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깨어난 오방색…'박생광의 붓끝에서 최정화의 거리로'

제이슨 임 아트전문기자

Jasonyim@kpinews.kr | 2025-07-18 15:30:36

진채로 되살린 전통, 박생광 색으로 남긴 역사와 민족의 서사
시대의 감각과 사유로 재배열한 '이응노·이왈종·최정화'
과거 현재 잇는 국립현대미술관·진주시립이성자미술관 한국채색화 전

미술 작품에서 색은 감정을 표현하는 최고의 수단이자 본질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 미술에 나타나는 오방은 색 이상이다. 오방색은 사실 몽골에선 '하다(Hadag)', 티베트·인도·네팔에선 '룽타(Lung-ta)', 일본에선 '고쇼쿠(五色)'라는 이름으로 아시아에 두루 걸쳐 나타난다.

하지만 우리의 오방은 단연 으뜸이고 강렬하다. 음향오행에 근거한 '청靑·백白·적赤·흑黑·황黃' 등 다섯 오방색은 오랫동안 우리 궁궐의 단청이나 전통 복식, 왕실 의례나 민간 무속 의식에 반드시 등장했다. 아시아 각국이 오방을 따랐지만 그 정수는 한반도에서 꽃을 피웠다. 그런 점에서 한국 근현대 채색화의 거장으로 불리는 고 박생광(朴生光, 1904~1985) 화백의 작품들은 한국미술사에 큰 의미다.
 

▲ 내고 박생광, 힌두사II, 1983, 종이에 수묵채색, 137x136cm

 

그는 삶의 끝에 다다를 때 오방색을 전면에 내세웠다. 샤머니즘, 불교, 민화, 역사 서사 등을 오방색으로 구현했다. 애초 젊은 시절 일본 교토에 유학해 '신일본화'를 전공한 그이지만 1977년부터 돌연 '오방색'의 격정적인 색채를 캔버스에 담기 시작했다. 그의 당시 화풍은 전통 채색기법 위에 현대적 구성을 입혔다. 당시의 외래 모더니즘이나 수묵 위주의 주류 미술과는 다른 길이었다. 그가 왜 인생 말기에 변덕을 부렸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작고하던 해 7월에 남긴 메모(오도송·悟道頌)의 "역사를 떠나고 전통을 떠난 민족은 없다"라는 짧고 굵직한 언어와 '옛것 그대로'라는 뜻을 지닌 그의 호 '내고(乃古)'에 당시 그의 생각을 짐작할 따름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작품 해설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미술 자료에 따르면 박생광의 화업은 대체로 네 시기로 구분된다. 1950년대 중반까지는 '수련기', 1974년까지는 모더니즘적 실험을 드러낸 '추상기', 장식과 재현이 강화된 '구상 회귀기' 등이다. 특히 마지막 시기인 1977년부터 사망 직전까지는 8년은 역사와 전통, 신앙이 응축돼 안료의 농도를 짙게 써서 진하고 선명한 색감을 표현한 그의 진채 작업이 정점을 이룬 '완성기'다. 그 가운데 동학농민운동을 장대한 구도 속에 담아낸 민족사 서사인 대표작 '전봉준, 1985'은 큰 감동을 준다. 특이한 점은 작가 자신을 포함한 여러 인물이 캔버스에 담겼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무당, 토함산 해돋이 등은 그가 강렬한 오방색으로 풀어낸 수작들이다.

▲ 박생광, '무속 3', 1980. [국립현대미술관]

 

박생광의 미술은 단지 전통 오방색을 차용한 것으로만 평가할 순 없다. 당시 수묵 일변도의 화단에서 외면받던 채색화의 전통을 되살렸다는 점은 한국 미술사의 중요한 기록이다. 오늘날 한국 화단에서 '색채 회화'의 정체성을 되묻게 하는 중요한 기준점을 만든 셈이다.

물론 박생광 말고도 오방색의 기풍이 묻어나는 작가는 여럿 있다. 이응노(1904–1989)는 문자 추상과 군상 시리즈에서 오방색 계열을 단순하고도 철학적으로 배치했다. 그의 색채는 불교·유교·도교의 사유를 바탕으로 한 동양적 형상성과 공간의 에너지 흐름을 표현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응노의 작업에서 오방색은 인간 군상의 존재론적 움직임과 우주적 질서의 암시로 기능한다. 이왈종(1952~)도 빼놓을 수 없다. 제주 일상의 자연을 주제로 한 작업에서 오방색 구조를 도입했다. 그의 화면에서는 붉은색, 노란색, 푸른색 등은 강한 장식과 상징을 띤다. 전통 색채를 현대적 감각으로 해석하는 회화적 실험인 셈이다.

