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당신을 사랑한 숙생의 제 업입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 2025-08-22 16:09:23
내면의 지하에서 올라와 외부와 내부를 들여다보며
불교적 깨달음과 성찰을 울음 같은 서정으로 그려내
"저에게는 시가 금강경이고 반야심경, 거룩한 치유"
가령, 동지섣달, 그 얼음 새벽, 목탁 치며 도량석(道場錫) 도는 어린 여승을 보며 그녀는 숙세에 무슨 업을 크게 지어 잠도 못 자고 이 찬 겨울 신새벽에 깨어나 얼음 하늘 깨부수고 있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저는, 대답하겠습니다// 제 업입니다 제 업입니다 당신을 사랑한 숙생의 제 업입니다 _ '얼음 만다라' 부분
이전에 유숙했던 어느 생에서 당신을 사랑했던 업, 그 업을 풀지 못해 이 생에서도 얼음 새벽에 목탁을 치며 절 마당을 도는 비구니. 그녀에게 투사한 시인의 마음은 애닯고 서럽다. 숙생의 업을 끊기 위해 동지섣달 추녀 끝에 매달린 고드름으로 동반하며 만다라의 길을 간다.
승려 시인 승한(속명 이진영)이 새 시집 '응시와 가장 가까운 곳'(몰개)에서 토로하는 숙생의 정한이다. 일찍이 신춘문예 시와 동시로 화려하게 문단에 나온 그가 자신의 깊은 내부를 들여다본 이전 시집 '그리운 173' 이후 4년 만에 펴내는 시집이다. 직전 시집은 그가 깊은 우울증으로 정신병원 폐쇄병동을 드나들면서 그곳 사람들과 자신을 관찰하고 기록한 것으로, '지하 13층 내부의 내부'로 내려가 성찰한 시들을 수록했다. 이번 시집은 다시 외부로 올라와 내부를 들여다보는 맥락이다.
누구를 막론하고 외부와 내부의 교류는 늘 평탄할 수는 없는 숙명의 갈등 관계일 터이다. 더욱이 '청소년기부터 앓아왔던 정신적 고통과 내면의 상처'가 깊었던 그가 쉰 살에 출가해 태고종 승려로 살아온 삶을 감안하면 외부와 내부의 격렬한 교류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지난 시집이 '고성(高聲)으로 몰아쳐 가며 읽는 불경(佛經)'이라고 언급되는 맥락이다. 이번 시집은 외부와 내부의 같고 다른, 이른바 '진공묘유(眞空妙有)'의 깨달음이 축을 이룬다.
짐작하자면, 허공은 텅 비어 있다고 생각했다 입체가 아니라 생각했다 무생물이라 생각했다 무정물이라 생각했다 지구의 외피라 생각했다 서쪽에서 딱따구리 한 마리가 날아와 상수리나무를 딱딱 쫄 땐 허공도 아팠을 것이라 생각했다 뭉게구름이 오기 전까진 무채색이라 생각했다 천둥 번개가 치기 전까진 평면이라 생각했다 아무나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눈도 없고 귀도 없고 코도 없고 입도 없는 무위(無爲)라 생각했다 _ '허공' 부분
허공, 아무것도 없다고 여긴 그 공(空)의 세계를 "꽃을 보고 알았다 허공의 문양을 벼락을 보고 알았다 허공의 법도(法道)를 비를 보고 알았다 허공의 연못을 새떼를 보고 알았다 허공의 날개를 흰 눈을 보고 알았다 허공의 두께를 폭풍을 보고 알았다 허공의 안쪽을 햇빛을 보고 알았다 허공의 높이와 넓이를 구름을 보고 알았다"고 쓴다. 참된 공에서 묘한 있음이 드러나는 오묘한 깨달음이다.
-내면의 지하에서 햇볕 양양한 지상으로 올라왔다고 썼다.
"나의 외부가 내부이고 내부가 외부라는,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공과 색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체험했다. 꼭 불교적인 것만은 아니고 외부에서 내부를 바라보는 생각들, 나 자신을 탐구하는 그런 시들이다."
-새벽 절집 '숙생의 업'이 서럽다.
"사실 제 이야기를 쓴 것이다. 행자 생활을 하면서 새벽마다 도량석을 돌았는데, 겨울 비구니 스님에 저를 투사한 것이다. 숙생이란, 아주 거역할 수 없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지난 생을 일컫는데 전생의 개념과 같으면서도 약간 다르다.'
단순히 전생이라는 개념보다 머무를 '숙(宿)'자를 쓰는 '숙생'은 그 울림이 다르다. 이 생도 긴 여행길에 잠시 들렀다 가는 곳이라는 각성을 주기에 족하다. 숙생의 업이 매개하는 시인의 사랑과 상처에 대한 성찰은 울림이 깊다.
