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제 살 속에 낸 길에 섬진강을 안고 흐르듯"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 2025-05-09 14:18:34

섬진강 유역 여섯 시인 자선대표작 모음 '섬진강 시인들'
백학기 박두규 복효근 장진희 박남준 이원규, 강물 삶
거칠고 지친 시절 상처를 위무하고 성찰케 하는 명편들
"오늘도 내 시가 저 하류 모래벌 이르러 날아오르기를"

툇마루에 앉아 강물을 바라본다. 의심도 없이 그대를 좇아온 세월은 아직도 강물을 거슬러 오르고 있다. 그대의 환영을 노래한 시들도 은어의 무리처럼 거침없이 따라 오른다. 이승의 시간이 다하기 전, 그대를 한번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이 생각만이 아직도 늙지 않았다. 나는 이미 강의 하류에 이르렀건만 지금도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이 허튼 생각만이 남아 가여운 나를 위로한다. _ 박두규, '가여운 나를 위로하다'
 

▲ 섬진강 유역 여섯 시인들이 매향과 물빛이 스며든 시들을 한 권 시집으로 묶어냈다. 영원한 아날로그인 시인들 이미지를 디지털 인공지능이 합성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강 곁에 살다가 어느새 강물이 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뿐이랴, 삶 자체가 강물이어서 지금까지 흘러왔고 흘러서 바다에 닿고 말 것이라는 데. 중상류 어디쯤 꽃밭 사이를 흘러왔거나 그 강물을 마시던 노루와 입 맞추던 기억에 붙들려 그리워한들, 속절없다. 바다에 닿기 전 그대를 한번 만날 수 있기를 여전히 바라지만 거슬러 흐른다는 건 허튼 생각이다.

섬진강 유역 시인 여섯 명이 자선 대표작을 모아 '섬진강 시인들'(앰엔북스)을 펴냈다. 백학기(순창), 복효근(남원), 장진희(곡성), 박두규(구례), 박남준(하동), 이원규(광양) 시인이 그들이다. 지난해 전남 곡성 섬진강동화정원 시 낭독 퍼포먼스에 참여했던 일을 계기로 의기투합한 결실이다. 섬진강 인근에 사는 이들의 시에는 공통으로 강의 기운이 스며들었다. 이들이 그동안 써 온 시편들 중에서 10편씩 골라 수록한 시집에는 '여섯 갈래 시의 물결'이 지친 삶을 위무하며 흘러간다.

구례에서 살고 있는 박두규 시인은 '나는 스스로 강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면서 '나는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이승의 세월을 흘러야 하는 물줄기라는 것을, 나는 이미 강이었고 기필코 바다에 닿아야 한다는 것을'이라고 썼다. 그는 "우리는 늘 어떤 정신적 편향을 가지고 대부분 살고 있는데 시를 쓰는 과정이 균형감을 되찾게 한다"면서 "시를 써 온 것이 너무 고맙다"고, 이번 시집 시인들과 함께 상경해 참여한 인사동 북토크 자리에서 말했다.

섬진강 지류인 전남 곡성 보성강변에 살고 있는 장진희 시인은 오일장을 떠돌면서 진도에서 떼어온 미역을 파는 '미역장시'인데, 이번 시집을 장터 좌판에 미역 꼬투리와 함께 내놓고 판다. 곡성에서 구례 장에 가려면 압록에서 섬진강 본류에 합류하는 보성강변을 걸어야 하는데, 그 길은 절로 시가 나올 수밖에 없는 풍경이라고 했다. 장 시인은 "개발이 안 된 순정한 자연이 그리울 때가 많은데 이런 길을 만나면 옛 사람들은 시가 저절로 나왔겠다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흐르고 싶지 않은 물이 있다/ 더 이상 바다가 그립지 않은 물도 있다/ 행군하는 대열에서 빠져나와 가만히 앉아 있고 싶은 물도 있는 것이다/ …/ 고요하고 자유로운 곳/ 여기에도 살아 움직이는 것들이 찾아온다/ 물은 내 몸 어딘가에서 솟아 마르지 않으니/ 그리 멀리 가지 않아도/ 세상은 여기 작은 늪에 모두 고인다/ 하늘이 고인다 _ 장진희, '늪' 부분


