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두 사람의 운명적 서사 담은 '시인 김수영과 아방가르드 여인'
박지은
pje@kpinews.kr | 2024-06-25 14:13:10
온몸으로만 시를 써야 한다고 외쳤던 외로운 자유주의자 시인 김수영. 그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 건 1968년 6월16일이다. 타계 56주기 즈음 그의 특별한 서사가 담긴 한 권의 책이 세상에 나왔다. '시인 김수영과 아방가르드 여인'이다. 이 책은 시인 사후 56년이 되도록 여전히 시인의 아내로 살아가고 있는 김현경 여사의 구술(口述)을 바탕으로 '김수영기념사업회' 홍기원 이사장이 재구성했다.
'시인 김수영과 아방가르드 여인'에는 한 여인을 향한 김수영의 처절하고도 맹목적인 사랑이 담겼다. 김수영과 김현경이 주고받았던 사랑과 그 서사는 일반 사람들의 통념, 가치관, 윤리의식 등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심지어 상상력으로도 두 사람의 위험한 선택과 그 언어를 떠올리기 쉽지 않다. 두 사람의 동행에는 늘 삶과 죽음의 경계를 수시로 넘나들었던 시대의 아픔이 따라다녔다. 그들의 첫 만남은 부잣집 딸 16세 문학소녀가 행색이 남루하기 짝이 없는 22살의 시인 나부랭이 지망생을 우연히 만난 1942년 5월이다.
이후 편지를 주고받으며 문학을 교류했지만, 김수영은 소녀에게 있어 그저 시를 잘 쓰는 아저씨일 뿐이었다.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맞이한 해방정국, 이화여대생이 된 소녀는 꿈에서 그리던 '백마 탄 왕자' 같은 청년과 짧은 연애를 하지만 총격사건 스캔들에 휩싸이며 어둠에 갇히고 만다. 이때 김수영은 그 소녀에게 "문학 하자!"라고 위로했고, 그 소리는 한줄기 구원의 빛이 되어 두 사람은 마침내 연인이 된다.
무모할 정도의 동거 생활이 잠시 이어졌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만신창이가 된 김현경은 "이제 다시 이별을 하는구나!"라며 절망했지만 두 사람은 운명처럼 다시 만났다. 바이런의 시 'My soul is dark' 프로포즈 앞에 김현경은 모든 것을 버리고 가난한 시인의 아내가 되었다. 그들은 마음이 향하는 곳으로만 의지를 발동했고 모든 편견과 타자의 시선에 개의치 않았다. 절대 자유, 절대 사랑을 향한 '발칙한' 발걸음에만 시선을 고정시켰다. 두 사람은 '허락되지 않는 사랑'을 깬 시대의 전위였다.
하지만 두 사람이 겪어야 했던 시대는 혹독했다. 첫 아이 임신 때 전쟁이 터졌고, 김수영은 어느 날 갑자기 의용군으로 끌려갔다. 몇 차례나 죽을 위기에 처하고 매일 토막 난 시체가 나뒹구는 포로수용소 생활을 간신히 이겨내며 기적처럼 생환했지만, 2년 3개월 야만의 시대를 감내했던 김수영의 상처를 보듬어 줄 아내 김현경은 없었다. 다른 남자와 살고 있었던 것이다. 가공할 국가폭력의 트라우마를 감당할 수 없었던 시인 김수영은 밤마다 술에 취해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긴 기다림이 필요했고 그것은 짙은 그리움이었다. 오직 한 사람에게로만 향하던 그들의 시선은 결국 재결합을 만들어냈다. 2년 6개월의 이별 뒤, 두 사람이 만나 다시 부부가 되는 데에는 "가자!"라는 김수영의 한 마디가 필요했을 뿐이다.
저자는 특히 구수동 시절을 주목했다. 시인 김수영을 있게 한 안식처였기 때문이다. "창작의 자유는 100퍼센트의 언론자유 없이는 도저히 되지 않는다. 창작에 있어서는 1퍼센트가 결한 언론자유는 언론자유가 없다는 말과 마찬가지다."라고 외쳤던 불굴의 시인, 어두운 시대에 앞장선 저항시인의 아이콘으로 성장하게 했던 곳이 바로 구수동이다. 늘 새로운 시를 쓰기 위해 몸부림치고 술에 취한 밤이면 야만의 시간에 겪었던 전쟁의 상처를 단말마의 울부짖음으로 토해냈던 시인 김수영의 일상에 그나마 온기가 채워졌던 시기였다.
▲ '시인 김수영과 아방가르드 여인'을 펼쳐보는 김현경 여사. 저자 홍기원의 사인 날짜(2024년 6월 20일)는 김 여사의 97번째 생일이기도 하다. "김 여사는 '아방가르드 여인이라는 표현에 만족한다'고 하셨다"고, 저자는 말했다. [저자 제공]
그는 아내와 함께 양계를 하면서 난생처음 노동의 땀을 흘렸고 한강이 내려다보는 언덕에서 빨래하고 돌아오는 아내를 기다렸다. 어느덧 광기 어린 주사(酒邪)는 잦아들었고 국가폭력의 트라우마가 조금씩 치유되었다. 그렇게 김수영 문학의 정화가 꽃피우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영원한 아웃사이드' 시인에게 허락된 그 시간은 많지 않았다. 가혹한 운명 탓이었을까. 그의 대표작 <풀>을 발표한 지 17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아내 김현경은 "이제 살 만하니 떠났다"라며 그때의 상실을 얘기한다.
저자는 이렇게 얘기한다. "엄청난 국가폭력에 시달리면서도 굴하지 않고 일어나 '절대 자유'를 향해 쉼 없이 나아갔던 시인의 삶이 무척이나 궁금했고, 그 힘이 어디서 생겨났는지를 살피고 싶었다. 또한 시인 김수영과 그의 작품에 대한 문학적 평가와 찬사는 넘치도록 많지만, 그의 내밀한 삶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시인의 고단한 삶을 버티게 했던 생명력의 근원을 찾고자 노력했다. 그러면서 열정의 사랑 없이는 위대한 시인이 탄생할 수 없다는 믿음을 드러내며, 그 믿음이 이 책의 출발점이라 말한다, 즉, 재결합 이후 교통사고로 사망하기까지 구수동에서의 13년 동안 온갖 주사를 다 받아주었던 아내 김현경의 헌신과 사랑 없이는 김수영 문학을 얘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KPI뉴스 / 박지은 기자 pje@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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