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시간과 순간의 술: 위스키와 진이 들려주는 두 개의 철학
KPI뉴스
go@kpinews.kr | 2025-08-28 10:34:41
스코틀랜드에서 양조·증류학을 공부하며 처음으로 위스키의 세계에 발을 들였을 때, 나는 술이 단순히 취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시간과 환경, 그리고 사람의 철학이 녹아 든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이후 런던의 진 증류소에서 근무하며 또 다른 증류주의 세계를 경험했을 때, 같은 증류주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가치와 매력을 품고 있다는 사실에 매료되었다. 위스키와 진, 이 두 세계를 오가며 깨달은 점을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위스키는 무엇보다 시간의 예술이다. 곡물을 발효시켜 증류한 뒤, 오크통 속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며 자신의 개성을 완성한다. 곡물의 종류, 효모의 특성, 증류기의 형태와 재질 같은 수많은 변수가 위스키의 향과 맛을 빚어내지만, 결국 가장 결정적인 것은 숙성의 시간이다. 오크통 안에서 알코올은 나무와 교감하며 바닐린과 탄닌, 락톤 같은 풍미를 얻고, 계절의 온도 변화와 미세한 산소의 숨결 속에서 서서히 깊이를 더해간다. 그래서 위스키를 마신다는 것은 단순히 술을 마시는 행위가 아니라 그 속에 쌓인 시간을 음미하는 경험이라 할 수 있다.
스코틀랜드 증류소에서 처음으로 오크통을 열었을 때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통에서 퍼져 나오던 따뜻한 나무향과 은은한 바닐라 향, 그리고 긴 세월 동안 숨 쉬어 온 듯한 공기의 무게감이 온몸을 감쌌다. 그 한 모금을 입에 머금었을 때 느껴진 깊이는 단순한 맛이 아니라 기다림과 인내가 만들어낸 결실 같았다. 위스키는 그 자체로 시간을 들여야만 얻을 수 있는 가치의 상징이었다.
반면 진은 순간의 예술에 가깝다. 96% 이상 고도수의 중성주정을 베이스로 하여 주니퍼베리와 고수씨, 시트러스 껍질, 허브, 향신료 등 보태니컬(식물성 향료)을 더해 만들어지는 진은 숙성을 기다리지 않는다. 어떤 재료를 어떤 비율로, 어떤 방식으로 조합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새로운 제품이 탄생한다. 이 때문에 진은 늘 창의적이고 실험적이며 생산자에게 무궁무진한 상상력을 허용한다. 그리고 소비자는 칵테일이라는 캔버스를 통해 그 창의성을 직접 경험한다. 진토닉의 청량감, 드라이 마티니의 절제된 강렬함, 네그로니의 쌉쌀한 조화 속에는 진이 가진 다양한 얼굴이 담겨 있다.
흥미로운 점은, 두 술의 차이가 그저 제조법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술을 낳은 환경, 문화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다. 스코틀랜드의 위스키는 청정한 물과 서늘한 기후, 긴 숙성을 견디게 하는 자연환경 속에서 전통을 지켜온 결과물이다. 반대로 런던의 진은 향신료와 원료의 교역이 활발했던 도시의 개방성과 다양성 속에서 꽃피웠다. 여러 나라의 향료가 한 증류기 안에서 조화를 이루는 모습은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런던이라는 도시의 정체성과도 닮아 있다.
결국 위스키와 진은 같은 증류 기술에서 태어났지만 서로 다른 철학과 감각을 담고 있다. 위스키가 긴 기다림 끝에 완성되는 깊이의 술이라면 진은 즉각적인 조합과 창의성으로 빛나는 개성의 술이다. 나는 이 두 세계를 경험하며 술이란 단순한 음료를 넘어 시간과 순간, 전통과 창의, 환경과 사람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문화적 산물임을 배웠다.
그래서 지금 내가 술잔을 기울일 때마다 그것은 단순한 한 모금이 아니라 그 술이 걸어온 길과 그 술을 만든 이들의 철학에 대한 경의를 함께 나누는 순간이다. 그 속에서 나는 늘 다시 한번 깨닫는다. 술이란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과 바라보는 세계를 비추는 또 하나의 거울이라는 사실을.
[ⓒ KPI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