오방색은 최정화(1961~) 작가에 이르러 캔버스 밖으로 뛰쳐나와 극적 변신을 꾀한다. 최 작가는 플라스틱, 천, 조화 등 일상 소재를 활용한 작품에 오방색을 적극적으로 개입시킨다. 대표작 '염원의 탑'은 오방색을 한국인의 집단 무의식과 희망의 상징으로 제시하며 "색은 언어보다 선명한 문화의 DNA"라는 작가 철학을 대변한다. 박생광이 부여잡았던 오방색은 여러 면에서 한국 작가들의 화두였음은 분명하다. 박생광이 그것을 회화의 정신성과 민족 정체성으로 응집했다면 현시대 최정화 작가는 그것을 소비문화 속 대중성과 결합해 새로운 미적 차원을 창출했다. 색을 철학적 언어로 삼는 작가들의 이런 실험은 한국 현대미술에서 오방색이 여전히 살아 있는 사유의 원천임을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이제 오방색은 더는 '민족성'의 기호나 민속의 상징에 머무르지 않고 있다. 동시대의 감각, 매체, 기술 속에서 재배치되고 있다. 전통은 복제되는 것이 아니라 해석을 통해 다시 살아난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최근 미술계에서 오방색의 쓰임은 '우리의 것은 좋은 것'이란 기존의 일차원적인 한계를 훌쩍 뛰어넘고 있다.

색면의 중첩을 통해 감정의 깊이를 탐구한 마크 로스코, 단색(클랭 블루)을 통해 형이상학적 절대성을 추구한 이브 클랭, 색 자체를 조형 요소로 삼아 자유를 갈망한 앙리 마티스 등 서양 현대미술에 등장해 온 오방색도 간과할 순 없다. 하지만 이들의 오방색은 본질적인 출발에서 사뭇 다르다. 애초 우리 미술에 등장하는 오방색은 음향오행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 공동체적 세계관, 우주와 인간의 관계, 자연의 질서 등 '나보다는 우리'라는 개념이 앞선 철학적 기조를 품는다면 서양미술에 등장한 이들 색은 개인적 감정이나 추상적 개념을 표현하기 위한 단순한 수단에 불과하다. 

 

▲ 최정화 '꽃 숲, 2016~2018' [국립현대미술관]

 

뮤지션이 아니라도 한국인이면 입으로 자연스레 '트로트 스케일'을 흥얼거리는 것처럼 '오방색'은 본질적 측면에서 트로트 스케일처럼 우리의 대뇌에 집단의식처럼 독특한 의미로 자리 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향후 오방색의 전승과 발전은 서양 색채의 변화 과정과 사뭇 다른 양상을 보일 터다.

박생광을 비롯한 한국의 색채를 탐닉할 수 있는 여러 전시가 열리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2013년 개관한 이래 첫 상설전으로 '한국현대미술 하이라이트'를 열고 있다. 전시 제목대로 196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한국 현대미술사'의 흐름을 대표하는 작품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국립현대미술관은 1969년 개관 이래 축적해 온 소장품 1만1800여 점 중 90점만을 엄선했다고 한다. 그 가운데 1전시실에선 박생광의 채색화와 이응노의 드로잉을 만날 수 있다.

진주시립이성자미술관과 철도문화공간 복합문화공간에서 열리는 '한국 채색화의 흐름 Ⅲ : 진주;색(色), 색(色)을 입다(~2025년 8월31일)'도 한국 채색화의 변화 과정과 박생광의 작품을 직접 볼 절호의 기회다. 세 번째로 열리는 이번 전시는 한국 채색화 기획 시리즈의 완결편이라 할 수 있다. 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이원복과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정준모가 예술감독을 맡아 학술적 완성도를 높였다는 후문이다. 전시 공간은 두 곳으로 나뉘어 진행된다.

박생광의 오방색은 여전히 한국미술에 흐르고 있다.

 

KPI뉴스 / 제이슨 임 아트전문기자 Jasonyim@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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