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전훈의 '세자매'…체홉 연극의 진수를 보다

이성봉

| 2019-09-16 11:16:12

9월 6일~10월 20일 안똔체홉극장
2005년 동아연극상 작품상·연출상 수상작

대학로에서 한참 벗어나 성균관대 쪽으로 가다보면 성대 사거리 안쪽 골목에 '안똔 체홉극장'이란 소극장이 자리하고 있다. 이 극장은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게 레퍼토리 시스템으로 한 시즌을 운영하고 있는 곳이다. 이름에 걸맞게 체홉의 주요 작품들을 레퍼토리로 올리고 있다.


▲ 안똔 체홉극장에서 공연중인 '세자매'. 개성 넘치는 인물들의 디테일한 연기가 돋보인다. [애플씨어터 제공]

체홉 연극의 본토인 러시아에서조차 체홉 작품만을 올리는 극장이 전무하다. 모스크바에서 6600킬로미터 떨어진 서울에 이런 극장이 있다는 것은 놀랄만한 사건이다. 올해 이 극장에 체홉의 4대 장막인 '차이카(갈매기)', '바냐삼촌', '벚꽃동산'이 공연됐고, 현재 4대 장막 마지막 작품으로 '세자매'가 공연 중이다. 2014년부터 '검은 옷의 수도사', '숲귀신', '잉여인간 이바노프', '파더레스' 등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체홉의 숨겨진 4대 장막 등도 공연했다.

체홉 공연 전문 극장이라는 이 극장의 중심에 애플씨어터 전훈 대표가 있다. 그는 극단 대표이자 연출자로 2004년 '체홉 4대 장막전'과 2014년 '체홉 숨겨진 4대 장막전' 등 15여 년간 해 온 체홉에 관한 번역, 연출을 도맡아 왔다. 그가 대표로 있는 애플씨어터를 중심으로 2014년부터 시작된 전용극장의 운영은 한국연극계 큰 울림을 주는 사건이라 할 만하다. 그는 서울예술대학 등에서 제자를 가르치기도 했고 뮤지컬과 연출·극작분야에서 명성을 얻기도 했지만 체홉 연극을 제쳐두고 그를 설명하기란 어렵다. 그는 극장과 함께 안똔체홉학회도 운영하고 있다. 


▲ 안똔 체홉 극장의 19/20 시즌 프로그램 및 시즌권 [애플씨어터 제공]

전훈 연출의 체홉 연극 '세자매'(부제 : 멜로와 필로소피의 오묘한 조화)는 4대 장막전의 마지막 퍼즐이자 체홉이 가지고 있는 인생철학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세자매'의 인생과 철학에 대한 논쟁은 체홉의 삶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보여준다.

극단 애플씨어터는 러시아 1세대 유학파 전훈이 2000년에 창단한 단체로 하이퍼 리얼리즘(극사실주의極寫實主義) 연극을 위주로 스따니슬랍스끼 메소드에 의한 연기스타일을 바탕으로 한 작품을 공연하고 있다.

극단은 2014년 '검은 옷의 수도사', '숲귀신', '잉여인간 이바노프', '파더레스' 등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체홉의 숨겨진 4대 장막으로 안똔체홉극장의 시작을 알렸고, 2015년부터는 '여름체홉축전'을 기획하고 '안똔체홉극장'을 오픈해 '챠이카(갈매기)', '아마데우스', '말괄량이 길들이기', '바냐삼촌' 등을 레퍼토리화해 보여줬다.


▲ 극중 맏언니 올가로 출연하는 남명지(연기자, 경성대교수). [애플씨어터 제공] 

전훈이 보여주는 연극 '세자매'는 다양한 인생을 고스란히 무대에 올려놓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인물 하나하나를 현실감 있게 묘사하고 우리 삶에서 느낄 수 있는 인간의 심리를 잘 표현하고 있다.

이번 레퍼토리는 러시아 사실주의 거장 안똔 체홉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전훈 연출은 이 작품으로 2005년 41회 동아연극상 연출상, 작품상을 수상한 바 있다. 체홉 서거 100주년이었던 2004년에는 국립극장, 정동극장, 이해랑 예술극장 등에서 그의 연출 작품이 올려지기도 했다. 체홉 연출가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인 셈이다.

