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명이나 설명은 필요치 않아...일련번호면 족해
뺄셈의 예술 지론, 모두 빼면 시대를 관통하는 본질만 남아
경기도 양평IC에서 내려 한참 내달리자 멀리 산등성이에 터를 잡은 이재효 갤러리가 눈에 들어왔다. 이곳은 그의 공방이자 상설 전시관이다. 5개의 전시관, 커피숍, 공방들로 이뤄진, 말하자면 그의 성이다.
조각가 이재효는 작업하러 양평에 왔던 것이 인연이 돼 아예 이곳에 눌러앉았다. 전시공간이 나뉘어 있지만 사실 내외 모든 공간은 그의 전시장이자 작품들이다.
"요즘엔 작품을 많이 하지 않아요"라고 했지만 그의 성 이곳저곳은 매일 매일 그의 손길이 스치며 새로운 작품과 소품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그의 작품 소재는 크게 나무, 철, 돌들로 나뉜다. 하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해석이고 작가는 그저 주변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작품을 만든다. "공산품을 안 쓰려고 했다. 있는 것만 쓰다 보니 그렇게 됐다"는 설명이다.
그의 작품들은 사물들이다. 어린 시절 친구 집 천정에 매달린 구(球)형이나 7세 때 엄마 따라간 부산의 한 화장실에서 본 청소 도구의 아련한 기억들이 그의 작품으로 구체화했다. "많은 것을 기억하긴 어렵지만 사물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며 그가 사물에 애착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29일 찾은 그의 전시관마다 다양한 소재나 작품들이 이어지는 관객을 맞고 있었다. 묘한 점은 작품마다 제목이 없다는 것이다. 설명글도 딱히 찾을 수 없었다. "예술 작품에 말이 너무 많은 것은 좋지 않다. 사실 (모든 분야에서) 너무 많은 스토리를 만드는 경향이 있다. 있는 그대로 보게 하는 것이 사실 중요하다"고, 그는 말했다.

서양은 스스로 드러내길 좋아하고 동양은 알아주길 바라는 문화 차이가 있는데 작품에도 이런 문화적 경향이 반영된다. 그래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작품에는 이름과 많든 적든 설명글이 따라붙는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그는 "예술품은 보는 이가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 좋다"며 제목이나 과한 설명글이 그것을 제한할 수 있다는 지론을 폈다.
"제가 쓰는 공구의 숫자가 쓰는 단어보다 많아요. 작품을 이런 한정된 말로 표현하기도 힘들지만 그러면 작품은 말에 갇힐 수 있어요."
제목이 없으면 그 많은 작품은 어떻게 분류할까. 그는 "0000과 같이 일련번호를 매기면 족하죠"라며 웃었다. 그의 설명처럼 그의 작품들은 바코드의 숫자처럼 패턴화한 일련번호가 매겨져 있었다.
이런 그의 생각은 작업에도 여실히 반영된다. 그의 작업 방향은 '더하기보다는 뺄셈'에 가까웠다. 보통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에 무언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증폭하는 데 그는 반대의 길을 선택한 셈이다. "이것저것 다 빼다 보면 결국 형태로는 원만 남는다"는 설명이다.
그러고 보니 그의 작품 대부분은 구형을 닮아 있었다. 비록 다른 형태를 갖췄다 해도 본질은 동그라미와 연결돼 있었다. 이유를 묻자 "본질만 남으면 시간이 지나도 관객이 느끼는 것은 언제나 똑같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는 특히 유행을 경계한다. 꺼린다는 표현이 가깝다. "유행은 누군가를 따라 하는 데서 나온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공부하지 말고 스스로 생각하라고 한다. 답이 나올 때까지. 그러면 본질에 다가설 수 있다."
잠시 후, 이 작가는 "작가처럼 꾸미고 다니는 것도 사실 에너지 낭비다"며 말을 잇는다. 그래서인지 이 작가의 행색은 그저 동네 아저씨다. 모르는 이가 보면 공방에 자주 들리는 동네 아저씨로 보일 터다.
이런 아저씨를 보려 매일 공방을 찾는 사람들은 줄을 잇는다. 그를 알아본 이들은 가볍게 목례를 하며 서슴없이 다가선다. 인터뷰를 진행하던 이날 오후엔 십여 관람객이 여러 테이블을 둘러싼 채 일이 끝나길 기다렸다.
그의 성은 아마도 모든 작가가 꿈꾸는 이상향일 것이다. 종일 공방에서 작품에 매달리고 그런 작품을 보기 위해 전국 사방에서 삼삼오오 달려온 이들과 눈인사와 차를 나눌 수 있는 곳. 이곳은 고단했던 조각가 이재효에게 주어진 외롭던 날들의 보상이다.
그는 앞으로 외부에서 전시할 계획이 없다고 했다. 충분히 개인전을 치렀고 이제는 한자리에 자식들을 모아놨으니 족하다는 설명이다. 한 전시관엔 그의 드로잉 작품과 소품들이 꽉 차 있었다. 어림짐작으로 조각을 위한 밑그림이라 생각했지만 그는 "모든 작품은 머리 구상만 있으면 된다. 구태여 밑그림을 그리는 부산을 떨 필요는 없다. 드로잉은 나중에 소일거리로 그려본 것이다"고 했다.
그의 작품은 일짝이 해외에서도 알아봤다. 스위스 유명 호텔은 그의 작품을 소장하기 위해 먼 이국으로 그를 초청했고 그 때 설치된 그의 작품은 지금도 호텔 로비에서 세계 각국에서 온 이들에게 감흥을 주고 있다. 여러 해 지났지만 모처럼 들른 호텔에서 벨보이조차 그를 알아보며 환대해 준 추억은 유쾌한 기억이라고 했다.
이 작가의 최근 관심사는 그의 성을 시스템화하는 일이다. 사방에서 밀려드는 관객을 위해 갖춰야 할 것이 많다는 얘기다. 그는 난간 하나조차 직접 만들며 하루하루 성을 견고하게 꾸미고 있다. "작가는 사실 계획을 짤 수 있는 직업이 아니다. 다만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했다.
그의 작품들은 현재 양평 블룸비스타 호텔 로비와 지하에도 상설 전시되고 있다. 넘치는 작품 때문이다. 그는 소품도 제작하지만 대개 수 미터가 넘는 대형을 주로 제작한다. 드로잉 500여 점, 소품 150여 점, 대형작품 100여 점을 성안에 모두 가둘 수는 없는 일이다.
"현대미술은 마케팅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산속에 처박힌 작가정신만으로 온전히 작품세계를 펼칠 수 없다. 또 꾸준히 작품을 생산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꿈을 이룬 그지만 여전히 외부와의 소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의 성 아래채 1~2층엔 커피숍이 마련돼 있다. 2층에서 내려다본 눈 쌓인 시골 풍경은 또 하나의 장관이다. 벽면엔 줄에 매달린 수 천여 돌들이 위용을 자랑한다. 조각가 이재효는 오랜 시간 빼내고 털어내며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고수하고 있다.
벽에 매달린 수천여 돌은 그가 그동안 지새웠을 수많은 불면의 밤일지도 모른다.
KPI뉴스 / 제이슨 임 아트전문기자 jasonyim@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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