 분투를 그리고 있다.
말이 그럴듯해 '탐사보도'지, 권력층이 기를 쓰고 감추고자 하는 어두운 진실을 아무런 수사권도 없는 기자가 펜 하나로 파헤쳐나가는 과정은 사실상 '극한노동'에 다름 아니다.
"나라가 망했으면 망했지, 절대로 관련 자료를 공개할 수 없다"는 국가 권력, 사회 특권층의 오만을 발가벗긴 이 책은, 사실을 은폐하는 자들에 대한 끈질긴 도전이며 망각의 편리에 길들여진 우리 사회를 향한 경종이라고 할 수 있다.
정희상은 지난 2005년 <대한민국의 함정>을 펴내 화제를 모은 바 있다. 그의 끈질긴 추적 끝에 세상에 진실을 드러낸 몇 가지 의제들은 이후 사회적으로 공론화되면서 대안 마련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김훈 중위 사망사건과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사건, 그리고 이완용·송병준 등 친일 매국노 재산상속 사건 등이 그것이다. 그의 집요한 취재와 보도가 없었더라면 국가 권력의 직무유기 속에 영원히 묻혀버릴 수도 있는 사안들이었다.
<팩트와 권력>은 한마디로 '기자 정희상'이 취재 현장에서 숙명처럼 부딪쳤던 팩트와 권력 사이의 투쟁에 관한 보고서다. 자칫 딱딱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책이 잘 다듬어진 소설 이상으로 흥미롭게 읽히는 것은 저자의 타고난 문장력과도 관련이 있다.
2011년 한나라당 나경원 서울시장 후보(현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의 억대 호화 피부클리닉 출입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후배 여기자와 함께 현장에 잠입하는 대목이 대표적이다. 평소 타고, 신을 일 없는 외제차와 명품구두를 빌린 뒤 연예인을 지망하는 젊은 여성의 '스폰서'로 신분을 가장해 병원장과 대면하는 장면은 '웰메이드 첩보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책은 이밖에도 2013년, 사건이 처음 세상에 드러난 이래 아직도 피해 여성들의 절규가 계속되는 '김학의 원주 별장 성폭력 의혹 사건'과 단군 이래 최대 사기범죄라는 수식어를 연거푸 갈아치운 '제이유 주수도 및 조희팔 사기 사건' 등 권력형 범죄들의 민낯을 거침없이 벗기고 있다.
외국이라고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겠지만, 한국에서 탐사보도 전문기자로 평생을 산다는 것은 가시밭길을 걷는 일에 다름 아니다. 많으면 한 해에만 10건이 넘는 고소를 당하고, 때로는 조직폭력배의 물리적 위협과도 맞서야 한다. 어지간한 강단과 사명감이 없으면 감당하기 힘든 일이다.
정희상은 30년의 탐사보도 전문기자 생활 동안 50여 건에 이르는 민·형사 제소를 당했다. 그리고 모두 이겼다. 그를 겨냥했던 그 수많은 소송은 모두 음습한 권력이 그의 입에 재갈을 물리기 위해 선제적으로 시도한 무리한 법적 조치들이었음이 결과적으로 드러났다.
그의 언론계 선배이자 <시사저널> 시절 상사였던 소설가 김훈은 책에 이런 '추천의 말'을 적었다.
"사실을 다룰 줄 아는 기자들이 점차 멸종되어가는 시대, 사실로 다가가는 길이 얼마나 험난한 것인지, 그리고 그 길이 공동체의 건강한 미래를 위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정희상 기자의 글은 보여준다. 사실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자들과의 싸움을 모두 통과해야만 기자는 그 길을 갈 수 있다. 그래서 사실로 나아가는 길은 당대 전체와의 싸움이고, 망각의 편안함에 길들여진 세상 전체와의 싸움이다."
1963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한국외국어대학교 서반아어과, 서강대 언론대학원을 졸업한 정희상은 대한민국을 뒤흔든 수많은 특종기사로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과 삼성언론상, 진실의 힘 인권상 등을 수상했다. 2007년 삼성그룹 비판기사 삭제사건으로 촉발된 <시사저널> 사태 당시 노조위원장으로 자본 권력으로부터 편집권 독립을 쟁취하는 투쟁에 앞장서기도 했다.
저서로는 <이대로는 눈을 감을 수 없소>, <대한민국의 함정>, <검사와 스폰서>, <채의진 평전: 빨간 베레모> 등이 있다.
그는 〈UPI뉴스〉
KPI뉴스 / 윤흥식 기자 jardin@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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