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나이란 없어요"…백석을 사랑한 늦깎이 시인 박미산의 외침

김지원 / 2020-12-11 12:08:06
54세에 등단, 문학소녀 꿈 이루고 도전 또 도전
"일흔 되면 해금 하나 들고 세계여행하며 버스킹"
4년전 문화인 아지트로 카페 '백석, 흰 당나귀' 열어
"인생 2막이라는 건 별거 아니에요. 저는 마흔 여덟 살에 대학원에 들어갔어요. 들어가면서 반드시 10년 안에 석·박사를 끝내겠다고 마음먹었죠."

중학생 때부터 간직했던 '문학의 꿈'을 40대부터 본격적으로 펼친 이가 있다. 박미산 시인이다. 그는 시 '너와집'으로 2008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했다. 당시 나이 54세였다. 그가 운영하는 카페 겸 식당이자 문화공간인 서울 종로구 누하동 '백석, 흰 당나귀'에서 그를 만났다. 인터뷰 내내 목소리는 차분했고 미소를 잃지 않았다.

▲ 박미산 시인이 10일 오후 서울 종로구 누하동 '백석, 흰 당나귀'에서 UPI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정병혁 기자]

 
박 시인은 늦깎이 문인이다. 8남매 중 다섯째. 고전소설을 탐독하고, 친구와 날마다 영화관을 찾던 '문학소녀'였다.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 갖가지 아르바이트를 하며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문학 공부를 갈망했지만 대학 진학은 경제적 부담이 컸다. 결혼은 일종의 돌파구였다. 행복했다. 하지만 반려자의 사업 실패와 시부모님의 병환이 찾아왔다. 마음이 힘들었다. 시를 썼다. 시는 그에게 위로 그 자체였다. 늘 마음에 간직한, 포기할 수 없는 지향점이었다. 

그는 'doer(행동하는 사람)'였다. 어려움 속에서도 생활비를 아껴 대학 문을 두드렸다. 시를 향해 한 발 나아갔다. 44세 나이에 방송통신대 국문학과에 입학했다. 중년의 나이에 대학생이 된 것이다. 무슨 소용이냐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 역시 '내가 이걸 한다고 해서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라고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다.

"방통대를 졸업하고 나서 '스스로 상을 줘야지'하고 인도여행을 한 달 다녀왔어요. 그야말로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바라나시 강가에 3일 내내 갔죠. 새벽부터 그곳에 앉아서 하염없이 바라봤어요. 한쪽에서는 갠지스강에서 성수를 하고 물을 받아가고, 다른 편에서는 죽은 사람이 태워지고 있었어요. 그 광경을 보며 '삶이 뭘까. 내 인생을 여기서 끝내나. 뭐를 해야 하지'라는 고민을 했습니다."

▲ 박미산 시인이 10일 오후 서울 종로구 누하동 '백석, 흰 당나귀'에서 시집을 보여주고 있다. [정병혁 기자]

박 시인은 주저앉지 않았다. 인도 여행에서 돌아온 후 사진전을 열었다. 사진이 다 팔렸다. 사진전을 통해 얻은 수입으로 대학원을 등록했다. 2002년 고려대 석사과정에, 2005년엔 동 대학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사람들이 제가 48살에 대학원을 간다고 하니까 다 미쳤다고 했어요. '너 10년 하면 58살인데 뭐에 써먹겠냐' 이런 말들을 했죠. 하지만 저는 공부에 한이 맺힌 사람이었어요. 공부하는 게 좋으니까 한다고 답했지요. 나는 철저하게 나를 위한 공부를 했어요."

대학원에 들어가니 모두가 97학번 젊은 친구들이었다. 박 시인은 그 젊은 친구들과 늘 같이 움직였다. 일주일에 한 번씩 시 합평회를 꼬박꼬박 했다. 처음에는 시를 쓰지 말라는 권고도 들었다. 글이 너무 산문적이라는 게 이유였다.

