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피해자 제주 해녀 진아영의 피맺힌 무명천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 2025-08-26 09:21:10
[김덕련의 역사산책 26] 무명천 할머니 21주기
강경 진압 광풍 불던 1949년 토벌대 총에 맞아
사라진 아래턱, 평생 무명천으로 가리고 생활
제대로 말할 수도, 먹을 수도 없던 고통의 55년
"하루만이라도 진 할머니 삶과 죽음 생각했으면" ▲ '무명천 할머니' 이야기를 다룬 국가유산채널 영상 '백비, 나의 이름을 찾아서'의 한 장면. [국가유산채널 갈무리]
강경 진압이 한창이던 때였다. 강경 진압의 주요 계기는 1948년 11월 17일 대통령령으로 선포된 계엄이었다. 그해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이어진 강경 진압 작전으로 제주도는 초토화됐다.
토벌대는 재판 절차 없이, 남녀노소 구분도 없이 곳곳에서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웠다. 국무총리 소속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에서 2003년 발간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는 그 배경으로 정권 최상층이 내린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 지시를 주목했다.
이 사건 희생자도 대부분 이 시기에 생겨났다. 보고서에 따르면 15세 이하 희생자의 76.5%, 61세 이상 희생자의 76.6%가 1948년 11월~1949년 2월 발생했다.
강경 진압 광풍에 휘말려 총에 맞았지만 진아영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했는데도 강한 생명력으로 살아났다. 그러나 아래턱은 잃은 상태였다.
끔찍한 사건을 겪은 후 언니와 사촌이 사는 제주시 한림읍 월령리로 거처를 옮겼다. 국내 유일의 선인장 야생 군락이 있어 선인장 마을로 알려진 곳이다. 그곳에서 선인장 열매나 바닷가 톳을 채취해 팔아 생계를 이어갔다.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운 날이 하루도 없는 세월이었다. 턱이 없어 말을 제대로 할 수도, 음식을 온전히 섭취할 수도 없었다. 그로 인해 위장병과 영양실조에 계속 시달렸다. 진통제와 링거액이 없으면 잠들기 어려운 나날이기도 했다.
집을 잠깐 비울 때도 안팎으로 자물쇠를 채웠다. 토벌대가 들이닥쳐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그날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해 보이는 모습으로 여겨졌다. 얼마나 많이 채웠다 풀었는지 자물쇠가 반들반들 길이 들 정도였다고 한다.
진아영은 사라진 아래턱 부분이 외부에 드러나지 않도록 무명천으로 감싸고 생활했다. 해녀로 바닷속을 누빌 때 물옷 재료였을 무명천이 이제는 그렇게 다른 용도로 사용됐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음식을 먹지도, 물을 마시지도 않았다. 잔칫집이나 상갓집에서 음식을 받아도 거기서 먹지 않고 집에 가져갔다. 무명천을 풀어 사라진 아래턱 부분을 남들에게 드러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총에 맞았을 때 35세이던 진아영은 망가진 몸으로 55년을 더 살았다. 무명천으로 동여매고 견뎌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진아영이라는 이름 대신 '무명천 할머니'로 불리기 시작했다.
진아영이 '무명천 할머니'가 되는 동안 4·3사건을 둘러싼 사회 분위기도 서서히 달라졌다. 피해자들은 사건 이후 수십 년 동안 가해 세력에게 책임을 묻기는커녕 죄인으로 몰려 숨죽여 지내야 했다. 학살과 인권 유린의 진상 규명을 요구했다가는 언제든 빨갱이로 몰릴 수 있었다.
그러다가 1980년대 후반부터 피해자와 유족 가운데 힘겹게 입을 여는 이들이 나타났다. 1987년 6월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며 한국 사회가 민주화로 나아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노력의 결과물로 2000년 4·3특별법이 제정되고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공식 사과했다.
4·3사건의 진실이 조금씩 밝혀지면서 '무명천 할머니'도 뒤늦게나마 국가로부터 약간의 치료비를 지원받게 됐다. 금액은 약 850만 원. 그게 전부였다. '무명천 할머니'는 2004년 9월 8일 세상을 떠났다.
21주기를 맞아 무명천진아영할머니삶터보존회와 월령리마을회가 추모 문화 사업을 개최한다. 먼저 추모 전시를 오는 30일 제주시 탑동광장에서, 31일부터 다음달 6일까지는 '무명천 할머니'가 살았던 월령리 마을 일대에서 진행한다. 9월 8일에는 월령리 마을 해변공연장에서 추모 문화제를 연다.
1주기이던 2005년 9월, 4·3사건을 오래 취재한 한 언론인은 "8일 하루만이라도 진 할머니의 삶과 죽음을 생각해보았으면 한다"고 기사에 썼다. 온몸에 4·3의 상처를 새긴 채 살아온 할머니에 대한 추모는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의 몫일 것이라는 얘기도 했다. 별세 때는 떠들썩하다가 그 후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세태에 대한 아쉬움이 담긴 주문이었다.
그로부터 20년. 상황은 나아졌을까.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한국전쟁 전후에 자행된 숱한 민간인 학살 사건의 진실을 부정하는 극우 세력이 점점 목소리를 높이는 데서도 이는 잘 드러난다. '무명천 할머니'의 삶과 죽음을 하루만이라도 생각해봐야 할 필요성은 그만큼 커졌다.
