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은 왜 이완용에게 총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 2025-09-16 10:26:26

[김덕련의 역사산책 29] 이재명 의거, 숨은 이야기
1909년 친일파 이완용 척살 시도, 1910년 순국
[의문 ①] 이재명, 재판장에게 '권총 휴대' 답변
총 대신 칼 사용한 이유 말해주는 자료는 없어
[의문 ②] 살해된 인력거꾼, 사실 이완용 경호원?

대한제국 시기 이완용을 처단하려다 실패한 독립운동가 이재명(李在明). 

 

그는 대한제국 멸망 공표 32일 후인 1910년 9월 30일, 지금의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자리에 있던 경성감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향년 23세. 

 

▲ 동아일보 1924년 11월 16일 자 2면에 실린 이재명 사진. 1909년 의거 당시 동지 중 한 명인 이동수가 궐석 재판 시효 만료를 앞두고 이 무렵 체포된 것을 계기로 게재됐다.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화면 갈무리]

 

사건은 아홉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재명은 1909년 12월 22일 오전 종현천주교당, 즉 지금의 명동성당 앞에서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척살을 시도했다. 두 달 전인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 의거의 뒤를 잇는 의열 투쟁이었다.


친일파로 지탄을 받던 이완용은 이재명의 칼에 왼쪽 어깨와 오른쪽 등을 찔려 중상을 입었다. 그러나 일본인 의사들의 치료를 받아 목숨을 건졌다. 대신 예기치 못한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완용이 탄 인력거를 끌던 박원문이 이재명을 저지하려다 칼에 찔려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이재명은 현장에서 체포됐다. 이재명과 역할을 나눠 이완용은 물론 또 다른 친일파 거두 이용구까지 처단하려 했던 이재명 동료들도 잡혔다. 1910년 5월 18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이재명에게 사형, 그 동료들에게 징역형이 선고됐다. 넉 달 후 이재명은 순국했다.

이재명 의거는 안중근 의거와 함께 대한제국 말기의 대표적 의열 투쟁으로 불린다. 그런데 관련 연구가 많지 않다. 풀리지 않은 의문점도 있다. 두 가지가 대표적이다.

하나는 이재명은 왜 이완용에게 칼을 사용했을까 하는 것이다. 이재명과 달리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총으로 처형했다. 장인환과 전명운이 1908년 3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친일 행각을 벌이던 대한제국 외교 고문 스티븐스를 처단할 때도 총을 사용했다.

이와 관련해 김구 증언이 눈길을 끈다. 백범일지에 김구가 훗날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총장을 지내는 노백린과 함께 1909년 가을 이재명을 만난 이야기가 나온다.

황해도에서 활동하던 김구와 노백린은 이재명이 동네 어귀에서 총을 쏘아 대며 매국노를 총살하겠다고 소리친다는 말을 듣고 이재명을 불렀다. 이재명은 이완용을 위시해 몇 명을 죽이고자 준비 중이라며 단총(短銃) 즉 권총 한 정, 단도 한 자루, 이완용 사진 등을 보여줬다.

두 사람은 이재명을 "시세의 격변 때문에 헛된 열정에 들뜬 청년"으로 여겼다. 노백린은 칼과 총을 자신에게 맡기고 나중에 찾아가라고 이재명을 설득했다. 망설이다가 무기를 내준 이재명은 다시 두 사람을 찾아와 반환을 요구했지만 돌려받지 못했다.

얼마 후 이재명 의거 소식이 들려왔다. 김구는 백범일지에 이렇게 썼다. "이 의사가 단총을 사용하였다면 국적 이완용의 목숨을 확실히 끊었을 것인데, 눈먼 우리가 간섭하여 무기를 빼앗는 바람에 충분한 성공을 못한 것이다. 한탄과 후회가 그치지 않았다."

김구 증언만 놓고 보면 이재명은 총이 없어 칼을 사용한 것처럼 비친다. 그런데 이 사건 판결문에는 이재명이 거사 당일 단총 한 정, 단도 한 자루를 휴대했다고 나온다. 또 공판에서 일본인 재판장이 그때 권총을 가지고 있었느냐고 묻자 이재명은 그렇다고 답했다.

그렇다면 왜 총을 사용하지 않은 것일까.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근접 거리에서는 칼이 총보다 더 확실한 처단 수단이라고 여긴 것인지, 총에 문제가 생겨 사용할 수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인지 판단할 근거 자료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살해된 인력거꾼 박원문과 관련된 의문점과 논란이다. 공판에서 일본인 검사는 이재명이 명예욕에 사로잡혀 이완용을 해치려 했으며 박원문을 고의로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사건의 정치적 의미를 축소하고 이재명을 흉악범으로 몰아가려는 전략이었다. 이재명은 이완용 처단의 정당성을 설파하고 박원문 살해는 고의가 아니었다고 반박했다.

2000년대 들어 학계에서 박원문과 관련해 두 주장이 제기됐다. 하나는 이완용 공격이 정당화될 수 있다 해도 박원문이 죽은 것이 정의인가 하는 물음이다. 물음의 전제는 박원문이 매국노를 인력거에 태운 것 이외에 별다른 죄를 저지르지 않은 백성이라는 점이다.

일부 연구자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박원문을 문제시했다. 박원문이 무고한 일반 백성이 아니라 이완용의 경호원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다. 그 바탕에는 이완용 집안에 고용되지 않은 단순 인력거꾼이었다면 목숨을 걸고 이재명을 막으려 했겠는가 하는 의문이 놓여 있다.

박원문과 관련해 확인된 사항 중 하나는 이완용 아들이 사건 직후 박원문 모친에게 집을 마련해주고 옷과 먹을거리를 지급했다는 것이다. 사건 이틀 후 황성신문은 박원문이 본래 이완용 사위의 인력거꾼이었는데 신체가 건장해 이완용의 인력거를 끌게 됐다고 보도했다.

풀리지 않은 의문점을 밝히는 것과 별개로 이 사건과 관련된 이런저런 글을 읽을 때 유의할 점이 있다. 기본적인 사실 관계가 다르게 서술된 경우가 꽤 있기 때문에 주의해서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에 따르면 이재명 의거일은 1909년 12월 22일, 순국일은 1910년 9월 30일, 출생연도는 1887년, 출신지는 평양이다. 이와 달리 의거일은 1909년 12월 23일, 순국일은 1910년 9월 13일, 출생연도는 1890년, 출신지는 평안북도 선천으로 서술한 글도 여럿 있다. 이 글에서는 공훈전자사료관을 기준으로 정리했다.

△주요 참조=김태웅 책(『그들의 대한제국 1897~1910』, 휴머니스트, 2024), 박노자 글(「'정당한 폭력'은 정당한가」, 『한겨레21』 655, 2007), 이재명 사건 판결문

 

KPI뉴스 /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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