"그래도 나는 속으로 '두고 봐, 내가 너보다 시 잘 쓸 거야'라는 오기를 가졌습니다. 그렇게 합평회를 치열하게 했죠. 합평회에서 깨지면 술 한잔. 한 구절이 좋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기뻐서 술 한잔. 그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 치열한 과정을 거친 덕이었을까. 2008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본명 박명옥 대신 시인 박미산으로 다시 태어났다. 박 시인은 그때 굉장한 기쁨을 맛봤다. "아이들 출산한 일 다음으로 기쁜 일"이었단다. 같은 해 12월에 첫 시집 '루낭의 지도'를 발간했다. 그 해에만 48편을 발표했다. 매주 꼬박꼬박 성실히 시를 써온 바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후 바쁜 나날을 보냈다. 강의를 나가고, 창작 활동도 부지런히 했다. 2015년 서울지역의 문해 학습자들을 대상으로 치유인문학 강좌를 하는 마들여성학교(현 노원여성교육센터)에서 '시, 잠자는 나를 꺼내다'란 제목으로 5주간의 치유 시 쓰기 강좌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글을 막 배우는 사람들이 과연 시를 쓸 수 있을까, 생각도 했지만 곧 기우임을 깨달았다. 5주 과정이 끝나고, 시를 더 쓰고 싶다는 이가 넷이나 됐다. 그해 7월부터 대학로 스터디 모임 공간을 빌려 함께 시를 썼다. 그렇게 해당 강좌 수강생이었던 윤복녀, 이명옥, 김영숙, 유미숙과 함께 2016년 '시, 잠자는 나를 깨우다'란 시집을 발표했다. 2019년엔 '잠자는 나를 꺼내다2' 시리즈로 첫 에세이집이 나왔다. '늦깎이 시인, 날개를 달다'였다.

▲ 박미산 시인이 10일 오후 서울 종로구 누하동 '백석, 흰 당나귀에서 시집을 보여주고 있다. [정병혁 기자]

"이런 이야기도 들었어요. 한글을 모르는 분 중 한 분이 팔을 자르고 싶다고 한 적이 있어요. 동사무소나 은행에 가서 글을 써야 할 때면, 멀쩡한 사람이 이걸 못 써서 써달라고 하는 게 너무 부끄러우신 거예요. 근데 만약 팔이 없으면 '저 사람이 팔이 없어서 못 쓰겠구나' 하니까요. 그런 괴로움이 있던 거예요. 아직 곳곳에 그런 분들이 계세요. 그런 분들과 함께 글씨, 글을 쓰며 그분들을 살아나게, 제2 인생을 누리게 해드리고 싶어요. 저 역시 곱게만 자라고, 어려움을 거치지 않았다면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는 시인이 될 수 없었을 겁니다."

박 시인의 시가 가진 큰 특징 중 하나는 '시간'이 담겨있다는 점이다.

"제 시에는 시간의 흐름이 중요해요. 과거에서 현재로 오고, 미래로 가죠. 이후엔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고민해요. 저 역시 항상 '앞으로 10년 후의 내 모습은 어디로 가있을까'를 고민했어요. 10년 계획과 비전을 늘 세웠죠. 제가 대학원을 갈 때도 10년 후의 모습을 그렸고, 그렇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이제는 익숙해진, 은퇴 후 삶, 제2의 인생에 대한 고민. 이런 흐름이 있기 한참 전부터 이를 실천했던 박미산 시인이다. 그렇다면 그의 향후 계획은 뭘까.

"이제 나이가 더 들었기 때문에, 앞으로 계획을 5년 단위로 세워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저는 일흔 살이 되면 해금 하나를 들고 세계여행을 갈 생각이에요. 지금 해금을 배우고 있거든요. 해금은 '우리'의 것이고, 가지고 다니기 쉬우니 이동이 편리할 것 같아서요. 해금을 가지고 세계를 돌아다니며 '버스킹'(길거리 연주)을 할 거예요. 지금은 염색을 하지만 그때는 자연스럽게, 염색을 안 한 머리로요."

▲ 박미산 시인이 10일 오후 서울 종로구 누하동 '백석, 흰 당나귀'에서 UPI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정병혁 기자]

제2의 인생 계획을 막막해하는 이들에게 다정하고 따뜻한 말도 건넸다.

"이 시대는 얼마든지 또 다른 일을 할 수가 있어요. 나이 먹어서 뭐 할 게 없다고 말하는 분들이 굉장히 많아요.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아주 진부한 얘기지만, 결코 늦은 게 아니에요. 지금이 가장 빠른 거거든요. 저는 지금도 늘 꿈을 꾸고 있잖아요. 나이 듦에 대해서 저도 어떤 때에는 속상하기도 하고 내가 어느새 그렇게 나이 먹었나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최선을 다하자,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자, 그러면 되지 않을까요."

꿈만 꾸어선 안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행동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꿈만 꿔선 안 돼요. 행동해야죠. 뭘 배우고, 활동을 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선 건강이 필요해요. 사실 건강도 노력이에요. 저는 운동을 끊임없이 했어요. 택견도 10년 넘게 했고요(웃음). 결코 늦은 게 아니에요. 꿈을 갖되, 꿈만 꾸지 말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해요. 꿈이란 건, 꾸면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모든 건 결코 늦지 않았어요. 제가 58세에 박사학위를 받았잖아요. 다들 처음에는 '그렇게 해서 뭐해'라고 했지만, 그때 제가 했기에 지금의 제가 있는 거죠."

