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마지막 한 발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 2023-06-07 10:24:45
홍범도와 주변 사람들 새롭게 담아 장편 '범도' 펴낸 방현석
'내가 아닌 그들의 이야기'를 그려달라는 홍범도 바람 실천
낡은 가치 허물고 새 시대 향해 걸어간 이들의 도전과 사랑
바람처럼 살다간 이들의 '전설'과 뼈아픈 독립전쟁의 이면

포수로 살다가 태백준령과 연해주, 만주를 누비며 대한독립군총사령관으로 일제를 응징해 전설로 남은 홍범도(1868~1943) 장군. 전장에서 죽고 싶었던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말년에 극장 수위로 살다가 생을 마쳤지만, 그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낡은 틀을 깨고 새 가치를 찾아나서는, 봉건에서 현대로 나아오는 시대의 궤적을 제대로 그릴 수 있다고 소설가 방현석은 말한다. 두툼한 2권짜리 소설 '범도'(문학동네)가 그 결실이다.

▲13년 동안 매달린 장편 '범도'를 펴낸 소설가 방현석. 그는 "소설에 등장하는 이들과 수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썼다"면서 "이렇게 행복하게 소설을 쓴 건 처음"이라고 말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중앙아시아 크질오르다 시내 고려극장 창고를 지키는 늙고 남루한 수위를 알아본 극작가가 그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들어 무대에 올렸다. 소감을 묻는 이들에게 홍범도는 "내 이야기 말고 그들의 이야기를 무대에 올려주시오"라고 부탁했다고 방현석은 썼다. 홍범도를 다룬 작품들은 문학은 물론 영화까지 이미 여럿 나와 있지만, 방현석이 13년간 새롭게 매달려온 배경이다.

만주와 중앙아시아 현장 답사는 물론 많은 자료를 탐독하며 공부를 하다가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3년여에 걸쳐 매주 200자 원고지 50장씩 5200장 가까이 썼다 엎기를 반복했다. 최종 4100장으로 줄여 펴낸 '범도'는 홍범도의 삶을 따라가며 그와 함께 싸웠던 이들을 새로운 전설로 이끄는 과정이 중심축이다. 독립군들을 모신 동작동 현충원에서 방현석을 만났다.

ㅡ그 시절 만주 연해주 사람들에게 특별히 관심이 쏠린 배경은?
"관심과 애정과 감동이 느껴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는 게 내 소설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아닌 이야기는 써본 적이 별로 없다. 그 시절 사람들은 정말 바람같이 살다가 바람같이 사라져버렸는데, 누군가 기억으로 보살펴야 하지 않을까. 스스로 기록이나 역사가 되려고도 하지 않았고, 그걸 남기려고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그냥 바람처럼 살다가 간 거다. 이 사람들 얘기를 나라도 해보자고 시작한 것이 관심의 출발점이었는데 참 어려웠다. 쓰다가 몇 번을 엎었다. 그러다가 홍범도를 중심으로 쓰게 됐다. 몇 사람을 추적해보면 다 홍범도를 만나게 되는데, 홍범도를 중심으로 보면 전체가 다 보이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ㅡ지금까지 나온 여러 홍범도 이야기들과 '범도'는 어떻게 다른가?
"홍범도를 통해 한 시대의 가치가 어떻게 새롭게 출현하고, 그 가치가 어떻게 낡은 가치를 돌파하면서 자신의 길을 가는지를 알고 싶었다. 홍범도는 이 소설의 주인공이면서 주인공이 아니다. 여러 주인공 중 하나인 동시에 관찰자다. 우리가 봉건시대를 지나서 현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대응했을까, 그 시간을 통과해 우리는 어떻게 현대인이 됐을까. 가장 낮은 밑바닥에서 살았던 인물을 중심으로 다른 신분과 계급으로 살았던 사람들을 아우르다 보면 현대가 어떻게 출현했는지를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봉건계급 사회에서 현대사회로 이행하는 과정들을 홍범도를 중심으로 기술한 주변 인물들에서 가장 잘 볼 수 있고 생생하게 그 숨결들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포수들이 연합한 항일연합포연대의 총대장 임창근에게 홍범도는 자신들은 뒤로 빠지고 젊은 대원들을 내세워 하세가와 부대를 격파한 전설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젊은 '진포'를 내세우는데다 그가 여성임이 드러나자 싫은 내색을 보인 대원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홍범도가 대장과 나누는 대화.

