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꽂이] 소설가와 시인들이 넘나드는 경계의 '치정'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 2025-12-08 13:37:00

'CROSS' 시리즈 '시인의 소설'과 '소설가의 시'
형식의 경계를 오가며 문학의 저항정신 탐색
"살아 보니 시가, 소설이 아닌 순간이 없었다"

소설가들이 시를 쓰고, 시인이 소설을 써서 단행본 두 권에 담았다. 잉걸북스가 기획한 'CROSS' 시리즈 '시인의 소설'과 '소설가의 시'가 그것인데, 경계를 넘나드는 글쓰기가 흥미롭다.  

 

▲'CROSS' 시리즈에 참여한 소설가와 시인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전경린, 김이듬, 강정, 박정대, 서하진, 한창훈. [잉걸북스 제공]

 

쉽게 곰팡이 피는 내일의 세탁 거리가/ 뒤 베란다 바구니 속에서 치정처럼 얽힌다./ 잠 속에서 너는 눈꺼풀에 잔뜩 힘을 주어/ 오래된 치정들을 끊어 낸다. 어둑새벽에/ 서랍이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낀다. _ 전경린,'사물이 우는 방식' 부분


소설가 전경린은 낡은 냉장고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을 보고 베란다 세탁바구니에 얽혀 있는 곰팡이 피는 세탁거리에서 치정을 떠올린다. 그는 "시가 완성되기까지 몇 번이고 깎고 자르고 끼워 맞추며 다른 현재를 드나든다"면서 "마치 목공 일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고 시작노트에 썼다.

그물 올리는데 배고픕니다 소주 마십니다/ 힘에 부칩니다 소주 마십니다/ 창고 정리 시작하자 잠 쏟아집니다 마십니다/ 다칩니다 소주로 씻어 내고 소주 마십니다/ 선장이 지랄합니다 소주 마십니다 선장 저도 마십니다 _ 한창훈, '뱃사람' 부분

마시고 또 마시는 노동 사이의 일상이 비 내리는 바다에 비애처럼 쏟아진다. 소설가 한창훈은 "시인은 세상 읽어 내는 렌즈로 자신을 사용하고 있어서 그들의 더듬이는 중간에 휘어서 스스로를 향해 뻗어 있고 소설가 더듬이는 바깥을 향해 나 있었다"면서 "그런 이유로 소설에서 나 자신에 대해서는 도통 쓰지 않았는데 이 짓을 해보니(소설가가 쓰니까 짓이다) 역시나 내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 그게 다 이유가 있었구나 싶어지기도 한다"고 썼다.

이들 외에도 소설가 권재이, 김도언, 김태용, 문형렬, 서하진, 은미희, 이만교, 이명랑 등 10명이 시 쓰기에 참여했다. 권재이는 "소설가가 긴 문장을 고심할 때, 시인은 한두 줄로 끝내버리는 것이 부러웠다"고 고백하며 시를 자신의 '불안의 압력밥솥'으로 사용한다. 김도언은 "시는 불안을 삼킨다"는 명제를 발견하며, 서사로는 온전히 담지 못한 잔향을 시로 끌어올린다.

문형렬은 자신을 '두 개의 혹을 멘 쌍봉낙타'라고 여기며, 소설과 시 사이에서 언어가 터져 나오는 순간을 기록한다. 서하진은 노모와 자녀와 세 자매는 물론 동네 사람까지 애잔하게 들여다보면서 평범한 일상을 시로 길어올린다. 이명랑은 "시의 첫사랑이 끝나지 않았다"고 고백하며 다시 시 앞에 선다. 은미희는 "살아 보니 시가 아닌 순간이 없었다"면서 "이별 뒤의 극심한 통증도, 기쁨 뒤에 찾아오는 살 떨리는 쾌감도 모두 한 편의 시였다"고 고백한다. 

시인들이 쓰는 소설은 몽환적이고 장편의 산문시처럼 읽힌다. 강정, 김이듬, 박정대, 이승하, 전윤호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환상과 현실, 상처와 생존의 경계를 흔든다. 강정의 '유나'는 '기억할 수 없으나 잊을 수도 없는 존재'에 대한 탐색을 통해 존재의 실체가 얼마나 허약한지, 그리고 언어가 어떻게 인간의 인식을 흔들어 놓는지 시적 감각으로 포착한다.

김이듬의 '불과 비'는 트라우마와 사회적 압박 속에서 생존의 윤리를 다시 묻는다. 박정대의 '눈의 이름, 1644년 파리 무용총서'는 가장 '시적'인 실험이다. 문장은 쉼표만으로 이어지고 마침표는 없다. 장시와 소설의 경계가 하나의 리듬으로 합쳐진 듯하다. 이승하의 '카지노의 별과 달'은 욕망과 윤리의 대칭 구조를 드러낸다. 전윤호의 '창귀'는 트라우마가 언어에 남긴 흔적을 추적한다.

잉걸북스가 이 시리즈에 부여하는 의미는 '저항의 문학'이다. "시 쓰는 이가 소설에 도전해보고 소설을 쓰는 이가 시에도 도전해보는 것이 저항의 문학"이라는 것인데, 소설 속에서 시를 느끼고 압축된 시행에서 긴 꿈을 꾸는 체험을 제공한다. 전경린이 압축하는 짧고 긴 서사.

육체여 잘 가./ 매듭처럼 풀어지던 쾌락의 천 갈래 기관도 잘 가./ 눈물과 웃음은 인과를 갖지만/ 난 우연히 울거나 웃어/ …나는 끝내/ 너를 암매장한 주소를 자백하지 않았다. _'노랑 레몬' 부분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 KPI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WEEKLY H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