강경 진압 광풍 불던 1949년 토벌대 총에 맞아
사라진 아래턱, 평생 무명천으로 가리고 생활
제대로 말할 수도, 먹을 수도 없던 고통의 55년
"하루만이라도 진 할머니 삶과 죽음 생각했으면"
무명천은 오랫동안 제주 해녀의 필수품이었다. 1970년대 고무 잠수복이 보급되기 전까지 해녀들은 무명천이나 광목으로 만든 물옷을 입고 바다에 뛰어들어 해산물을 채취했다.
진아영도 그런 해녀 중 한 명이었다. 1914년 지금의 제주시 한경면 판포리에서 태어난 진아영은 물질도 하고 집안 농사일도 하면서 평범하게 살아갔다.
4·3사건이 진행 중이던 1949년 1월 12일 진아영의 삶은 산산이 부서졌다. 전해에 봉기한 무장대를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토벌대가 마을로 들이닥쳤다. 진아영은 토벌대의 총탄을 턱에 맞고 쓰러졌다. 무장대가 아니었음에도 피할 수 없던 비극이었다.
강경 진압이 한창이던 때였다. 강경 진압의 주요 계기는 1948년 11월 17일 대통령령으로 선포된 계엄이었다. 그해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이어진 강경 진압 작전으로 제주도는 초토화됐다.
토벌대는 재판 절차 없이, 남녀노소 구분도 없이 곳곳에서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웠다. 국무총리 소속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에서 2003년 발간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는 그 배경으로 정권 최상층이 내린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 지시를 주목했다.
이 사건 희생자도 대부분 이 시기에 생겨났다. 보고서에 따르면 15세 이하 희생자의 76.5%, 61세 이상 희생자의 76.6%가 1948년 11월~1949년 2월 발생했다.
강경 진압 광풍에 휘말려 총에 맞았지만 진아영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했는데도 강한 생명력으로 살아났다. 그러나 아래턱은 잃은 상태였다.
끔찍한 사건을 겪은 후 언니와 사촌이 사는 제주시 한림읍 월령리로 거처를 옮겼다. 국내 유일의 선인장 야생 군락이 있어 선인장 마을로 알려진 곳이다. 그곳에서 선인장 열매나 바닷가 톳을 채취해 팔아 생계를 이어갔다.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운 날이 하루도 없는 세월이었다. 턱이 없어 말을 제대로 할 수도, 음식을 온전히 섭취할 수도 없었다. 그로 인해 위장병과 영양실조에 계속 시달렸다. 진통제와 링거액이 없으면 잠들기 어려운 나날이기도 했다.
집을 잠깐 비울 때도 안팎으로 자물쇠를 채웠다. 토벌대가 들이닥쳐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그날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해 보이는 모습으로 여겨졌다. 얼마나 많이 채웠다 풀었는지 자물쇠가 반들반들 길이 들 정도였다고 한다.
진아영은 사라진 아래턱 부분이 외부에 드러나지 않도록 무명천으로 감싸고 생활했다. 해녀로 바닷속을 누빌 때 물옷 재료였을 무명천이 이제는 그렇게 다른 용도로 사용됐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음식을 먹지도, 물을 마시지도 않았다. 잔칫집이나 상갓집에서 음식을 받아도 거기서 먹지 않고 집에 가져갔다. 무명천을 풀어 사라진 아래턱 부분을 남들에게 드러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총에 맞았을 때 35세이던 진아영은 망가진 몸으로 55년을 더 살았다. 무명천으로 동여매고 견뎌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진아영이라는 이름 대신 '무명천 할머니'로 불리기 시작했다.
진아영이 '무명천 할머니'가 되는 동안 4·3사건을 둘러싼 사회 분위기도 서서히 달라졌다. 피해자들은 사건 이후 수십 년 동안 가해 세력에게 책임을 묻기는커녕 죄인으로 몰려 숨죽여 지내야 했다. 학살과 인권 유린의 진상 규명을 요구했다가는 언제든 빨갱이로 몰릴 수 있었다.
그러다가 1980년대 후반부터 피해자와 유족 가운데 힘겹게 입을 여는 이들이 나타났다. 1987년 6월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며 한국 사회가 민주화로 나아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노력의 결과물로 2000년 4·3특별법이 제정되고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공식 사과했다.
4·3사건의 진실이 조금씩 밝혀지면서 '무명천 할머니'도 뒤늦게나마 국가로부터 약간의 치료비를 지원받게 됐다. 금액은 약 850만 원. 그게 전부였다. '무명천 할머니'는 2004년 9월 8일 세상을 떠났다.
21주기를 맞아 무명천진아영할머니삶터보존회와 월령리마을회가 추모 문화 사업을 개최한다. 먼저 추모 전시를 오는 30일 제주시 탑동광장에서, 31일부터 다음달 6일까지는 '무명천 할머니'가 살았던 월령리 마을 일대에서 진행한다. 9월 8일에는 월령리 마을 해변공연장에서 추모 문화제를 연다.
1주기이던 2005년 9월, 4·3사건을 오래 취재한 한 언론인은 "8일 하루만이라도 진 할머니의 삶과 죽음을 생각해보았으면 한다"고 기사에 썼다. 온몸에 4·3의 상처를 새긴 채 살아온 할머니에 대한 추모는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의 몫일 것이라는 얘기도 했다. 별세 때는 떠들썩하다가 그 후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세태에 대한 아쉬움이 담긴 주문이었다.
그로부터 20년. 상황은 나아졌을까.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한국전쟁 전후에 자행된 숱한 민간인 학살 사건의 진실을 부정하는 극우 세력이 점점 목소리를 높이는 데서도 이는 잘 드러난다. '무명천 할머니'의 삶과 죽음을 하루만이라도 생각해봐야 할 필요성은 그만큼 커졌다.
KPI뉴스 /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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