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적 금융③] 모험하지 않는 모험자본…원금 집착이 키운 '안전한 실패'

안재성 기자

seilen78@kpinews.kr | 2026-01-06 12:00:40

원금 회수에 집착…'안전한 투자처'만 찾아
"정부부터 변화 필요…실리콘밸리서 배워야"
"CVC 규제 완화해 기업에 펀드 GP 허용해야"

모험자본은 모험을 해야 한다. 안정적인 투자를 하고 싶으면 국채를 사면 된다. '하이리스크-하이리턴'을 노리니까 모험자본인 것이다.

 

그런데 국내 모험자본은 모험을 꺼리고 원금 회수에 집착했다. "모험자본답지 않다", "벤처 투자가 아닌 대출 같다" 등의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작년 벤처투자도 부진했다. 6일 벤처투자 조사기관 더브이씨에 따르면 지난해 초부터 12월 5일까지 벤처캐피탈(VC) 등 모험자본의 국내 스타트업·중소기업 대상 투자건수는 1057건으로 전년 동기(1600건) 대비 34.9% 급감했다. 투자금액도 6조3928억 원에서 6조481억 원으로 5.4% 줄었다.

 

이재명 대통령이 적극적인 모험자본 육성에 나서면서 투자재원은 풍부해질 전망이다. 우선 정부 주도로 150조 원 규모 국민성장펀드를 조성했다. 올해부터 5년간 매년 30조 원씩 자금을 공급할 예정이다. 주요 투자처는 인공지능(AI)·반도체·바이오·로봇 등이다. 정부는 국민성장펀드 1호 투자처로 국가 AI 컴퓨팅센터, 전남 해상풍력, 울산 전고체 배터리 소재 공장, 충북 전력반도체 공장, 평택 파운드리,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등 7건을 선정했다.

 

민간자본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정부는 국민참여형 국민성장펀드, 기업성장집합투자기구(BDC) 등 공모 정책펀드 투자자에게 이중 세제 혜택을 주는 안을 검토 중이다. 일정 한도의 납입금에 소득공제 또는 세액공제를 적용하고 펀드 배당소득에 5~9% 저율 분리과세를 적용하는 내용이다.

 

또 금융당국은 작년 하반기 증권사에 종합투자계좌(IMA) 인가를 대거 내줬다. IMA는 증권사가 고객 예탁금을 모아 모험자본 등 기업금융 자산에 투자하고 그 운용 실적에 따른 성과를 고객에게 돌려주는 원금 지급 의무형 실적배당 상품이다. IMA가 활성화될수록 자연스레 모험자본 공급도 늘어난다.

 

IMA 인가를 받은 국내 대형 5개 증권사(미래에셋·한국투자·신한투자·하나·키움증권)는 지난해 11월 향후 3년간 총 15조2184억 원의 모험자본을 추가 공급하겠다고 밝혔다. 작년 9월 말 기준 5개 증권사의 모험자본 투자 잔액이 5조1381억 원에 불과했는데 20조3565억 원으로 급증하는 것이다. 이 중 신규 직접투자액은 약 6조8000억 원, 간접투자액은 약 8조4000억 원이다.

 

IMA 인기는 꽤 좋아 기대감을 키우고 있다. 한국투자증권이 지난해 12월 18일 내놓은 국내 첫 IMA 상품에 23일까지 4영업일 간 총 1조590억 원의 자금이 유입됐다.

 

원금 집착하는, 대출 같은 투자

 

하지만 모험자본이 제 역할을 하려면 돈이 들어오는 것뿐만 아니라 원금 회수에 집착하는 관행도 개선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 벤처기업들은 국내 모험자본의 고질적인 문제점으로 원금 회수 집착을 꼽는다. [게티이미지뱅크]

 

한 정보기술(IT) 분야 벤처기업 최고경영자(CEO)는 "국내 벤처캐피탈(VC)의 행태는 투자라기보다 만기일시상환대출에 가깝다"고 꼬집었다. 벤처·스타트업 투자를 위해서라면서도 5년, 7년 등 일정한 만기를 정해서 펀드를 조성한 뒤 펀드 만기에 맞춰 원금 회수 압박을 가하는 행태를 비판한 것이다.

