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선 집단으로 상대 악마화해 버텨 인간은 모든 동물들 가운데 얼굴을 붉히는 유일한 종이다. 찰스 다윈은 이런 특성이 모든 인류에게 공통된 것인지 알고 싶어 친분이 있는 외국의 관련 인사 모두에게 편지를 보냈고, 다른 인종을 접촉하는 선교사, 상인, 식민지 관료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다. 물론 공통된 특성이라는 걸 확인했다.
그는 인간이 얼굴을 붉히는 특성은 "모든 표정 중에서 가장 특이하고 가장 인간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네덜란드 언론인 뤼트허르 브레흐만은 <휴먼카인드>라는 책에서 이 에피소드를 소개하면서 인간이 수치심을 느끼도록 진화한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천 년 동안 수치심은 지도자를 길들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효과적인 장치일 수 있다. 수치심은 규칙이나 규정, 비난이나 강압보다 더 효과적이다.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제어하기 때문이다…수치심에는 분명히 어두운 면(예를 들어 빈곤으로 인한 수치심)도 있지만 만약 수치심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회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보라. 지옥이 열릴 것이다."
이걸 어이하랴. 지옥으로 가는 모든 문이 다 열린 건 아니지만, 정치 등 일부 영역으로 향하는 문은 활짝 열리고 말았으니 말이다. 후안무치(厚顔無恥)는 낯이 두꺼워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뜻인데, 정치권에선 후안무치가 정치인의 경쟁력으로 대접받고 있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후안무치를 극한으로 밀어붙여 성공한 대표적 사례는 단연 미국 제45대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다.
트럼프의 전기를 쓴 그웬다 블래어는 트럼프의 평소 행동을 통해서 본 성공 요인 5가지를 제시했는데, 이 가운데 '뻔뻔해지는 것에 인색하지 마라' 등 4개가 후안무치와 관련이 있는 것들이다. 철학자 애런 제임스는 <또라이 트럼프>라는 책에서 철면피의 3대 자질을 제시하면서 트럼프는 이걸 모두 갖추었다고 주장했다.
"철면피는 대인관계에서 철저히 자기가 유리한 쪽으로 처신하면서, 자신에게 그럴 만한 권한과 자격이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다른 사람이 불만을 표해도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이다."
한국엔 트럼프와 같은 수준의 철면피 정치인은 없다. 다행이긴 하지만, 안심하기엔 이르다. 한국형 후안무치의 특성은 집단적으로 나타난다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주로 정당이 발군의 실력을 자랑한다. 공개적으로 국민을 대상으로 했던 약속을 달라진 상황에 따라 손쉽게 뒤집는 걸 상습적으로 하면서도 오히려 큰소리를 친다. '내로남불의 일상화'라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그렇게 후안무치해도 아무런 타격을 받지 않는다. 승자독식 당파싸움이 불러온 정치적 양극화 때문이다. 지지자들이 반대편 사람들을 증오하는 상황에선 우리편의 후안무치는 악덕이 아니라 오히려 미덕이 된다. 후안무치 실력이 뛰어난 정치인일수록 열화와 같은 지지를 받으며 스타 반열에 오른다. 이걸 본 다른 정치인들은 앞다투어 '누구 얼굴이 더 두껍나' 경쟁에 적극 참여하게 된다.
이런 '후안무치 정치'는 국민의 인성에 악영향을 미치지만, 나름의 대비책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모든 정치적 갈등을 선(善)과 악(惡)의 대결 구도로 몰아가면 간단히 해결된다. 악을 그대로 방치하는 건 정의가 아니다. 반드시 청산해야만 한다. 청산 대상을 악마화하면 청산 주체의 후안무치는 정의로운 미덕인 것처럼 여겨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일상으로 돌아가면 후안무치가 나쁘다는 정도의 분별력은 다시 살아난다. 그러니 너무 걱정할 건 없지만, 그런 선악 이분법에 장기간 중독된 사람은 인성마저 변하기 마련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정파적으로 양극화된 정치 체제 하에선 후안무치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후안무치한 권력을 제어할 수 있는 힘을 잃었다는 점이다. 결국 문제는 정파적 편가르기일 텐데, 도무지 답이 없다. 답답한 마음에 김승희 시집 <도미는 도마 위에서>를 읽다가 다음 대목에 밑줄을 그어 본다.
"시곗바늘은 12시부터 6시까지는 우파로 돌다가 6시부터 12시까지는 좌파로 돈다. 미친 사람 빼고 시계가 좌파라고, 우파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아무리 바빠도 벽에 걸린 시계 한번 보고 나서 말해라."(28쪽)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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