-진포와 현창하, 안국환이 전설입니다. 일격필살의 여성 저격수이자 작전참모 진포, 열여섯 살의 청년저격대장 현창하, 하루에 백 개의 적정을 탐지하는 도주 안국환, 이들은 지금까지 어느 전쟁에서도 보지 못한 영웅이었어요. 제가 삼수성 점령 작전을 통해 얻고 싶은 것은 왜놈들의 모가지도, 총기도, 식량도 아닙니다. 저는 일본 육군의 신화가 된 하세가와의 직할부대를 이긴 진포와 현창하, 안국환의 이름을 양반들이 말과 글로 깎아내릴 수도, 고쳐 쓸 수도, 지워버릴 수도 없는 전설로 만들고 싶습니다.
-젊은 그 애들을 전설로 만들어 하세가와의 신화를 무너뜨리고 우린 죽자, 이 소리지?

ㅡ'범도'를 집필한 기본 방향이 이들의 대화에 함축돼 있는 것 같다.
"우리 역사에서 신화라고 하는 것들은 주로 지배계급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본다. 자기 권력과 그 체제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들이 신화가 되었다는 생각이다. 대중이 자신들의 불행한 삶을 구원해내기 위해서 스스로 희망을 만들어낸 것들이 전설이다. 그런 대중의 희망이었던 사람들, 대중의 희망이 된 사람들,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우리 역사가 사실은 지워버린 셈이다. 당당한 대한독립 전쟁의 역사가 있는데, 그런 전쟁의 역사가 없었던 것처럼 외면하고 지워버린 사람들을 이야기로 복원시켜서 전설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이 소설을 쓰면서 내내 했다."

▲동작동 현충원 독립군무명용사를 기리는 탑 아래 선 방현석.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방현석의 '범도'에는 실제 인물들과 그가 만들어낸 캐릭터들이 절반쯤 혼재한다. 기본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되 당대 이들의 싸움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객관적으로 드러내면서 그 의미를 지금의 관점에서 곱씹어보게 만드는 배경이다. 이중에서도 홍범도가 포수 생활을 그만두고 군대에 들어가 만난 백무현의 여동생 백무아가 상징적이다. 백무아의 지적에 범도는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전쟁을 벌여야 할 상대인 일본이란 나라는 있었지만 정작 그 일본과 전쟁을 할 주체인 우리나라가 없다는 사실을 나는 생각지도 못했다. 대한제국으로 이름을 바꾼 조선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의 주체로 나서기는커녕 일본을 상대로 싸우는 우리를 '적'으로 규정했다.

ㅡ왕은 국권을 넘기고 관군을 동원해 의병을 제압하라고 명하고, 유림 출신 의병 대장은 싸우다 말고 부친이 사망하자 삼년상을 치르러 내려가는 어처구니없는 상황들이 나온다. 범도를 포함한 이들은 누구를 위해 싸운 건가?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 사회의 기득권을 가장 많이 누린 자들이 가장 무책임하고, 그 사회에서 핍박받고 누린 것 없는 자들이 그 사회에서 마지막 책임을 다 한다. 홍범도의 삶 자체도 그런 아이러니의 연장선상에 있다. 짐승을 잡지 않으려고 포수의 길을 버리고 산에서 내려가 군대에 들어갔다가 많은 사람을 죽이는 전장에서 젊은 시절을 다 보내고 가장 오래 피비린내 나는 독립전쟁을 수행했다."

