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성열의 AI경제] 미·중 신(新)경제 질서에 맞춘 한국의 제조업 개혁
KPI뉴스
go@kpinews.kr | 2025-11-06 09:31:44
대한민국의 천년 고도(古都) 경주에서 미국과 중국 G2 정상이 만나 글로벌 무역전쟁 휴전에 합의한지 일주일이 지났다. 희토류와 관세를 맞바꾼 협상 결과는 미래경제 패권을 선점하기 위한 기술 전장(Tech Battlefield)의 일환으로 아시아 '경주 전투'에서 서로 체면을 세워주며 살짝 시간을 번 성격이 짙다. 두 거인은 잠시 싸움을 멈췄을 뿐, 관세를 앞세운 미국의 제조업 부흥과 금수(禁輸)에 맞선 중국의 기술자립 정책은 계속될 전망이다. 특히, 두 나라 모두 피지컬 인공지능(AI)·양자·우주항공 등 '제조업의 인공지능 전환(AX)'에 총력전을 벌이고 있음은 분명하다.
우리나라 제조업은 2024년 기준 국내총생산(GDP)의 29%, 수출의 44%를 차지하며 여전히 경제의 주춧돌 노릇을 하고 있다. 미·중은 기존의 세계화와 자유무역의 개방체제로부터 '진영 요새'로 세계 국제질서의 틀을 바꾸고 있다. 한국이 가야할 길은 어디인가. 경주 합의로 우리가 얻은 것과 잃은 것은 무엇인가.
한국은 아시아태평양공동체(APEC) 회의 의장국으로서 두 거물 손님과 함께, 한번 오기 힘든 여러 귀빈들을 융숭하게 대접하고 합의문인 경주선언을 이끌어냈다. 단선적인 평가는 이르지만 크게 보아 실용외교를 전면에 내세운 이재명 정부가 얻을 수 있는 건 얻고, 당장 해결하기 어려운 현안은 봉합하는 유연한 자세로 무난하게 행사를 치른 것으로 보인다.
정부 간 무역 현안과 안보 이슈에 대한 개별적 합의와 더불어, 민간 경제의 주체인 국내외 대기업들이 APEC 비즈니스 미팅을 통해 한국의 잠재력을 더 끌어올린 점도 높이 평가된다. 특히, AI 경제 생태계의 최강자 엔비디아로부터 26만 장의 AI 반도체(GPU)를 공급받기로 해 미·중에 이어 우리나라는 AI 자원 3대 보유국이 됐다. 그런데 이 귀중한 반도체 자원을 갖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할 선택과 집중의 시간도 다가왔다. 여기에서 AI발(發) 한국 제조업의 개혁을 다시 한번 제안하고자 한다. 스마트 제조는 로봇, 자율주행 자동차·드론, 무인무기의 강소 수출국가로 발돋움하는 발판이다.
우리나라 제조업은 현재 양극화와 공동화(空洞化)의 양대 위기에 직면해있다. 양극화는 대기업 중심의 고도 제조업과 중소기업의 중하위 제조업 간 괴리현상이다. 대기업 집중이 갈수록 심화되면서 중소기업은 숫자와 종사인력이 줄고 있다. 국가데이터처의 전국사업체조사 통계에 따르면, 제조업체 수는 2022년 58만6000개를 피크로 2024년 50만4000개로 2년간 14% 감소했다. 특히 종사자 5인 이하 영세 제조업체는 무려 5만1000개가 감소했다. 취업자 수도 2022년을 정점으로 2025년 4% 줄었고, 14개월 연속 감소 추세가 계속되고 있다.
고용 감소는 대부분 300인 미만 제조업체에서 발생했다. 글로벌 산업 월드컵은 잘 나가는 몇몇 스타급 선수로만 우승할 수 없다. 신입과 후보선수층이 두터워야 지속적인 승률 높이기가 가능하다. 공동화는 국내 투자와 일자리가 해외로 새어나가는 자본·인력 유출을 의미한다. 한국수출입은행에 따르면 제조업의 해외투자 법인 수는 2021년 587개에서 2024년 813개로 증가했으며, 올해 상반기에 598개로 급증세를 보이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현대자동차는 지난 9월 미국 판매량 대비 미국 현지 생산 비중을 현재 43.5%에서 2030년 80%로 높이는 한편, 미국 현지 부품 조달 비중도 현재의 60%에서 80%로 높인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트럼프의 마가(MAGA) 정책 때문에 다른 기업도 미국을 포함한 해외 생산 비중을 크게 높일 것으로 보인다. 그 반사적 결과로 내수시장의 돈줄과 고용이 말라붙어 우리나라 국가재정에 부담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 양극화와 공동화를 막는 제조업의 구조조정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에 모두 필요하다. 차례로 보자.
