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밀가루 전쟁④] 콩·옥수수에 밀리자 개량품종으로 승부수 띄운 미국밀

특별취재팀 / 2022-10-26 10:16:30
병충해 강하고 생산량 20~30% 높아진 신품종 적극 개발
휴경률 50% 유지하면서 생산량 높여 세계 식량위기 대처
韓, 지난해 5번째 미국산 밀 많이 사…연백색밀 대량 매입

▲ 미 워싱턴주립대 서부 밀 품질 연구소에서 개발 중인 신품종 밀. [송창섭 기자]

미국 시애틀에서 국내선으로 갈아타고 동쪽으로 10분가량 날아갔을까. 발아래 거대한 평원이 펼쳐졌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모습은 거대한 체스판같았다. 네덜란드 추상화가 몬드리안 작품도 연상됐다. 지난 16일 미국 서북부 야키마 평원 풍경이다. 평원을 가득 메우고 있는 건 밀(소맥)이었다.

컬럼비아 강은 이곳 야키마 평원을 가로질러 유유히 흐른다. 캐나다 컬럼비아 호수에서 발원해 이름 붙여진 컬럼비아 강은 워싱턴 주 파스코, 케네위크, 리치랜드를 통칭하는 '트라이 시티즈(Tri-Cities)'에 와선 강폭이 넓어지면서 화물선이 지나갈 정도의 수로로 변한다. 워싱턴·오리건 주 경계도 컬럼비아 강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미 워싱턴 주 야키마 평원 [송창섭 기자]

미국 농업에서 컬럼비아 강은 중부 미시시피 강과 함께 핵심지로 꼽힌다. 태평양북서부(PNW) 지역에서 생산된 밀은 컬럼비아 강을 오가는 대형 바지선에 실려 워싱턴, 오리건에 모인다. 이곳은 멕시코만을 끼고 있는 텍사스·루이지애나 주와 함께 미국 농산물 수출의 양대 축을 이룬다.

지역→강변→항구 수출 터미널로 밀 대량 공급

미국 밀수출 시스템은 피라미드 구조다. 각 농가에서 수확된 밀은 트럭 또는 열차에 실려 중형급 저장소로 향한다. 대표적인 곳이 1980년 곡물메이저 ADM를 포함, 5개 사가 함께 세운 스포캔 곡물 운송회사 '하이 라인 그레인'이다. 회사 소유 30곳 저장소에 모인 밀은 화물열차 90~100개 칸에 담겨 북서부 수출항으로 떠난다.

▲ 지난 18일 미 워싱턴주 스포캔 외곽의 곡물 터미널 '하이 라인 그레인'. 길고 긴 곡물열차가 지나고 있다.  [송창섭 기자]

차를 타고 컬럼비아 강을 따라 달리다보면 긴 화물열차 행렬을 볼 수 있다. 대부분이 곡물열차다. 포틀랜드 항까지 오는 열차의 출발점은 중부 대도시 시카고와 남동부 도시 멤피스다. 그야말로 미 대륙을 쉬지 않고 달리는 셈이다.

바지선이 오가는 강변을 따라 대형 운송시설을 지은 것도 독특하다. 기차와 배에 실린 밀이 미국을 떠나기 전 최종적으로 모이는 곳은 대형 수출 터미널이다. 그런 점에서 수출 터미널을 누가 갖고 있느냐 공급시장에선 굉장히 중요하다. '곡물 ABCD'로 불리는 ADM, 벙기, 카길, 드레퓌스 4대 회사가 '곡물계 마피아'로 불리는 것도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 수출 터미널 상당수를 확보하고 있어서다.

美, 지난해 러시아·호주 이어 세계 세 번째로 많이 수출

농업분야에서도 미국은 강대국이다. 콩, 옥수수와 함께 '국제 3대 곡물'로 불리는 밀의 경우, 미국은 수출량 기준 세계 3위다. 미 농무부(USDA) 자료에 따르면, 2021~2022년 기준 미국 밀 수출량은 2178만 톤으로 러시아(3300만 톤), 호주(2750만 톤) 다음이다. 밀은 종류에 따라 초여름부터 가을 사이 파종, 이듬해 수확하기에 모든 통계가 해를 걸친다.

반대로 미국산 밀을 가장 많이 사들인 나라는 멕시코(376만 톤), 필리핀(279만 톤), 일본(235만 톤), 나이지리아(177만 톤), 한국(123만 톤) 순이었다.

▲ 미 워싱턴주 폴루스 평원. 끝도 없이 밀밭이 펼쳐진다. [송창섭 기자]

미국산 밀은 알갱이(원맥) 강도, 색, 파종시기로 구분된다. 크게 6가지 종류(Class)다. 강적색겨울밀(HRW·Hard Red Winter), 강적색봄밀(HRS·Hard Red Spring), 강백색밀(HW·Hard White)이 강력분으로 쓰인다면, 연적색겨울밀(SRW·Soft Red Winter), 연백색밀(SW·Soft White)은 박력분이다. 이탈리아로 많이 수출되는 듀럼(Durum)은 마카로니 등 파스타면에 많이 쓰인다. 이름에 붙는 겨울·봄밀은 파종 시기다. 봄밀은 4~5월, 겨울밀은 9~10월에 씨를 뿌린다.

6가지 종류 중에서 한국이 가장 많이 수입하는 종은 워싱턴·오리건·아이다호 주 3곳에서 미 전체 생산량의 90%를 책임진 연백색밀이다. 미 농무부 집계에 따르면, 2021~22년 한국(54만 톤)은 필리핀(100만 톤), 일본(62만 톤) 다음으로 미국산 연백색밀을 많이 수입했다.

