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싹 속았수다' 제주 해녀와 독도의 특별한 인연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 2025-04-18 10:30:16

[김덕련의 역사산책 18] 독도 수호의 숨은 주역
1950년대 독도의용수비대, 제주 해녀 모집
해녀들, '미역 채취 + 독도 방어 지원' 활동
학계 '독도 지키는 데 제주 해녀가 큰 역할'
'테왁 메고 독도 함께 지킨 무명용사' 평가도

지난달 방영된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는 다수의 제주 해녀가 등장한다. 드라마가 큰 인기를 얻으면서 물질을 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제주 해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제주 상징으로 꼽히는 해녀는 근현대사에 자신들만의 자취를 뚜렷이 남긴 존재이기도 하다. 대표적 사례가 1932년 제주해녀항일운동이다. '잠녀항쟁'으로도 불리는 이 운동은 생존권 투쟁을 넘어 식민지 수탈에 맞선 일제 강점기 여성 주도 항쟁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는다. 

 

▲ '폭싹 속았수다' 주인공 오애순(아이유 분)의 어머니 전광례(염혜란 분)는 제주 해녀였다. [팬엔터테인먼트, 바람픽쳐스]

 

이 항쟁에 비해 덜 알려졌지만 역사적으로 중요한 또 다른 사례가 있다. 독도 수호의 숨은 주역이 바로 제주 해녀라는 것이다.

이야기는 울릉도 주민들이 독도의용수비대(이하 수비대)를 결성해 일본의 독도 침탈 시도에 저항한 195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비대는 그해 4월 독도에 상륙해 1956년 12월 경찰 독도경비대(이하 경비대)에 업무를 인계할 때까지 활동하는데, 주둔 비용을 자체 조달해야 했다.

그래서 구상한 방안이 독도의 미역 채취였다. 독도 일대는 조선 시대부터 유명한 미역 어장이었다. 질 좋은 자연산 돌미역이 지천에 깔려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미역이 풍부했다.

수비대는 독도 어장의 독점적 이용권을 허가받았다. 독도 미역 채취권에 상당한 이권이 걸려 있어 독점권 확보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이어 제주에 가서 미역을 채취할 해녀를 모집했다.

제주 해녀가 이때 독도에 처음 간 것은 아니었다. 일제 강점기인 1935년 일본 회사에 고용돼 독도에서 전복을 채취했고 광복 후에도 독도에서 어로 작업을 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제주 해녀의 독도 장기 거주는 수비대의 모집 후 본격화된 현상으로 여겨진다.

독도에 온 해녀 수는 해마다 다소 달랐는데, 많을 때에는 50명이 넘었다고 한다. 해녀들은 모집에 적극 응했다. 그 배경에는 분쟁을 수반한 '출가(出稼) 물질'의 역사 그리고 분단과 냉전으로 인한 문제가 있었다.


출가 물질은 해녀가 제주를 떠나 타지에서 해산물 채취 작업을 하는 것을 말한다. 1876년 개항 후 일본 어민들의 제주 어장 침탈을 계기로 시작됐다. 출가 물질 지역은 일제 강점기에 한반도 전역과 일본은 물론 중국 다롄과 칭다오, 소련 블라디보스토크까지 확대됐다.

출가 물질은 해녀들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그러나 특정 어장에서 공동으로 어업을 할 수 있는 권리인 입어권(入漁權)을 둘러싼 분쟁이 곳곳에서 발생했다. 출가 물질 지역 어민 상당수에게 제주 해녀가 자신들의 이익을 침해하는 집단으로 비치면서 생긴 일이었다.

그에 더해 광복 후 출가 물질 가능 지역이 대폭 축소됐다. 분단과 냉전으로 한반도 북부와 중국, 소련은 접근 불가 지역이 됐고 일본은 우리와 미수교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런 제주 해녀들에게 독도는 어장이 풍부한 데다가 입어권 분쟁 걱정을 덜어도 좋은 곳이었다.

 

▲ 2024년 7월 15일 동해 상공에서 바라본 독도 서·동도 모습. [뉴시스]

 

하지만 작업 환경이 매우 열악했다. 우선 물이 태부족했다. 해녀들은 독도의 서도(西島), 수비대는 동도(東島)에 거주했는데 물이 나오는 장소는 서도의 물골 한 곳뿐이었다. 동굴이나 자갈밭에 가마니를 깔고 몇 달씩 지내야 할 정도로 제대로 된 숙소도 없었다.

악조건 속에서 해녀들은 미역 채취에 매진했다. 해녀 수십 명을 동원하는 방식의 미역 채취는 양식 미역이 유행하면서 독도 자연산 돌미역 어장의 경제적 가치가 떨어지는 1970년대 중반까지 지속된다.

해녀들은 수비대와 경비대를 돕는 일에도 열심이었다. 수비대가 바다에 떨어뜨린 통나무를 물가까지 밀어주며 막사 건축을 도왔다. 식수가 떨어진 경비대원들에게는 물골의 물을 실어 전달했다. 울릉도에서 온 보급선이 파도로 독도에 접안하지 못해 경비대원들이 굶주릴 위기에 처하자, 해녀들이 바다로 뛰어들어 부식을 받아 대원들에게 가져다준 일도 있었다.

학계에서는 수비대와 경비대가 독도에 장기 거주하며 지키는 데 제주 해녀가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총 대신 '테왁'(물질을 할 때 가슴에 받쳐 몸이 뜨게 하는 공 모양의 기구)을 메고 독도를 함께 지킨 무명용사라는 평가도 나온다.

하지만 독도 지킴이로서 제주 해녀를 기리는 국가 차원의 움직임은 찾아보기 어렵다. 2005년 독도의용수비대지원법이 제정돼 수비대를 국가 차원에서 예우하는 것과 대비된다. 다행스러운 건 제주 해녀의 활약상을 기억하는 이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달에는 독도에서 활약한 제주 해녀를 예우하는 조례 제정을 위한 간담회가 제주도의회에서 열렸다.


△주요 참조=김수희 논문(「독도어장과 제주해녀」, 『대구사학』 109, 2012), 이태우 논문(「독도의용수비대 활동의 주민생활사적 의미」, 『독도연구』 32, 2022), 박찬식 논문(「제주 해녀의 역사적 고찰」, 『역사민속학』 19, 2004)

 

KPI뉴스 /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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