흐르고 싶지 않아서 잠시 고일 때도 있을 것이다. 그동안에도 물은 내 몸 어딘가에서 솟고 있으니, 하늘이 내 안에 있으니, 너무 가여워하지는 말 일이다. 남원에 사는 복효근 시인은 "제일 큰 누나가 동네 후배와 눈이 맞아가지고 도망가서 산 곳이 섬진강 매화마을이었는데, 엄마가 몰래 반찬 만들어주면 시외버스 타고 누나에게 갖다 주었다"고 독자들에게 말했다. 누나가 결혼한 뒤 그 강변에 가서 조개와 물고기도 잡으며 놀았으니 섬진강과는 뗄 수 없는 사이였다. 더욱이 등단작이 상류의 바위가 하류에 당도해 모래가 되는 그런 삶을 어머니에게 투사하는 '새를 기다리며'였으니, 섬진강은 내내 그의 생을 관류해온 셈이다.

지리산이 제 살 속에 낸 길에/ 섬진강을 안고 흐르듯/ 나는 도련님 속에 흐르는 강입니다// 섬진강이 깊어진 제 가슴에/ 지리산을 담아 거울처럼 비춰주듯/ 도련님은 내 안에 서 있는 산입니다// 땅이 땅이면서 하늘인 곳/ 하늘이 하늘이면서 땅인 자리에/ 엮어가는 꿈/ 그것이 사랑이라면// 땅 낮은 섬진강 도련님과/ 하늘 높은 지리산 내가 엮는 꿈/ 너나들이 우리/ 사랑은 단 하루도 천년입니다 _복효근, '춘향의 노래' 부분

순창에 사는 백학기 시인은 영화감독이기도 하다. 영화 촬영을 많이 한 순창과 임실의 경계 지역에서 시작해 섬진강을 따라 걸어 내려가면서 어린시절부터 키워 온 강에 대한 사유가 영화를 만들고 시를 쓰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그는 말한다. 그에게 시는 "보편적인 우리 삶 속에서 이데아를 찾아가는 여정인 것 같다"면서 "요즘 쓰고 있는 시들에 불교적 세계관이 깃들어 있는데, 시(言+寺)는 한자 그대로 '언어의 사원' 아닌가 싶다 "고 말했다.

나는 어느덧이란 말이 좋다// 어느덧/ 어느덧// 그대가 알지 못하는 동안에/ 그대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어느덧/ 어느덧// 어느덧에는 바람소리가 들어 있다/ 바람냄새가 들어와 머문다// 그대가 돌아보지 않고/ 그대가 서성이지 않고// 가는 발걸음에 바람이 뒤따라간다// 어느덧/ 어느덧// 바람이 그대보다 먼저 간다 _백학기, '어느덧' 전문 

 

▲ 섬진강 여섯 시인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박두규, 복효근, 박남준, 백학기, 장진희, 이원규 시인.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악양의 박남준 시인은 발목을 다쳐 목발을 짚은 채 인사동에 왔다. 그는 시란 한마디로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손길"이라고 했는데, 실제로 그가 오래전 사랑에 실패했을 때 처음 섬진강을 만났다고 했다. 그는 그때 버스를 타고 가다가 어떤 강을 발견하고 내려서 걷다가 '상처받은 자에게 쑥부쟁이 꽃잎을' 썼다. 울고 있는 '짐승처럼 웅크린 한 사내'를, 그 사내의 '물결 쳐 가는 뒷등을 잔잔히 껴안는' 시편이었다. 그는 나이가 들어서 강물을 흐르는 대로 그냥 바라보는 것도 마냥 편하지는 않아 먼 강물에 편지도 쓰고, 저녁 강이 숲에 들어가는 시를 쓰기도 했다.

