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다정한 그녀가 설계한 천국의 속살"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 2024-08-30 15:04:45

3년 만에 장편 '영원한 천국' 들고 돌아온 정유정
SF와 로맨스, 스릴러 합쳐진 흥미와 사유의 마당
영생하는 가상세계로 반추하는 사랑과 죽음, 운명
"인간이 가축화된 시대에 되살려야 할 야성의 힘"

소설가 정유정이 3년 만에 새 장편 '영원한 천국'(은행나무)을 들고 돌아왔다. 경장편이 대세인 이즈음에 500쪽 넘는 두툼한 분량이다. 처음 시도하는 SF와 로맨스에 특유의 스릴러를 가미했다. 책장은 쉬 넘어가지만 끝까지 읽고난 여운은 만만치 않다. 모든 예술의 궁극적인 질문에 담대하게 맞서 나름의 답을 추구한 뚝심이 돋보인다.
 

▲새 장편을 펴낸 소설가 정유정. '영원한 천국'에 업로드 된 나는 '죽은 자일까, 산 자일까'.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롤라'라는 가상세계가 있다. 콩고어로 '낙원'이라는 의미처럼 아무도 이곳에서는 죽지 않고 모두가 무엇이든 원하는대로 살 수 있다. 말 그대로 영원한 천국이다. 구체적인 한 인간의 모든 정보를 데이터로 환원해 저장한 뒤 업로드하면 그 세계에서는 홀로그램으로 구현된 몸이 모든 감각을 느끼면서 현실처럼 살아갈 수 있다. 바야흐로 영생불사의 꿈이 실현된 세계인 것이다. 이 세계를 둘러싸고 정유정 소설은 과연 '천국'이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운명에 맞서는 야성의 힘은 죽음을 숙명으로 짊어진 인간들에게 어떤 무기인지 숨가쁘게 전개한다. 

 

'어마무시하게 돈이 많은 미국의 한 생명공학 회사가 인간이 죽지 않는 방법을 찾았다는 거야. 아니다, 죽지 않는 게 아니지. 신과 같은 능력을 가진 새로운 인종이 된다지, 아마. 뭐든 가질 수 있고, 뭐든 할 수 있고, 뭐든 될 수 있다는데, 내 생각엔 그 정도면 신과 같은 게 아니라 그냥 신이야. 아무튼 그 회사가 세계 최고의 게임 회사와 손을 잡고 신들이 거처할 세상을 만들었다 이거야. 부자도 없고, 가난한 자도 없고, 병든 자도 없는 세상.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롭게 사는 영원한 천국.'

 

롤라는 동물을 대상으로 임상실험 단계를 마치고 노숙자들을 상대로 인간 임상 실험을 진행한다. 이 임상 실험 티켓인 유심을 탈취하기 위한 복마전이 유빙이 흘러와 쿵쿵거리는 서해안 외딴 절벽 위 재활원을 배경으로 펼쳐지고, 롤라의 세계로 업로드된 여성과 남성의 이야기를 교차하면서 독자들에게 퍼즐을 제공한다. 

 

몸이 굳어가는 병에 걸린 '해상'이라는 여성과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 '제이'. 직장에서 해고되고 동생마저 변사체로 발견된 이후 외딴 재활원으로 숨듯이 일하러 갔지만 그곳에서 힘겹게 살아나온 뒤에도 다시 뼈저린 사랑의 상실을 경험하고 결국 '롤라'로 도망친 '경주'. 제이의 헌신으로 업로드된 해상을 경주가 롤라에서 만나 제이에 대한 진실을 들려주고, 초기작 '내 심장을 쏴라' 이후 줄기차게 견지해온 운명과 맞서는 자의 용기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서사가 이번 소설의 뼈대다. 

-기상 이변으로 바다까지 꽁꽁 얼어붙어 서해안에 유빙이 떠다니고, 몇만 년 전에는 바다였을 백사막이 등장한다.
"소설 취재를 위해 홋카이도 아바리시리와 이집트 바하리야 사막을 직접 다녀왔다. 경주는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충돌이 일어나는 인물인데 자기 운명의 각종 불행과 태어난 환경에 대한 울분이 있다. 부딪치고 균열되는, 아무것도 자라날 수 없는 차디찬 겨울 빙원이 경주의 내면과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다. 바하리야 사막은, 세상 유일의 존재인 여우와 어린왕자가 탄생한 공간 아닌가. 해상과 제이의 운명적인 사랑의 배경으로 적합한 곳이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가.
"견디고 맞서고 넘어서려는 욕망이 인간의 야성이다. 그런 모습을 잃어가는 시대라고 생각한다. 제발 그걸 좀 가져라, 지키라고 말하고 싶었다. 태초에는 하찮은 종이었던 사피엔스를 지구의 지배자로 만든 것이 무엇이었을까. 다른 종들은 배가 부르면 만족하는데 왜 인간은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했을까. 배고픔을 견디고 천적의 위험에 맞서고 자연 재해라든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려는 그런 욕망이 기질 안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태초에 우리 조상들이 준 건 바로 그 야성이 아닐까. 문명 사회의 순화된, 가축화된 현대 인간들이 잃지 말았으면 하는 그것이다. AI가 모든 것을 다 해주는 시대가 되더라도 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잊지 말자는 이야기다."