다소 길다고 할 수 있는 2시간 40분짜리의 이 소극장 연극이 전혀 지루하지 않다는 느낌을 줄 뿐 아니라 재미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연출의 말을 빌면 "체홉의 4대 장막은 실은 지루한 작품이 아니다"라 한다. 그 이유로 "사실주의 작품의 가장 중요한 '구어체 번역'을 여태껏 한국에 한 번도 시도한 적도 없었고, 대사에 드러나지 않은 부분을 정말 드러내지 않고 연기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사실 그가 번역한 체홉의 희곡은 대화체라 술술 읽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대사에 드러나지 않은 등장인물의 속마음에 대한 극적 표출이 긴장감을 주기 충분하다.

그것에 더해 전훈 연출은 배우들에게 생명을 불어 넣는 역할을 충실히 한다. 지시된 각본에 의해 움직이던 연기자들에게 자율성을 부여해 마치 필드에서 감독의 작전대로만 움직이는 선수가 아닌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이는 선수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런 연기법의 실행으로 무대에서 진실을 찾는 연기자들에게 큰 호응을 받고 있다. 연출가로서 그는 연극은 배우예술이라는 본질을 잘 실행하고 있는 셈이다.

'세자매'는 러시아 모스크바예술극장 초연 이래 현재까지 세계에서 중요한 공연 작품으로 꼽히고 있을 만큼 안똔 체홉의 작품 중 현재까지 가장 인정받고 있는 작품이다. 이 연극은 희곡에서 느낄 수 있는 시정과 철학 그리고 멜로를 통해 관객의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해 국내뿐만 아니라 러시아를 비롯해 세계 각지에서 사랑 받고 있는 레파토리이자 체홉의 예술세계를 새롭게 조망하고 해석해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전훈의 연출이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연출해 온 러시아 연극 대가의 연출을 비롯해 무수한 체홉 작품 연출가들과 무엇이 다를까 하는 의문은 연극을 통해 풀린다. 무엇보다 텍스트만으로 표현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무대에서 잘 표현해 내고 있다. 오랫동안 체홉 작품들을 보고·듣고·배우고·번역해 왔을 뿐 아니라 현지에서 러시아인의 삶과 풍습, 수많은 러시아 작품을 통해 그들이 표현하고자 했던 연기를 우리 무대에서는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고민한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 둘째 딸 마샤역을 맡은 이음. [애플씨어터 제공]

세자매의 맏언니 올가역에는 연기자이자 교육자로서 체홉 연극과 스따니슬랍스끼 메소드에 의한 연기스타일에 강한 의지를 갖고 있는 러시아 유학파 출신 남명지 교수(경성대 연극과)가 맡아 극의 중심을 잡아준다. 둘째 딸 마샤역에 이음은 감정의 폭이 큰 둘째 역을 맡아 현실과 이상 사이의 방황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지루한 일상에서부터 행복이 찾기도 하고 또 잠시나마 자신의 삶을 지탱하던 것들이 무너지는 모습을 현실감 있게 보여준다. 막내 이리나역에 안나영이 맡았다.

세자매가 사는 삶은 희망적이지도 않고 현실은 암울하기만 하다. 그들이 보여 주는 삶의 모습은 딱 우리들의 삶의 모습 그대로라 할 만하다. 삶이 암울하지만 어쩔 수 없이 현실을 떨치고 나가야 하는 모습도 그대로다. 연기자들이 감정의 선을 넘나들며 극을 긴장감 있게 이끌고 있다는 점도 이 작품이 템포감 있는 작품임을 방증한다.


▲ 막내 이리나역에 안나영. [애플씨어터 제공]


이 연극을 보고 있노라면 극중 연기에 임하는 주인공 세자매 뿐 아니라 각 인물들이 보여주는 연기의 디테일이 살아 있어, 때론 작은 배역의 인물의 행동에 더 눈길이 가기도 한다. 장교역인 베르쉬닌 중령역에 정의갑, 뚜젠바흐 중위역으로 장정인, 살료늬 대위역에 최세용 등이 출연한다.

전훈 연출은 매 공연마다 공연을 직접 보고 출연 배우를 평하며 배우들에게 자극을 주고 있다. "다른 누구와의 비교가 아닌, 자신의 연기가 얼마나 많이 발전하고 있나?"는 질문을 통해 배우가 얼마나 성장하는지 보고자 한다는 말을 남겼다. 예매 인터파크, 화-금 7시30분, 토·일·공휴일 4시


KPI뉴스 / 이성봉 기자 sblee@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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