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 재판 판사들 엇갈린 운명…강제 사직에서 투신까지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 2025-02-28 16:22:53

[김덕련의 역사산책 16] 대법원과 소수 의견
졸속·날림 비판 피하기 어려운 군법회의 1·2심
전두환 측 노골적 개입…"재판이 아니라 개판"
대법원 판사 14명 중 6명 '내란 목적 아니다'
소수 의견 판사들 쫓겨나…보안사 끌려가기도

서울고등법원 형사7부가 10·26 사건의 주역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재심 개시를 지난 19일 결정했다. 김재규가 처형된 지 45년 만이다.

서울고법 재판부는 계엄사 수사관들이 김재규에게 구타, 전기 고문 등의 폭행과 가혹 행위를 했음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을 재심 근거로 제시했다. 검찰은 지난 25일 항고했다. 

 

▲ 1979년 12월 20일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선고 공판을 받기 위해 포승에 묶여 걸어오는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뉴시스]

 

향후 진상이 규명돼야겠지만 그간 수사뿐 아니라 재판도 문제가 많았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군법회의가 1·2심을 진행했는데, 민간인인 김재규에 대한 재판을 관할하는 것부터 논란이 됐다. 그러나 김재규 변호인의 문제 제기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군법회의에서 재판은 총알처럼 빠르게 전개됐다. 첫 공판에서 선고까지 1심은 16일(1979년 12월 20일 선고), 2심은 6일(1980년 1월 28일 선고)밖에 안 걸렸다. 졸속·날림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속도였다.

1·2심 모두 김재규에게 내란 목적 살인 및 내란 수괴 미수죄로 사형을 선고했다. 전두환이 이끈 계엄사 합동수사본부가 적용한 '내란 목적'이라는 틀대로 군 검찰이 기소하고 군법회의는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김재규 등 사건 관계자들에 대한 변호 활동은 심하게 제약됐다. 변호인들은 수사 자료를 충분히 검토할 시간도, 공판 조서를 제때 열람·등사할 수도, 법정 진술을 녹취할 수도 없었다.


전두환을 정점으로 한 신군부는 노골적으로 재판에 개입했다. 모든 법정 발언을 녹음하며 공판 중 수시로 재판부에 쪽지를 전달했다. 김재규 변호인을 불러 "너 손 좀 봐줘야겠다"며 을러대기도 했다. "재판이 아니라 개판이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2심까지 끝낸 전두환 측은 대법원 판사들에게 '1개월 안에 처리', '조속히 김재규 등의 상고 기각'을 요구했다. 그러나 대법원에는 '박정희 대통령 등을 저격한 김재규 행위는 내란 목적 살인이 아닌 단순 살인이며 내란죄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보는 판사가 적지 않았다.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사 14명 중 8명이 다수 의견(상고 기각), 6명은 소수 의견(내란 목적으로 볼 수 없다)을 냈다. 논쟁 끝에 대법원은 1980년 5월 20일 상고를 기각하고 김재규 등의 사형을 확정했다. 2심 선고 후 넉 달 가까이 지난 시점이었다.

4일 후 김재규는 처형된다. 뒤이어 전두환 측은 소수 의견을 낸 판사들을 대법원에서 쫓아냈다. 6명 중 5명은 전두환 측 강압에 사표를 내고 그해 8월 사직했다. 1명은 이듬해 4월 대법원 판사 재구성 때 배제돼 떠났다.

사표 제출을 완강히 거부한 양병호 판사는 고문으로 악명 높은 보안사 서빙고분실에 끌려갔다. 이영섭 대법원장은 양 판사가 분실에서 풀려난 직후 넋이 나간 사람 같았고 마시던 커피가 흘러내려 목덜미와 가슴을 적시는 것도 모를 정도였다고 훗날 증언한다.

강제 사직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두환 측이 조작한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재판이 시작됐다. 김대중 관련 재판을 앞두고 '대법원 군기 잡기'가 진행됐던 셈이다.

이 대법원장은 김재규 재판 건으로 전두환에게 시달려야 했다. 1980년 9월 전두환은 "김재규 사건을 늦게 마무리 짓는 바람에 5·18 광주사태가 터졌다"며 대법원장을 탓했다. 대포 한 방으로 대법원을 날려버리자는 장군들을 자기가 말렸다는 위협적인 언사도 서슴지 않았다.

 

▲ 김재규 재판에서 소수 의견을 낸 판사들은 대법원에서 쫓겨나고 대법원장은 전두환에게 험한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이미지는 역대 대법원장 사진. [대법원 홈페이지 갈무리]

 

이듬해 대법원장은 김재규 재판 주심으로 초기부터 다수 의견을 개진한 유태흥 판사로 바뀐다. 유 대법원장 시절 사법부는 정치 권력에 완전히 종속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1986년 퇴임한 유 대법원장은 2005년 서울 마포대교에서 투신으로 생을 마감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유 판사의 후임 대법원장인 김용철 판사도 김재규 재판 때 다수 의견을 냈다. 김 대법원장은 1988년 노태우 정부 출범 후 소장 판사들이 '대법원장 사퇴', '정보 기관원의 법원 상주 반대' 등을 요구해 물러나야 했다(2차 사법 파동).

그 후임인 이일규 판사는 김재규 재판을 담당한 법관 중 마지막으로 대법원장이 됐다. 이 판사도 김재규 재판 때 다수 의견 쪽에 섰다. 그러나 전두환 정부에서 중용된 유태흥·김용철 판사와는 여러모로 달랐다.

이 판사는 앞서 후보자로 지명된 정기승 판사의 대법원장 임명 동의안이 국회에서 부결된 후 새롭게 후보자로 지명됐다. 군사 정권에 밀착해 출세한 인사라는 비판을 받은 정 판사와 달리, 이 판사는 박정희·전두환 정부 때 공안 사건에서 무죄 취지 소수 의견을 많이 개진했다.

'사법 살인'으로 불리는 1975년 4월 8일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판결도 그중 하나다. 이 판사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사 13명 중 유일하게 '1·2심 재판에 위법적 요인이 많으니 다시 재판해야 한다'는 소수 의견을 냈다. 김재규 재판에서 소수 의견을 내는 판사 6명 중 4명도 이때 전원합의체 일원이었지만, '사법 살인'에 의문을 제기한 사람은 이 판사뿐이었다.

 

KPI뉴스 /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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