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홍균 칼럼] '캘리포니아에서 온 자녀' 신드롬과 신뢰 설계

조홍균 객원논설위원

hongkyooncho@korea.ac.kr | 2025-12-15 09:22:04

연명 의료, 옳음과 그름 아닌 옳음과 옳음 사이 선택 영역
인간 삶과 인류문명 형태 성찰 계기···새로운 사회계약 요구
환자는 삶의 서사 지닌 주체···의료 인본주의 지평 열어야

'캘리포니아에서 온 자녀' 신드롬('Daughter from California' syndrome). 미국 의료계에서 회자되어 온 표현이다. 장기간 연락이 없던 가족 구성원이 부모의 임종 시기에 돌연 등장하여 그간의 소원함으로 인한 미안함 또는 죄책감 등으로 연명 의료 중단에 대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면서 가족 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이로 인해 환자의 생애 말기에 관한 의사결정이 지연되거나 무산되는 상황을 일컫는다.
 

▲ 연명 의료 관련 이미지 [챗GPT 생성]

 

이러한 신드롬이 미국에만 있는 현상일까. 어느 나라나 의료 현장에서 환자와 가족 간에 삶을 마무리하는 방식에 관한 의견이 엇갈리는 사례는 많을 것이다. 유교 문화적 전통에 기반한 효와 장수의 가치관이 강한 우리나라의 경우 부모의 타계에 대한 논의 자체를 기피하는 성향이 크기에 생애 말기 의료에 관한 결정이 더욱 쉽지 않을 수 있다. 인간 삶의 근원적인 성찰과도 연결되는 이 주제를 지난 목요일 한국은행과 국민건강보험공단 주최 심포지엄에서 다루었다.

우리나라 대법원은 1997년 보라매병원 사건을 계기로 의료진이 환자 보호 의무가 있음에도 퇴원시켜 사망케 한 경우 살인방조죄가 성립된다고 판시했다. 이 판례의 핵심 논지는 의학적 판단이 아니라 보호자의 요구에 의한 치료 중단은 생명 경시 풍조를 조장할 우려가 있으므로 허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환자의 의사를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서 보호자의 요구와 의료진의 치료 지속 의무 중 무엇을 우선할 것인지에 대해 판결했다는 의의가 있으나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라 할지라도 치료를 중단하면 법적 책임을 질 수 있다는 인식을 의료 현장에 각인시키는 결과를 낳은 것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대법원 판례에 따라 환자가 명시적으로 치료를 거부하거나 의학적 회복 가능성이 희박한 경우에도 법적 책임에 대한 부담과 생명 연장을 중시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연명 의료가 2010년대 후반까지 시행되었다.

연명 의료 과정에는 인공호흡기 삽관, 체외생명유지술 등 고강도 침습적 의료 행위가 수반될 수 있어 환자에게 심각한 신체 손상과 극심한 통증이 수반될 수 있다. 한국은행이 국내외에서 최초로 연구를 수행하여 이번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연명 의료 고통 지수(Life-Sustaining Treatment Distress Index, LSTDI) 산출 결과에 따르면 연명 의료 환자의 고통은 일반 질환의 최대 통증 대비 약 3.5배에 달하며 일부 환자군에서는 약 13배까지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환자에 가해지는 심대한 고통과 함께 이를 지켜보는 가족의 괴로움 및 돌봄 장기화가 가족 건강에 파급되는 영향, 회복 가능성이 없는 상태에서 의료와 간병이 장기화하는 경우의 사회경제적 비용, 환자 의사와 무관한 연명 의료에 자원 투입이 지속됨에 반해 수요가 높은 호스피스 등 생애 말기 돌봄 서비스에는 자원이 부족한 구조적 불균형 심화 등 현상도 심포지엄에서 논의되었다.

그동안 주요국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존중하면서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보호하는 내용을 핵심 원칙으로 하는 연명의료제도를 도입하여 운영해 왔다. 미국의 경우 1990년 환자자기결정권법(Patient Self-Determination Act)을 제정하여 치료 거부권, 사전의료지시서 작성, 대리인 지정권 등을 보장하였다. 영국은 2005년 정신능력법(Mental Capacity Act)을 제정하여 자기결정권 존중, 특정 치료 거부, 사전돌봄계획 및 대리인 선임 제도를 규정하였다. 우리나라는 2018년부터 사전연명의료의향서와 연명의료계획서 등을 제도화하는 연명의료결정법을 시행하고 있다. 이 법은 임종이 임박한 시점에서 환자가 연명 의료를 거부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였고 의료 현장이 겪어온 연명 의료 중단에 대한 법적 불확실성을 크게 해소하는 계기가 되었다.