 

▲가상의 존재가 환영처럼 지나가는 공간에 선 정유정.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현실의 불행을 극복하지 못하고 롤라로 도망친 경주는 그곳에서 다시 운명과 맞서기 위한 결심을 한다. 해상은 죽음이 사라진 대신 권태가 가득한 롤라에서 극장의 이야기를 설계하는 일에 종사한다. 신청자의 과거 삶을 기반으로 새로운 생을 설계하면 당사자는 그 세계에 들어가서 한 생을 살다가 반드시 죽음을 매개로 롤라로 다시 돌아온다는 설정이다. 해상을 찾아간 경주는 자신의 설계도는 일정 부분 백지로 남겨달라고 간곡히 부탁한다. 그곳에서 자신의 운명과 맞서보겠노라고. 죽음을 설계하지 않으면 롤라로 다시 돌아올 수 없기 때문에 백지 설계는 난감하다.

 

'죽으려면 죽음에 이르는 길이 설계돼야 해요. 어느 날 갑자기 벼락을 맞아 죽는다고 해도 최소한 벼락 맞을 장소와 시점까지는 설계돼야 한다고요. 삶 전체가 죽음과 연결돼 있다는 뜻이에요. 태어나는 것 자체가 죽음을 향한 여정이라는 의미고. 드림시어터 안의 사람들이 설계된 운명을 사는 이유예요. 죽음이라는 보장된 출구가 있고 롤라로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으니까. 그런데 경주 씨는 백지를 원하고 있잖아요.'

-운명을 믿는가.
"운명은 있다. 맞서서 바뀔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안 바뀌더라도 최소한 싸움질은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자기 삶에 집중했으면 좋겠다. SNS에서 타인의 삶을 욕망하는 게 너무 마음에 안 든다. 자기 삶에 집중하려면 자기 삶의 가치를 찾아야 되는데 그걸 지레 포기하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이다. 백지 설계도를 받아든 경주는 자유의지를 확보한 셈이지만,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지 않는 한 영원히 그 세계를 벗어날 수는 없다. 복잡한 듯 하지만 독자들이 재미있게 본다면 그걸로 만족한다."


-전작 '완전한 행복'에 이은 욕망 3부작 중 2부작을 표방하고 있다.
"나에게 욕망은 크게 파괴적인 것과 성취적인 욕망으로 분류된다. 파괴적 욕망은 집착과 탐욕이 그 바탕에 있는데 타인을 파멸시키고 자신의 인생도 파멸시킨다. 이 욕망은 '7년의 밤', '28', '종의 기원', 그리고 '완전한 행복'을 통해서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성취적 욕망은 자유의지를 획득하고 성취해 가는 어려움 속에서 삶의 가치를 찾아가는 과정에 담았는데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 '내 심장을 쏴라', 진이,지니, 그리고 이제 이 소설까지 4대4로 균형을 맞춘 셈이다. 파괴적 욕망을 그린 4편은 '무서운 언니'가 쓴 것이고, 성취적 욕망 4편은 '다정한 그녀'가 쓴 거다. 둘이 팽팽한 힘겨루기를 해왔는데, 호러 스릴러가 될 다음 편은 다시 무서운 언니가 나설 것 같다."

 

▲ 정유정은 "운명적인 사랑보다 일상의 사랑을 그려내는 게 더 힘들었다"고 말한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무섭고 다정한 언니들도 진화하지 않나.
"그랬으면 좋겠다. 작가로서 궁극적인 꿈은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고 힘도 있는, 그러면서 미학적인 아름다움이 깃든 작품을 쓰는 것이다. 이번 소설이 그러한 꿈에 한 발짝 다가섰다면 좋겠다. 이번에는 '무서운 언니'에 지친 독자들이 '다정한 그녀'를 만나서 좀 즐거웠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물론 독자가 원하는 대로 쓸 수는 없다. 내가 쓰고 싶은 걸 써야 하지만, 최대한 독자가 재미나게 읽을 수 있도록 쓰는 그런 노력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정유정은 '과학은 후진이 불가능'해서 결국 인간은 '롤라'의 세계에 도착할지도 모르지만, 이야기가 있어야만 살 수 있는 인간들의 근본은 여전할 것이라고 믿는다. 소설 말미에 새롭게 업로드된 인물이 극장 설계자 해상에게 면담을 요청한다. 다음 소설에서 만날 인물이다. 설계자 정유정의 말.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은, 개별적 존재로서의 나는 내 삶의 실행자인 나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모쪼록 기억해주시기를. 우리의 유전자에 태초의 야성이 숨 쉬고 있다는 것을. 그것이 우리 삶의 소중한 무기라는 것을.'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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