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전속결' 대법원장이 소환한 세종의 공법 '17년 논쟁'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 2025-09-30 10:56:29

[김덕련의 역사산책 30] 조희대 대법원장과 세종의 법
대법원장, 세종 사법 철학 상찬…공법 추진 거론
지난했던 공법 도입…최종안 확정까지 17년 걸려
숙의, 광범위한 의견 수렴 등 제정 과정이 인상적
대법원의 이재명 후보 사건 처리 방식과는 달라

조희대 대법원장은 지난 22일 조선 제4대 국왕 세종은 법을 왕권 강화를 위한 통치 수단으로 삼지 않았다며 세종의 사법 철학을 상찬했다. 정치권에선 조 대법원장이 자신의 사퇴를 요구하는 여권을 에둘러 겨냥한 발언이라는 해석이 나오면서 논란이 일었다.

여야 공방과 별개로 조 대법원장이 그 의의를 강조한 세종 관련 사례 중엔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것도 있다. 조 대법원장 본인의 행보와 부합하기보다는 오히려 대비되는 것으로 보이는 사례라는 이유에서다. 

 

▲ 조희대 대법원장이 지난 22일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열린 2025 세종 국제 콘퍼런스에 참석해 축사를 하고 있다. [뉴시스]

 

그중 하나가 세종의 공법(貢法) 추진 과정이다. 조 대법원장은 세종의 소통과 상생 가치 중시를 거론하며 "공법 시행을 앞두고는 전국적으로 민심을 수렴해 백성들의 뜻을 반영하고자 노력했다"고 평가했다.

공법은 세종 때 도입된 전세(田稅), 즉 논밭에 부과된 세금 제도다. 토지의 질에 따라 6등급으로 나누고(전분6등) 풍흉에 따라 매년 9등급으로 구분해(연분9등) 세율을 차등 적용하는 것이 주요 골자다.

공법 도입 이전엔 '답험손실법'이 시행됐다. 현지에 가서 농사 작황을 조사해(踏驗, 답험) 손실 비율에 따라 세액을 감면해주는 방식이었다. 고려 말에 마련된 제도로 조선 건국 후 태조 때와 태종 때 수정·보완 작업을 거쳤다.

이를 대체하는 공법 최종안은 1444년(세종 26년)에 확정됐다. 1427년(세종 9년) 세종이 공법 시행 방법에 관한 과거 시험 문제를 낸 것을 계기로 논의가 시작된 지 17년 만이었다.

세종이 공법 문제를 제기한 것은 답험손실법의 폐단 때문이었다. 답험손실법은 작황에 따라 세액을 조정하기 때문에 국가의 한 해 수입을 예측할 수 없었다. 답험 담당관의 부정과 자의적 집행이 이뤄질 소지가 다분하고 답험에 들어가는 행정 비용이 막대한 것도 문제였다.

이에 더해 학계에서는 삼대(三代)의 제도를 조선에서 실현하겠다는 세종의 문제의식도 공법 도입을 추진한 주요 동기였을 것이라고 본다. 삼대는 유학에서 이상적인 사회로 여기는 중국 고대의 하·상·주 시대를 말하는데, 공법은 하나라에서 시행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세종이 처음에 구상한 공법 시행안의 핵심은 정액세제였다. 풍흉과 상관없이 세액을 일정하게 고정해 세수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답험 과정에서 발생하는 민폐를 없애겠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최종안 확정까지 17년이나 걸린 데서 드러나듯이 공법 도입 과정은 지난했다. 세종의 공법 기획은 황희, 맹사성을 비롯한 많은 신하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공법 도입 가부, 시행할 경우 구체적인 방안 등을 놓고 치열한 논쟁이 거듭됐다.

사실 공법은 삼대의 제도로 여겨지긴 했지만 유학자들 사이에서 평이 안 좋았다. 동아시아 최악의 조세 제도로 혹평을 받았다는 얘기가 근래 학계에서 나올 정도다. 유교의 핵심 경전 중 하나인 '맹자'에도 공법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수록돼 있다.

혹평의 밑바탕에는 정액세제에 대한 우려가 놓여 있었다. 세종의 기획에 반대하는 쪽에서는 정액세제인 공법이 가난한 사람, 토질이 나쁜 지역 주민의 부담을 늘리고 부유층과 질 좋은 토지 소유자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풍흉에 따른 수확량 차이가 큰 현실에서 적정한 고정 세액이 어느 정도일지 정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태조와 태종이 정한 법을 가볍게 고칠 수 없다', '조선은 중국과 지형이 다르기 때문에 공법이 불가능하다'는 비판 등 세종이 넘어야 할 산은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세종이 택한 길은 '공법 시행안 제시 → 반대 측과 격론 → 보류 후 수정안을 마련해 몇 년 후 재추진'이라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1430년(세종 12년)에는 17만2806명에게 공법 시행 찬반을 물었다. 대상자 대부분이 일반 백성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끄는 조사였다.

그런 과정을 거쳐 1444년에 확정된 최종안은 공법이라는 명칭을 유지하기는 했지만 세종이 애초 기획한 정액세제가 아니었다. 이는 풍흉에 따라 세율을 다르게 하는 연분9등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처럼 세종 시기 공법은 지속적 토론과 숙의, 광범위한 의견 수렴, 수정·보완을 통한 합의 도출로 압축할 수 있는 제정 과정이 인상적이다.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히고 사회적 파장이 예상되는 사안을 처리해야 할 때 참고할 만한 사례다.

공법 제정 과정은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제21대 대선을 앞두고 당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사건 상고심에서 보인 모습과는 다르다. 대법원은 유례없는 속전속결 방식으로 유죄 취지 파기 환송을 해 후폭풍이 거셌다. 조 대법원장이 세종의 공법 추진을 사례로 들며 소통과 상생을 거론하는 건 어색하게 비친다.


△주요 참조=이민우 논문(「세종대 공법 논쟁의 이념적 성격」, 『지역과역사』 45, 2019), 소순규 논문(「세종대 공법(貢法) 도입의 재정적 맥락 - 원인, 결과, 영향 -」, 『역사와현실』 118, 2020), 소진형 논문(「세종시대 공법 논쟁에서 나타난 조세개혁과 인정(仁政)의 관계, 그리고 그 범주 및 의미」, 『정치사상연구』 24-2, 2018)

 

KPI뉴스 /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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