연명 의료 문제를 폭넓고 깊이 있게 다룬 이번 심포지엄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성찰의 계기를 만들어 주고 있다. 인간 삶의 마지막은 어떻게 마무리되어야 하는가. 삶의 마지막 순간에서 의료의 역할은 무엇인가. 삶의 본질에 관한 성찰, 그리고 사회가 함께 만들어 나가야 하는 인류문명의 모습에 대한 근원적 성찰에까지 이르게 된다.

사회학자 허버트 스펜서가 사회 진화론(social Darwinism)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사회는 진화하는 생물체처럼 인간 삶을 마무리하는 방식에서도 스스로 최적의 모습을 향하여 진화해 나가는 것인가. 연명 의료 이슈는 인류가 스스로 만들고 설계해 나가고자 하는 사회 진화에 관한 문제 제기이며 인간 삶을 바라보는 인류문명의 형태에 관한 문제 제기이기도 하다. 연명 의료는 사회가 어떤 죽음을 허용하고 어떤 삶의 마무리를 존엄하다고 인정할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단계에 진입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규범적 사회 진화의 시험대가 된다. 사회공동체의 치열한 고민과 근원적 성찰을 요구하면서 우리 시대의 새로운 사회계약(social contract)을 모색해 나가야 할 필요성을 일깨워 준다.

그렇다면 어떠한 모습의 사회계약을 모색해야 하는가. 연명 의료 문제를 의료기술의 적용 여부나 생명 연장의 가능성에 국한해 다루는 순간 논의는 찬반 논리나 법적 기준으로 흐르기 쉽다. 그러나 이 문제의 본질은 의료기술이 어디까지 가능한지가 아니라 사회가 인간의 삶과 죽음 앞에서 어떠한 결정을 하며 그 결정을 어떤 방식으로 존중할 것인지에 관한 보다 근원적인 성찰에 있다.

연명 의료를 둘러싼 갈등의 핵심은 어느 한쪽이 명백히 옳고 다른 쪽이 틀렸다고 말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생명을 최대한 연장하려는 태도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존중에서 비롯된다. 동시에 연명을 거부하고 고통 없는 죽음을 선택하려는 태도 역시 인간 존엄성에 대한 존중에서 비롯된다. 이는 가치 충돌(value conflict)의 전형적 사례이며 옳음과 그름이 아닌 옳음과 옳음 사이에서의 선택 영역에 속한다.

따라서 연명 의료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하나의 정답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서로 다른 옳음이 공존할 수 있는 규범적 공간을 설계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법적 기준은 인간 삶에 대한 근원적 판단에 앞서는 최종 결정이라기보다는 다양한 선택이 존중받을 수 있도록 하는 사회적 장치로 이해될 당위가 있다.

연명 의료는 의료기술 중심 체계에서 인간 중심 체계로 전환하는 의료의 인간화(humanization of medicine)를 요구하고 있다. 이는 환자를 치료의 객체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삶의 서사를 지닌 주체로 인식하는 철학의 변화를 내포한다. 연명 의료 지속에 관한 결정은 의학적, 기술적 지표만이 아니라 환자의 삶 전체에 관한 가치와 서사 속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연명 의료는 의료가 진정한 인본주의(humanism)의 지평을 열어가야 할 당위를 강화해 준다.

연명 의료를 둘러싼 새로운 사회계약은 결국 신뢰 설계(trust design)의 문제로 귀결된다. 환자를 포함한 사회 모든 당사자는 인간의 존엄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신뢰를 만들어 가야 한다. 이는 인간 존엄의 고려가 비용 절감 등 효율성 논리로 오염되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를 전제로 한다. 그래서 연명 의료는 사회가 신뢰를 구조적으로 만들어 내는 인류문명에 관한 디자인이 되어야 한다. 이는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진화하고자 하는지를 드러내는 우리 시대의 리트머스 시험지와도 같다.

'캘리포니아에서 온 자녀' 신드롬은 연명 의료라는 구조적 이슈에 접근함에 있어 사회적 통찰력이 긴요함을 말해주고 있다. 이번 심포지엄 연구 수행과 같이 중앙은행이 사회의 구조적 이슈에 대하여 통찰력 있는 분석과 진단을 통해 그야말로 최종 신뢰 설계자(trust designer of last resort)로서 더 나은 세계를 만드는 데 이바지하는 역할을 높이 평가하고자 한다.
 ▲ 조홍균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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