여기까지 왔구나/ 다시 들녘에 눈 내리고/ 옛날이었는데/ 저 눈발처럼 늙어가겠다고/ 그랬었는데// 강을 건넜다는 것을 안다/ 되돌릴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 길에 눈 나리고 궂은 비 뿌리지 않았을까/ 한 해가 저물고 이루는 황혼의 날들/ 내 사랑도 그렇게 흘러갔다는 것을 안다/ 안녕 내 사랑, 부디 잘 있어라 _ 박남준, '먼 강물의 편지'

 

모래톱이 창문 너머로 보이는 매화마을 주민 이원규 시인은 25년 동안 섬진강 주변을 뱅뱅 돌면서 살아 이제는 섬진강 주변이 고향인 셈이다. 그는 강을 따로 의식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섬진강 물고기나 철새처럼 여기저기 살고 있다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그는 '날마다 칭얼대며 지리산 어머니의 치맛자락에 매달리고, 섬진강 생명의 탯줄을 놓지 않고 살아왔다'면서 '때로 가난하고 아프고 외롭고 절망적이어도 좋았다'고 썼다.

 

전라도 구례 땅에는 비나 눈이 와도/ 겁나게와 잉 사이로 내린다// 가령 섬진강변 마고실의 뒷집 할머니는/ 날씨가 쫌만 추워도, 겁나게 추와불고마잉!/ 리어카 살짝 밀어줘도, 겁나게 욕봤소잉!/ 강아지 짖어도, 고놈의 새끼 겁나게 싸납소잉!//…/ 텔레비전 인간극장을 보다가도/ 새끼들이 짠해서 으짜까잉! 눈물 홈치는/ 너무나 인간적인 과장의 어법// 내 인생의 마지막 문장/ 허공에 비문을 쓴다면 이렇게 쓰고 싶다/ 그라제, 그라제, 겁나게 좋았지라잉! _ 이원규, '겁나게와 잉 사이' 부분

 

▲ 서울 인사동에서 열린 '섬진강 시인들' 북토크 현장. 오봉옥(가운데) 시인의 사회로 다양한 질문이 이어졌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오봉옥(서울디지털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시인의 사회로 진행된 북토크에서는 여섯 시인의 시 세계를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질문들과 답이 이어졌다. 장터에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를 5년째 '전라도 닷컴'에 연재하고 있는 장진희 시인은 "내가 만난 장터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그악스러운 자본주의가 끼어들 데 없는 최후의 원주민"이라면서 "이 지독한 시국에도 그들의 심성을 접하면 배짱이 생기면서 든든해진다"고 말했다. 전라도사투리 대회에 나가 상금 30만 원도 받았던 장 시인이 지난 대통령선거 때 썼다는, 지난해 퍼포먼스에서 낭독했다는 '욕' 풍경은 장관이다.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종일 입에서 욕이 나온다./ 썩을놈들" 선창을 하자 광주의 중년 두 남자가 북을 두드리며 "씨발놈 씨발놈!" 코러스를 넣는다. "빌어먹을 놈들!" 하면 "씨발놈 씨발놈, 씨발놈 씨발놈!" 다시 코러스를 넣고, "호랭이 물어갈 놈들, 문둥이 콧구멍에서 마늘씨 빼먹을 놈들" 읽을 때마다 "씨발놈 씨발놈, 씨발놈 씨발놈" 관객들까지 따라서 마구 욕을 하기 시작했다. "급살탕에 양잿물 시 숟가락 타 묵고 뽁뽁 기다가 죽을 놈들/ 삼복 염천에 염병지랄하다가 땀도 못 내고 죽을 놈들!" 백일홍 꽃밭에 걸판진 욕이 휘몰아쳤다. _ 이원규, 섬진강 시인 여섯 명의 '몸詩 퓨전 콘서트'

이들에게 시는 상처를 쓰다듬고 균형감각을 제공하며, 흐르는 삶을 차분하게 들여다보면서 바다에 닿을 시간을 성찰케 하는, 지극한 동반자인 셈이다. 섬진강 물빛이 다양하게 스며든 시편들이 주는 감흥은 크다. 복효근 시인의 말.

'나는 오늘도 내 시가 저 하류에 이르러 새하얀 모래벌 그 어디에서 새로 부화하여 날아오르기를, 그 비상의 날갯짓 소리가 들려오기를 기다린다.'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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