박 시인은 지금도 꿈과 밀착해있는 생활을 보낸다. 창작활동도 부지런히 하고, 한 일간지에서 시를 소개하는 코너도 맡고 있다. 해당 코너를 맡은 지 벌써 3년 8개월이 넘었다. 아침에 신문을 읽는 이들을 위해 '따뜻한 시'를 소개한다. 이름을 모두 알 만한 유명한 시인보다는 조금은 대중에게 덜 알려진 시인의 시를 가져온다.

"너무 유명한 분들을 소개하기보다는, 조금은 덜 알려진 시인 분들을 소개해서 그분들이 기분이 좋아지셨으면 해요. 저한테 있어서도 시가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시가 제게는 제 인생의 전부예요. 제가 시집을 낼 때마다 항상 그런 생각을 해요. 단 한 사람이라도 제게 독자가 생긴다면, 단 한 분이라도 제 시를 좋아해 주신다면 그걸로 성공한 거라는 생각이요."

▲ 박미산 시인이 10일 오후 서울 종로구 누하동 '백석, 흰 당나귀'에서 UPI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정병혁 기자]


인터뷰를 진행한 식당 겸 카페이자 문화공간인 '백석, 흰 당나귀'를 열게 된 이유도 들었다. 오픈한 지 4년 반이 넘었다. 

"과거 명동 시대에는 문화예술인이 명동 카페에서 노래도 만들고 예술을 향유했죠. 그처럼 서촌 시대를 만들어서 문화를 향유하는 이들의 공간을 만들고 싶었어요. 대학 강의를 가장 많이 할 때 카페를 시작했죠. 이를 통해 일반 대중들에게 인문학 강의를 할 수 있었고, 독자에게 아주 쉽고도 가깝게 다가갈 수 있었죠. 그게 보람이에요. 카페를 운영하며 연락이 끊겼던 옛날 친구들도 많이 만날 수 있었고요."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 '백석, 흰 당나귀'는 백석 시인에 대한 그의 애정이 담긴 작명이다. 그의 석사 학위 논문은 백석 시인에 관한 것이다. 부모님이 이북 출신이라서 백석의 시에 담긴 북방 정서가 맞았던 것 같단다. 가장 좋아하는 백석의 시는 '여승'이라고 했다.

"그 시 한 편에 모든 게 다 담겨 있어요. 당시 시대상이요. 1930년대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킬 때였는데, 한 여자의 일생에 우리 여성들의 일생이 담겨있는 거예요. 그 시 한 편으로 한 사람의 일생과 우리 시대, 일제의 발악 이런 걸 다 알 수 있죠. 그걸 소설로 풀어내려면 장편소설도 가능해요. 그만큼 시에 함축되어 다 담겨있는 거예요."

요즘은 코로나19로 운영이 어려워졌다. 코로나 사태로 오후 9시 영업을 종료해야 하니 월세 내기도 어려워졌다. 어쩔 수 없이 오후 6시에 열던 가게를 정오에 시작해 점심에 건면이 아니라 생면으로 만든 국수를 판매한다. 다행히 인기가 좋단다.

시를 쓰기 위해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뭘까. 박 시인은 '관찰력'이라고 했다. "같은 게 하나도 없어요. 시간도 다르고, 계절도 다르고 다 다르죠. 그 세밀한 관찰력이 굉장히 중요해요. 빛이라도 봄빛과 겨울빛은 달라요. 같은 날이라도 아침에 다르고, 오후에 다르죠. 그런 눈을 가져야 해요. 풀도 어제하고 오늘은 달라요. (창가 밖 나무를 가리키며) 저는 이 나무를 매일 봐요. 얘도 같아 보여도 어제하고 똑같지 않거든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어디선가 주워들은, 지구가 탄생한 이래 지금까지 날씨가 같았던 날이 한 번도 없었다는 말이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그는 "제가 근사한 말은 안 해요. 그냥 시가 제 갈 길이에요"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박 시인은 화려한 어휘를 쓰지 않았다. 단지 꿈을 계속 품고 결국 이를 향해 나아갔던 일, 꿈을 이루기 위해 꼭 필요했던 성실함과 실행력, 본인의 행복을 위한 결정과 스스로 주는 보상 등 말로만 들었던 모든 것들이 그의 삶 안에 있었다.

KPI뉴스 / 김지원 기자 kjw@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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