밀가루, 단백질 성분 함유량에 따라 품종 구분

연백색밀은 단백질 함유량이 높지 않아 찰기는 떨어지지만 특유의 백색 가루에 고소한 풍미가 강해 과자, 케이크 제조에 많이 쓰인다. 라면 등 면류에는 호주산과 미국산이 혼합돼 쓰인다.

밀가루는 단백질(글루텐)이 많이 들어가 있느냐에 따라 식감을 좌우하는 찰기가 달라진다. 미국산 원맥은 기후와 품종이 이를 좌우한다. 미국이 오늘날 세계적인 밀 수출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은 기후와 품종에 따라 각기 다른 원맥 품질을 균등하게 맞출 수 있어서다.

▲ 미 전역에서 개발된 다양한 종류의 신품종 밀. 이렇게 개발된 종류별 개량품종만 600~700개 이른다. [송창섭 기자]

그런 미국도 요즘 고민이 많다. 단위 경작면적이 많이 줄었다. 기후 탓이 아니다. 밀농사를 짓지 않아서다. 2014년 이래 경작면적이 늘어난 연도는 2018~2019년, 2021~2022년 딱 두 번 뿐이었다. 하락세가 꾸준하다. 미국 농무부 10월 전망보고서에 따르면, 2022~2023년 예상 경작면적은 4572만 에이커(약 669억 평)로 동기대비 2.2%가량 줄어들 것으로 내다봤다. 왜 이럴까.

농부들 사료용 곡물과 사탕무 등 특용작물 재배 늘려

밀농사를 짓던 농부들이 다른 작물로 갈아타는 이유는 생산량 때문이다. 같은 면적의 땅에 옥수수나 콩 농사를 짓는 것이 밀보다 나아서다. 수수, 사탕무 등 특용 작물 재배가 늘어난 것도 달라진 모습이다. 이들 공통점은 하나같이 사료용이다.

스티브 워싱 미국소맥협회 서부지역 담당(부회장)은 "캔자스 등 중부에서 이런 현상이 뚜렷하다. 현지 농부들은 옥수수, 콩 등 사료용 농작물을 중국으로 수출하는 것이 수익성 측면에서 낫다고 판단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2022~2023년 경작량 추정치. [자료=미국 농무부]

통상 휴경률(休耕率)은 50%다. 격년제로 농사를 짓는다는 뜻이다. 휴경 면적을 줄이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지만 미국 농부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당장 생산량 향상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땅속에 있는 좋은 영양분을 매년 빼내 쓸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오리건 주 그래스밸리에서 4300에이커(약 416만 2000평) 규모 밀 농장을 운영하는 대런 패드젯은 "생산단가가 비싸진다고 해서 격년제 휴경 원칙을 깰 생각은 없다"고 강하게 말했다.

글로벌 식량위기는 미국 국내만 놓고 보면 먼 이야기다. 다른 나라에서처럼 밀가루 값이 올라 미국 내 물가가 오르는 일은 거의 없다. 고민스러운 것은 50%선인 휴경률을 유지하면서 지금의 수출량을 유지할 수 있느냐다. 농업 선진국 미국이 글로벌 식량위기 시대에 고민하는 대목이다.

주정부·연구기관 협력…600~700여 품종 개발

미국은 해법을 품종 개량에서 찾고 있다. 워싱턴주립대 내 개설된 '서부 밀 품질 연구소'는 미 농무부가 운영하는 연구기관이다. 이곳은 1907년 워싱턴 주정부와 대학이 함께 만들었다. 모든 연구기관이 그렇듯 이곳 역시 병충해에 강하고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높은 품종을 개발하는 것이 목표다.

스티브 머서 미국소맥협회 홍보담당 부회장은 "협회, 주 정부, 연방정부(농무부)가 품종 개량사업을 적극 지원해 종류당 100개가 넘는 개량 품종(Variety)을 개발했다"고 설명했다.

▲미 오리건 주 포틀랜드 시내를 가르는 월레밋 강변의 템코 수출 터미널. [송창섭 기자]

최근 개발한 연백색밀 개량종 '소크아이'와 '피라냐'가 대표적이다. 소크아이는 생산량이 기존 품종 대비 30% 가량 많다. 피라냐는 일선 농가에서 많이 써온 '노웨스트 듀엣' '노웨스트 탠덤' 보다 생산량이 20% 가량 많다. 둘 다 겨울철 유행병인 '눈 곰팡이'(Snow mold)에 대한 내성도 강하다.

애런 카터 워싱턴주립대 교수(작물 및 토양 과학부)는 "피라냐는 밀 병충해인 눈 곰팡이에 대한 내성이 기존 품종보다 30% 이상 강하며 곡물 생산량에 있어서도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고 설명했다. 종류당 개발된 개량종만 평균 100여개다. 6개 종류 전체로 놓고 보면 600~700여개다. 우리나라로 많이 수입되는 연백색밀의 경우 일리노이대(UI)가 개발된 UI 매직 CL플러스가 2021~2022년 시장점유율 50%를 넘어섰다.

실험실에서 개발된 품종은 연구소 해외사업 서비스팀에서 제분 후 빵, 과자, 라면 등으로 만들어 소비자 반응을 평가받는다. 이곳에서 일하는 알레시아 키조나스 박사는 "품종 품질을 평가하기 위해 총 25가지의 실험을 거쳐야 한다"면서 "밀은 식용이기에 생산량만 놓고 생각할 수 없고 맛도 중요한 평가기준"이라고 설명했다.

KPI뉴스 / 미국 워싱턴·오리건·아이다호 주=특별취재팀 송창섭·김해욱 기자 realsong@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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