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문덕은 선비족, 바보 온달은 서역인 혈통?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 2024-07-12 10:55:01
동아시아 뒤흔든 살수대첩 주역임에도 베일에 가려진 을지문덕
612년 전쟁 시기 활약상 제외한 생애 관련 사료 사실상 전무
연개소문 같은 금수저는 아닌 것 같다는 정도의 추론만 가능
온달도 여전히 수수께끼 인물…서역인 후손 주장은 근거 취약
612년 음력 7월 고구려군은 수나라군을 지금의 청천강인 살수(薩水)에서 대파했다. 참패한 수나라는 몇 년 후 붕괴했다.
수나라에 눌려 지내던 북방 유목 민족들은 살수대첩을 계기로 다시 중원 왕조를 압박했다. 살수대첩은 동아시아를 뒤흔든 대사건이었다.
그 주역인 을지문덕(乙支文德)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독자 여러분께 세 가지 질문을 드리고자 한다.
(1) 을지문덕의 성은 을지일까, 을일까.
(2) 살수대첩 시기에 을지문덕은 백발이 성성한 노장이었을까.
(3) 을지문덕은 연개소문‧양만춘과 친밀한 사이였을까.
1번의 정답은 '알 수 없다'이다. 길을 막고 물어보면 열에 아홉은 "당연히 을지 아냐"라고 답하겠지만, 그게 그렇지가 않다. '삼국사기'에 을지문덕은 세계(世系) 즉 집안 내력을 알 수 없다고 기록돼 있는데, 그 후에도 그걸 파악할 수 있는 사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다수설은 성이 을지일 것이라는 쪽이다. 을지는 고구려 관직명인 사자(使者)나 대인(大人)을 뜻하는 '웃치'에서 비롯된 말로, 관직명이 성으로 채용된 사례라는 해석도 있다. 이와 달리 '지'는 존대의 접미사이고 '을'만 성이라는 주장도 있다.
2번의 정답도 '알 수 없다'이다. 여러 사극과 역사 소설에서 을지문덕을 백발과 흰 수염이 가득한 모습으로 묘사했지만, 그렇게 볼 사료적 근거는 없다.
을지문덕은 생몰년 미상 즉 태어난 해와 세상을 떠난 해가 언제인지 알 수 없는 인물이다. 당연히 살수대첩 때 나이도 알 수 없다. 그런데도 관행처럼 늙은 장수로 묘사한 건 '최고 지휘부였으니 나이가 많았겠지'라는 선입견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3번의 정답 역시 '알 수 없다'이다. 을지문덕이 연개소문‧양만춘과 친밀했고 가르침을 준 것처럼 그린 사극이 있지만, 근거는 없다. 사실 을지문덕이 이들과 알고 지냈는지조차 파악할 수 없다. 을지문덕‧양만춘 모두 생몰년 미상이고 연개소문은 태어난 해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을지문덕에 관한 사료는 612년 전쟁 시기 활약상에 대한 것만 남아 있다. 을지문덕의 생애, 출신지, 가족 관계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사료는 사실상 전무하다. 조선 시대에 나온 책 '해동명장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을지문덕이 평양 사람이라고 적혀 있긴 하지만, 전거를 밝히지 않아 연구자 다수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
연구자들은 을지문덕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내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했다. 그 결과물 중 특히 눈길을 끈 것은 북방 유목 민족 중 하나인 선비족 출신 귀화인일 것이라는 주장이다.
근거는 송나라 때 나온 역사서 '자치통감'에 을지문덕이 '尉支文德'(울지문덕 또는 위지문덕, 尉은 '울'로도 '위'로도 읽을 수 있음)으로 기록돼 있다는 것이다. 울지(또는 위지)가 선비족 계통 성씨이니 을지문덕도 선비족 출신일 것이라는 추론인데, 탄탄한 근거라고 보기는 어렵다. '자치통감' 기록이 을지문덕 이름을 제대로 표기한 게 맞는지부터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남은 사료로는 을지문덕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알아낼 수 없는 걸까. 그렇지는 않다. 몇 가지는 추론할 수 있는데, 하나는 할아버지‧아버지가 고위직을 지낸 연개소문 같은 금수저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는 것이다. 을지문덕이 신진 귀족 출신일 것이라고 보는 연구자도 있다.
다른 하나는 살수대첩 이전에 이미 수나라에 알려질 만큼 비중 있는 인물이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수 양제가 별동대 지휘관에게 내린 밀지에서, 만나면 붙잡아야 할 대상으로 고구려 왕과 을지문덕을 지목한 데서 잘 드러난다.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에 드러난 문장력과 한문 이해 수준으로 볼 때 한자 문화가 먼저 발달한 낙랑‧대방 지역의 토착 세력 출신일 수 있다는 해석도 있다.
6~7세기에 활동한 이들 중 출신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킨 사람은 을지문덕만이 아니다. 대표적인 또 다른 사례가 바로 평강공주의 남편 바보 온달이다.
그간 온달에 대해 적잖은 연구가 이뤄졌는데, 대체적인 경향은 온달을 6세기 사회 변동 과정에서 부상한 신흥 세력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런 흐름 속에서 일부 연구자들은 온달을 하급 귀족 출신으로, 또 다른 연구자들은 평민 출신으로 추정했다.
이와 달리, 온달이 6세기에 무력 충돌을 불사할 만큼 극심했던 고구려 지배층의 내홍 과정에서 밀려난 고위 귀족 세력의 일원이었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하급 귀족 또는 평민 출신이 왕실과 통혼한다는 건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해석들과는 차원이 다른, 그야말로 파격적인 주장도 있다. 서역인 혈통설이다. 온달 아버지가 우즈베키스탄 도시 사마르칸트 지역에 있던 강국(康國)이라는 왕국의 상인이자 왕족으로서 장사하러 고구려에 왔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사마르칸트 인근에서 발견된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에는 고구려인으로 추정되는 두 사람이 그려져 있다. 이를 고려하면 사마르칸트 상인의 고구려 방문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서역인 혈통설은 근거가 매우 취약하다. 중국 역사서인 '구당서'에 강국 왕의 성이 온(溫)이라고 기록돼 있다는 점 정도를 제외하면 주장의 근거라고 할 만한 것을 찾기 어렵다.
을지문덕‧온달에 대해 고구려인이 작성한 사료가 충분하다면 이런저런 의문의 상당 부분은 진작에 해소됐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런 사료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아쉬울 따름이다.
KPI뉴스 / 김덕련 기자 kdr@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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