하늘의 상처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측량하기도 전에 연하지벽(煙霞之癖)이라는 서쪽의 노을은 선홍의 피를 계속 흘리고 피의 윤곽을 한 번도 제대로 본 적 없는 나는 서쪽 노을이라는 거울을 볼 때마다 너의 상처가 어디서부터 어디일까를 다시금 측량하고 그게 궁금해서 나는 또다시 서쪽 노을이라는 거울의 연하지벽을 만나 독거로 사랑놀이를 하고 제대로 된 사랑을 시작하기도 전에 저녁 시궁창 속으로 가라앉은 서쪽 노을이라는 거울의 상처가 침몰선처럼 지금 어느 해저에 가라앉아 있는가를 측량하다가 끝내 그 상처의 너비와 깊이를 알지 못한 채 밤 속으로 익사하는 것이었다 _ '서쪽 노을이라는 거울 앞에서' 부분
-서쪽 노을 같은 상처, 헤아릴 길 없다.
"노을을 보기는 하지만 그 크기와 넓이가 얼마인지 보지는 못한다. 그 색깔이 피를 상징할 수도, 다르게 보면 상처일 수도 있다. 제 마음 속에도 잴 수 없는 그런 상처가 있다. 노을을 거울처럼 보면서 내면을 돌아보았다. 사람은 내면에 어떤 상처를 지니고 산다.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원죄의식인데, 누구나 태어나면서 살아갈수록 이렇게 상처를 입기 마련이다. 내면을 돌아보면서 거울을 보듯이 살아가 보자는 의도로 썼다."
수행자도 외로움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는 '독거(獨居)'란 '슬퍼도 슬퍼도/ 절대로 울지 않는 선인장이 되겠다는 것'이라고 썼는데, 정작 '울음'이야말로 부처의 길로 가는 '참'이라고 설파한다. 울지 않으려고 다짐하는 것 또한 수행이고, 터지는 울음으로 자신을 정화해나가는 과정 역시 '능인(能人)'으로 가는 길이라는 생각이다.
울음은 흉터다/ 울음은 노을이다/ 울음은 꽃이다/ 울음은 노래다/ 울음은 하모니카다/ 울음은 기차다/ 울음은 다이아몬드다/ 울음은 악보다/ 울음은 파도다/ 울음은 고래다/ 울음은 탱자다/ 울음은 산호초다/ 울음은 찹쌀이다/ 울음은 공양이다/ 그래서 그래서 울음은 울음은/ 참이다/ 능인(能人)이다/ 능인이다 _ '울음' 전문
-가끔 우시는가.
"많이 운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가도 울고 예불을 드리다가도 운 적 있다. 새벽에 대웅전에 혼자 앉아 종을 치면서 염송을 하는 종송(鐘頌)을 하다가, 종소리가 나의 내력을 쭉 들려주는 것 같아 눈물이 너무 나와서 중간에 들어온 적도 있다. 울음은 거짓말을 못 한다. 울음은 그냥 꺼이꺼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노래일 수 있다. 실컷 울고 나면서 슬픔이 사라지기도 하고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도 있다. 울음은 공양이다."
'허공의 법도'에 이르는 과정에는 눈 밝은 관찰과 성찰이 매개되는 시인의 태도와 감성이 기여하는 바가 크다. 이번 시집의 표제 '응시와 가장 가까운 곳'은 '제비꽃'의 한 구절에서 가져왔다. 그는 겨우내 '당신이라는 쪽문을 열기 위해' 헤맸는데 '눈썹과 가장 가까운 곳에/ 속삭임과 가장 가까운 곳에/ 응시와 가장 가까운 곳에/ 당신은 눈을 뜨고 있었'다고 썼다. 숲에 '비가 내리는 동안'에는 '빗방울이 나뭇잎을 토닥이는 동안 나뭇잎이 연주하는 트럼펫 소리를 귀고리처럼 귓불에 걸고' 숲이라는 서책(書冊)을 펼치기도 한다.
-수행자에게 시는 무엇인가.
"종교를 떠나서 잘 쓰든 못 쓰든 시 한 편을 썼을 때 제일 행복하고, 우울증에서 벗어나 제가 존재할 수 있게 한다. 저에게 시는 치유 방법이고 행복으로 가는 하나의 길이다. 승려이기에 앞서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저를 더 믿고 소중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거룩한 약이다. 조금 불손한 이야기인지 모르겠으나 저에게는 시가 금강경이고 반야심경이다."
그는 신춘문예(2007 조선일보)에 당선된 후 손을 놓았던 동시도 묶어낼 예정이다. 벽을 만나면 벽이 되고, 쓰레기를 만나면 쓰레기를 먹고, 모든 대상을 품어 안으면서 '푸른 심장'을 달아주는 '담쟁이넝쿨의 생존법'에도 눈길이 간다. 서러웠던 사랑은 이제 흰 소의 수레를 끌고 간다.
골목골목, 이렇게 흰 눈 가득 쌓이는 날이면, 이월,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 그날 보았던, 당신의 큰 눈동자가 생각납니다 그날, 당신은 큰 눈동자 가득 대설(大雪)을 담고 있었지요 …먼 세월 지나도록 당신은 아무 말씀 없으셨지요 고사(古寺)처럼 적막했지요 나는 날마다 법당에 올라 기도했지요 우리 첫사랑 이루어지길, 우리 대설 녹지 않기를 _ '흰 소가 끄는 수레' 부분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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