 

벤처업계 임직원들은 "긴 호흡으로 벤처·스타트업을 키우기보다 적당한 시기에 원금과 소정의 이익을 챙겨 나가는 것이 국내 모험자본의 목표인 듯하다"고 입을 모은다.

 

원금 회수를 주된 목표로 세우니 '진짜 모험'은 회피하고 상대적으로 '안전한 투자'에만 자금이 몰리는 현상이 생긴다. 한 VC 임원은 "작년에 유독 뷰티업체에 대한 투자가 늘었다"며 "미국 시장에서 K팝·K드라마 인기에 힘입어 뷰티업체들의 매출 성장세가 두드러진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돈이 되는 곳'만 골라서 투자를 한다는 뜻이다.

 

일각에서는 구조적인 문제점을 거론한다. 모험자본의 민간투자자들도 원금 손실을 싫어하지만 정책자금은 오히려 그 이상으로 민감하다고 한다. 한 VC 임원은 "정책자금에 손실이 나면 '국민 혈세'를 낭비했다며 당장 위탁운용사(GP)가 책임 추궁을 받는다"며 "자연히 GP는 실패하지 않을 투자처만을 찾게 된다"고 말했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부 태도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정책자금을 투자받은 벤처·스타트업에 이리저리 간섭하는 등 원금 회수에 집착하는 행태를 자주 보인다"며 "투자자가 아니라 채권자처럼 행동한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바람직한 모험자본의 예로 실리콘밸리를 들었다. 그는 "실리콘밸리 투자자들은 '열 곳 중 한두 곳만 성공하면 된다'는 마인드로 과감하게 투자하고 성과가 나올 때까지 최대 10년 이상도 진득하게 기다려준다"고 말했다. 이처럼 정책자금이 적극·과감하게 투자하는 동시에 인내심을 가져야 국내 모험자본의 본질적인 개선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제언이다.

 

정부는 이를 감안해 국민성장펀드와 별개로 향후 5년간 2조 원 규모 세컨더리 정책펀드를 조성하는 등 세컨더리펀드 활성화를 꾀하고 있다.

 

세컨더리펀드는 사모펀드(PEF)나 VC 등이 투자한 기업의 출자자 지분을 매입하는 펀드다. 이를 통해 초기 투자자는 무사히 원금을 회수할 수 있으며 벤처·스타트업은 장기 투자를 기대할 수 있다. 한 자산운용사 임원은 "현재 국내 모험자본의 회수 통로는 사실상 기업공개(IPO)뿐"이라며 "세컨더리펀드 활성화로 회수의 어려움이 덜어지면 더 과감한 투자가 가능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기업형 벤처캐피탈(CVC)에 금산분리 완화 등 획기적인 규제 개선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정부가 CVC의 외부 자금 조달 한도를 기존 40%에서 50%로 확대하는 등 규제를 완화하고 있으나 VC업계에선 "아직 갈 길이 멀다"고 평가한다.

 

산업계와 금융권이 가장 원하는 건 금산분리 규제를 풀어 기업이 펀드 GP 역할을 맡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진옥동 신한금융그룹 회장은 지난해 9월 국민성장펀드 국민보고대회에서 이 대통령에게 "기업이 CVC의 펀드 GP가 될 수 있도록 허용하면 은행도 모험자본 투자에 더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을 것"이라고 건의하기도 했다. 선구안이 있는 기업이 GP를 맡으면 은행도 믿고 투자하면서 벤처투자 생태계가 활성화될 거라는 얘기다.

 

강석구 대한상의 조사본부장은 "주식시장 열기가 벤처투자업계에는 아직 못 미치는 상태"라면서 "글로벌 첨단산업 경쟁에서 이기려면 금산분리, 상장요건 등 규제를 기업 및 투자 친화적으로 개선해 파이를 골고루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KPI뉴스 / 안재성 기자 seilen78@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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