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훈 장인 구속부터 꼬리곰탕 논란까지…특검의 현대사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 2025-06-20 15:27:49

[김덕련의 역사산책 20] 특검 26년
특검 도입 계기, 조폐공사 파업 유도 발언 파문
도입 전엔 공소 유지 담당 변호사가 유사한 역할
검찰 수사 축소·은폐 의혹 때 특검 요구 목소리
특검제 시행 끝까지 막은 정부는 尹 정부가 유일

김대중 정부 출범 이듬해인 1999년 6월 7일 오후 진형구 대검 공안부장은 기자들과 만났다. 대전고검장 영전이 결정된 가운데 폭탄주를 곁들인 점심 회식을 한 후였다.

뒷날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의 장인이 되는 진 부장은 당시 "(1년 전) 조폐공사 파업은 사실 우리가 만든 거야" 등의 폭탄 발언을 쏟아냈다. 검찰이 공기업 구조 조정의 전범으로 삼기 위해 노조 파업을 유도했다는 자랑 섞인 고백이었다. 

 

▲ 조폐공사 파업 유도 발언 파문을 보도한 조선일보 1999년 6월 9일 자 4면.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화면 갈무리]

 

엄청난 후폭풍이 일었다. 수사 대상으로 전락한 진 부장은 결국 구속됐다. 또 그해 9월 '조폐공사 파업 유도 사건' 및 직전 검찰총장 부인과 관련된 '옷 로비 의혹 사건' 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검사제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헌정사상 최초의 특검제는 그렇게 도입됐다.

이전에 특검과 유사한 사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공소 유지 담당 변호사를 여러 언론에서 "사실상 특별검사", "특별검사 격"이라고 지칭했다. 검찰이 불기소한 사건에 대한 재정 신청을 법원이 받아들였을 때 열리는 재판에서 검사를 대신해 공소를 유지하는 역할을 변호사가 했기 때문이다. 

대표적 사건이 1986년 발생한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다. 검찰은 인면수심의 가해자 문귀동 경장을 엄벌하기는커녕 기소 유예 처분을 내렸다. 피해자 측 변호사들은 재정 신청을 했다. 대법원은 6월항쟁 이듬해인 1988년 2월 재정 신청을 받아들였다.

훗날 노무현 정부에서 국가인권위원장을 맡는 조영황 변호사가 공소 유지 담당 변호사로 임명됐다. 조 변호사는 검찰 기록 조사를 통해 사건 당시 검찰이 성고문 진상을 밝혀내고도 수사 내용을 대부분 숨긴 채 시나리오에 따라 기소 유예 처분을 내렸음을 확인했다. 은폐·조작 의혹이 사실로 확인되면서 문귀동은 1989년 징역 5년의 실형을 받게 된다.

이렇게 특검을 연상케 하는 활동이 있긴 했으나 공소 유지 담당 변호사는 정식 특검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래서 검찰의 권력형 비리 수사 축소·은폐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시민사회와 야권에서 특검제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특검제 도입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한 계기로 노태우 정부 초기인 1988년 말부터 1989년 초까지 진행된 검찰의 5공 비리 수사가 거론된다. 이때 검찰총장은 '검찰 공화국' 구축의 주역으로 꼽히는 김기춘이었다.

검찰 수사는 전두환 정권 실세 일부를 구속했지만 비리의 핵심을 파헤치지 못하고 변죽만 울렸다는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검찰이 전두환과 정치 자금 문제를 수사 대상에서 제외하면서 예견된 결과였다. 야권 3당은 특검제 도입을 시도했지만 입법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특검제 요구는 김영삼 정부 시기인 1995년 7월 검찰이 5·18 관련 고소·고발 사건 피의자들에 대해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려 면죄부를 줬을 때에도 거세게 분출했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검찰의 궤변은 시민사회의 5·18특별법 제정 및 특검제 요구에 불을 붙였다.

시위대가 연일 거리를 메우고 규탄 성명이 이어졌다. 새정치국민회의를 축으로 한 야권도 여권을 압박했다. '심판은 역사에 맡기자'던 김영삼 정부와 여당인 민주자유당은 결국 11월 태도를 바꿔 특별법 제정 요구를 수용했다. 하지만 특검제는 끝까지 거부했다.

이때까지는 국민회의가 특검제를 요구하고 민자당이 검찰과 한편이 돼 필사적으로 막았다. 그런데 파업 유도 발언 파문이 터진 1999년에는 구도가 180도 바뀌었다. 여당이 된 국민회의는 특검제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인 반면 야당으로 바뀐 민자당의 후신 한나라당은 특검제 전면 도입을 주장했다. 양측 모두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말을 바꾼 것이다.

검찰 출신 의원들은 여야를 떠나 대체로 특검에 부정적이었다. 한나라당 김기춘 의원은 자당 의원들에게 "우리가 언제까지 야당만 하겠는가"라며 "우리가 집권하면 특검제라는 괴물은 우리에게도 불편한 것"이라고 으름장을 놨다. 그로부터 18년 후인 2017년 김기춘은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 특검에 의해 구속된다.

1999년 도입 후 26년 동안 특검제 시행을 끝까지 막은 정부는 윤석열 정부가 유일하다. 윤 전 대통령은 자신 및 부인과 관련된 의혹을 밝히기 위한 특검법을 재의요구권(거부권)으로 거듭 막았다.

열 번 넘게 실시된 역대 특검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2016, 2017년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 특검, 2001년 '이용호 게이트' 특검이 주요 성공 사례로 꼽힌다.

전자는 최 씨 등의 국정 농단 의혹을 상당 부분 규명하고 박근혜 전 대통령을 비롯한 유력 인사를 다수 구속하며 많은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 후자는 이용호 G&G그룹 회장의 횡령 및 주가 조작 혐의와 정·관계 로비 의혹을 수사해 김대중 대통령 주변 인사를 줄줄이 구속했다.

이와 달리 2007, 2008년 삼성 특검과 '이명박 후보 범죄 혐의 규명 특검'(세칭 BBK 특검) 등은 특검 무용론을 불러일으킨 주요 사례로 언급된다.

삼성 특검은 이건희 회장이 4조5000억 원 규모의 차명 자산을 보유하면서 1128억 원의 세금을 포탈한 사실을 확인하고도 10명 불구속 기소에 그쳐 '삼성 봐주기'라는 비판을 받았다.

BBK 특검은 BBK 실소유주 논란, 다스 및 도곡동 땅 차명 보유 등 이 전 대통령 관련 의혹을 모두 무혐의 처리했다. 이 전 대통령과 꼬리곰탕을 함께 먹으며 조사한 후 그렇게 처분해 세간에서 '꼬리곰탕 특검'으로 불렸다.

 

KPI뉴스 /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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