▲방현석은 "홍범도와 그 주변 인물들을 보면 낡은 가치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시대를 향해 나아간 이들의 궤적이 보인다"고 말한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ㅡ항일독립전쟁의 큰 성과로 거론되는 봉오동 전투를 두고 '우리는 봉오동을 바쳐 봉오동에서 이겼다'고 썼다. 간과하기 쉬운 독립전쟁 과정의 뼈아픈 희생이 생생하다.
"사람들은 봉오동 전투를 두고 깊은 산 속에서 싸워서 한번 크게 이긴 걸로 생각하지만 그거야말로 우리 독립전쟁사의 본질적 성격을 굉장히 잘 드러낸다. 그것은 연합정신이다. 당시 최진동 형제는 부산 땅 7배를 가지고 있던 엄청난 부자였다. 그들이 자기 땅을 내놓고 재산을 털어서 병사들을 먹이고 재우고 입히고 무장시켰다. 당시에 가족 한 명 입에 풀칠하는 것만도 큰 과제였는데 2000명에 이르는 이들을 매일 세끼 먹였던 거다. 지금도 그곳에 가면 소가 돌리던 거대한 맷돌이 남아 있다. 봉오동은 유토피아 같은 공간이었다. 한 번 이긴다고 해도 그 후과는 피할 수 없는데 그걸 다 감수한 거다. 세 그룹, 지배계급인 지주와 홍범도의 독립군 부대와 주민들이 자기들이 가진 걸 다 내놓았다. 홍범도는 사령관이라는 직책을 내려놓았고, 주민들은 삶터를 전쟁터로 내놓았다. 단 한 번의 승리를 위해서 자기들이 가진 모든 걸 내놓은 거다. 터전을 잃은 것은 물론 일본군의 보복 학살까지 이어진 봉오동의 승리는 영광스럽지만 참담한 궤멸이기도 한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 대단했던 것은 가장 많이 싸우고 가장 크게 이겼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승리 앞에서 오만했던 적이 없고, 패배 속에서도 비굴했던 적이 없었다. 그가 진정으로 대단했던 것은 순정함이었다. 헌신은 무한했으나 바란 대가는 전무했다. 그는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을 오직 사람으로 대했다. 노선과 이념, 계급으로 사람을 가르고 상대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ㅡ어려운 여건에서 독립전쟁을 하는 와중에도 먹물들은 출신 지역과 노선에 따라 지루하게 싸움을 벌인다. 작가의 말에도 언급한 주인공의 저 캐릭터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사실 주요하게 관심을 가졌던 것 중 하나가 우리 문학에서 자연이 다 사라져버렸다는 점이다. 이 소설에서는 나무 숲 산 새 짐승, 이것들을 최대한 복원시켜놓으려고 노력했다. 눈여겨보면 알겠지만 요즘 우리 문학에 자연이 없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로 자연의 질서 속에 살고 있다는 걸 체감하기 어렵다. 너무나 인간 중심이다. 인간의 질서 속에 사는 농부들과 달리 포수는 짐승의 질서 속에서 산다. 짐승들은 자기가 필요한 것 이상을 가지려고 하거나 소유하려고 안 한다. 포수는 짐승의 질서 속에서 산이 자신한테 준 몫 이상을 탐하지 않는다. 홍범도의 본질적 성격은 그래서 포수인 것이다. 짐승의 질서, 곧 자연의 질서 앞에 그걸 거스르려고 한 번도 하지 않은 인간이다. 스승이었던 신포수가 '짐승을 잡아서 살았으니 나는 이제 죽어서 짐승의 밥이 되는 게 마땅하다'고 말한다. 홍범도도 자연의 질서 속에서 살다가 자연의 질서 속으로 사라지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많은 부분을 쳐내면서도 곳곳에서 인간들이 어떻게 자연의 질서로 어울려 사는지 살려놓으려고 꽤 노력을 했다."

▲지청천 광복군 총사령관 묘역을 찾은 방현석. 그는 "친일파 장군 묘역 아래 모욕감을 견디기 어려웠다"고 썼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짦은 장으로 나누어 빠른 속도로 전개하는 2권짜리 벽돌책은 수월하게 읽힌다. '바람처럼 살다 간' 많은 이들이 '전설'로 등장하는 힘찬 전개에 자주 숙연해진다. 방현석은 "호흡이 늘어지지 않게 최대한 역동적으로 구성했다"면서 "거룩한 의미 이전에 재미있게 쓰려고 했다"고 말했다. 현충원 대한독립군 무명용사 묘역에서 길어올린 작가의 말.

싸우다 죽을 수 있는 자리, 그가 원했던 자리는 그 하나가 유일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아니어서 대전과 동작동에서 모욕감을 견디기 어려웠다. 백 년 전, 그와 백무아가 억압과 차별, 불의를 향해 발사한 마지막 한 발의 탄환은 아직 탄착점에 도착하지 않았다. 일격필살의 저격수였던 그들의 탄환은 빗나간 적이 없으므로 반드시 표적의 정중앙을 관통할 것이다.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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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조용호 / 문화부 문학전문기자

소설가, 문학전문기자. 일간지에서 30년 가까이 주로 문학전문기자로 일함. 1998년 '세계의문학'에 단편소설 발표. 소설집 '떠다니네' '왈릴리 고양이나무' '베니스로 가는 마지막 열차', 장편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 '기타여 네가 말해다오', 산문집 '꽃에게 길을 묻다' '키스는 키스 한숨은 한숨' '여기가 끝이라면' '시인에게 길을 묻다' '노래, 사랑에 빠진 그대에게' '돈키호테를 위한 변명' 등. 한무숙문학상, 통영 김용익문학상, 무영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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