우리나라 제조업은 1960년대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아래 본격적으로 꽃피기 시작했다. 전후 농산물과 광물 1차 산업 위주의 수출품은 60년대 들어 인력집약적인 경공업 제품으로 바뀌어갔다. 섬유와 신발, 가발 등 가공무역의 수출 흑자로 무역전선에 불을 붙인 한국은 1970년대 건설업의 중동 달러 유입에 이어, 1980년대 중화학공업으로의 체질 전환을 통해 석유화학, 철강, 조선, 자동차 등 굵직한 제조업 수출국가로 거듭 났다. 1988년 서울 올림픽으로 신장된 국력을 과시했던 한국 경제는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서서히 한계에 봉착한다.
1997년 외환위기(IMF 사태)는 제조업 거품이 꺼진 극적인 신호탄이었다. 이후 전기전자, 반도체로 수출상품을 고도화해 고비를 넘긴 우리 제조업은 2000년대 제조업의 디지털 전환이란 위기에 봉착했다. 서서히 실물보다 가상 경제의 부가가치가 커지기 시작한 것이다. IBM 컴퓨터뿐 아니라 마이크로소프트(MS)의 소프트웨어에 지불하는 돈이 많아졌다. 인터넷은 상품의 생산과 유통, 소비의 방식을 극적으로 변화시켰다. 전기전자 제품은 연결과 호환이 중요해졌다. 다른 기계들도 서로 소통하는 통신 프로토콜을 통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옮겨갔다. 이런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기업은 사라졌다. 디지털 전환 과정에서 코닥, 노키아, 사브는 잊혀진 브랜드가 됐다. 지금은 더 큰 인공지능 전환(AX)이 진행 중이다. 우리나라 경제는 국민소득 4만 달러 고지 앞에서 멈칫거리고 있다. 전통 제조업의 AX란 도전에 아직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 착시'란 용어가 생길 정도로 반도체, 자동차 양대 수출상품에 의존하는 쏠림 구조가 해소되지 못하고 있다. 해법은 무엇일까.
우선 대기업의 경우, 전통 제조업의 디지털 전환에 이어 인공지능 전환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 제조업 AX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엔비디아에서 확보한 26만 장의 GPU로 AI 데이터센터를 세우고 한국형 안드로이드 같은 피지털 AI를 학습시켜 공장을 무인화, 자율화해야 한다. 피지컬 AI는 로봇이나 자율주행 자동차처럼 현실세계에서 인간의 언어와 의도를 이해하고 물리적 행동을 수행하는 인공지능을 말한다. 미국 테슬라의 기가 팩토리는 공장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로봇이라고 할 만큼 AI 제조에 진심이다. 우리도 반도체, 통신, 전기전자 산업의 강점을 살려 생산현장의 AI화에 앞서나갈 수 있다.
중소기업은 고통스런 재구조화를 거쳐야 한다. 대기업의 AX에 맞추어 설비와 인력을 재배치, 재훈련하는 체질개선이 필요하다. 돈과 시간, 지식 모든 것이 부족할 것이다. 정부는 이 과정에서 도태하는 중소기업이 없도록 세제·금융 등 정책지원으로 최대한 구제할 준비를 갖추어야만 한다. 산업 1군과 2군 선수들, 그리고 코치와 감독이 출루율, 득점율을 높이는 '머니볼'에 익숙해지면 우승도 바라볼 수 있다. 자원과 인력이 비효율적인 부문에 집중돼 생산성이 떨어지는 악순환에서 벗어나야 우리나라 제조업도 무역월드컵 4강 진출을 다시 꿈꿀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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