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역 선진국 부상하며 신세계 질서 재편
키신저 "세계 질서 영원히 바꿔 놓을 것" 9·11 이후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주도권을 놓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지난 20년간 미국이 경험한 건 끊임없는 전쟁과 불안감, 국제사회에서의 영향력 상실이었다. 테러와의 전쟁은 국수주의와 과도한 검문검색의 불편함을 남겼을 뿐이다.
9·11 테러가 미 본토에 대한 첫 공습이었다면, 두 번째는 코로나19 바이러스에 의한 것이다. 이번에도 미국은 너무나 어이 없는 패배를 맛보고 있다. 16일(현지시간) 현재 전 세계 확진자 1342만여 명 가운데 약 26%인 349만 명이 미국에서 발생했다. 4명 중 1명꼴인 셈. 사망자도 13만8000여 명으로 전 세계 사망자의 약 24%를 차지한다. 확진자 숫자로는 미국의 뒤를 잇는 브라질의 2배, 인도의 4배나 된다. 감염자가 하루에도 5만~6만여 명씩 늘어나고 있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고 했던가. 경제와 군사력 뿐 아니라 의료수준도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수퍼파워 미국. 세계 2차 대전에 종지부를 찍고, 전후 세계질서의 판을 짰던 패권국가 미국이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무릎을 꿇은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침공, 이어진 고립주의 노선 선택, 중국과의 갈등, 기후협약 탈퇴 등 국제적 이슈에 대한 반대 입장, 북한과의 대화 실패 등으로 미국이 패권국가로서의 지위를 상실한 지는 오래됐다.
미국이 코로나19와의 전쟁에서 참패한 가장 큰 원인은 공적 의료시스템과 리더십의 결함 때문. 제프리 삭스 컬럼비아대 교수는 "미국은 민간인이 운영하는 영리진료시스템과 수백만 명의 무보험자들이 있었을 뿐, 공공보건시스템과 바이러스 검사체계를 갖추지 못했다"고 진단했다. 보험회사와 병원, 의사들이 중심이 된, 영리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의료시스템 때문에 팬데믹 상황에 대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상황을 더 통제불능 상태로 몰고 간 건 리더십의 부재.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있음에도 상황의 위험성을 축소하거나 중국에 원인을 돌리는 등 책임회피에 급급했다. 지나치게 선거를 의식한 그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조되는 분위기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선 캠페인을 강행하고 세계보건기구(WHO)를 공식 탈퇴하는 등 잇따라 무리수를 두고 있다. 백악관 코로나19 태스크포스팀을 비롯한 의료진들도 뾰족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상황.
이처럼 미국을 비롯한 영국, 이탈리아, 일본 등 선진국들이 방역망이 뚫린 채 고전하고 있는 데 반해 한국과 대만, 싱가포르 등 중견국가들이 방역 모범국으로 급부상, 방역 선·후진국이 완전히 뒤집어졌다. 의료 보건시스템의 수준 차이, 그로 인한 국제사회에서의 주도권 변화와 흔들리는 역학관계에 세계는 당황하고 있다.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은 워싱턴 포스트에 기고한 글에서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은 세계질서를 영원히 바꿔 놓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국제관계에서 코로나 이후 패러다임 변화를 좌우할 가장 큰 변수는 미국과 중국 관계. 이 양대 축이 어떤 진영을 형성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국제질서의 틀이 만들어 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양국의 갈등이 극에 달해 제2의 냉전시대를 연출할 수 있다는 관측들도 있다. 그러나 두 나라 모두 입지가 좁아져 양자 대립구도로 가지는 않을 거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퓨리서치의 지난 3월~5월 사이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들의 절반(50%)이 코로나 이후 중국의 영향력이 약화될 거라고 보고 있다. 유럽의 영향력은 변함 없을 것(59%)이라는 견해와는 대비된다. 또 코로나 이후 미국이 다른 나라와 보다 적극적으로 협력해야 한다(35%)는 의견이 자국의 이익에 주안점을 두어야 한다(29%)는 견해보다 많았다.
코로나 직전까지만 해도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던 유럽, 남미 국가들은 중국과 거리두기에 나설 움직임이다. 영국은 지난 13일 영국 내에서의 화웨이 퇴출을 선언, 그 신호탄을 쐈다.
요컨대, 국제질서는 글로벌화에 브레이크가 걸려 국가 간 장벽이 높아지고, 자유무역에서 보호무역으로의 회귀가 뚜렷해진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국경과 자본을 초월한 수퍼파워 국가의 입지는 좁아지고, 한국과 싱가포르 등 중견국가들의 역할은 커지는 이른바 다원화 체제로 바뀐다는 것.
캐트린 힉스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디렉터는 "향후 세계 정치판도는 미·중·러 중심, 경제는 프랑스·독일·인도·일본이 가세하는 다자간 협력체계 양상을 보일 것" 이라고 말했다.
케빈 러드 전 호주 총리는'G0(G제로)시대'를 예고했다. 그는 외교전문지 포린 어페어스지에 기고한 글에서 "팍스아메리카나, 팍스시니카(Pax Sinica)는 없을 것"이라며 미국과 중국 모두 영향력을 상실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국제 질서를 주도하는 패권국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동서양 간의 문화 차이에 대한 성찰, 우열의식도 크게 달라질 것이다. 한국 등 방역 우수국가 국민들은 마스크 착용, 사회적 거리두기 등 지침을 잘 지키고 있는데, 미국과 유럽에서는 그렇지 않다. 특히 마스크 착용에 대한 거부감은 향후 방역정책을 수립하는 데도 큰 장애물로 작용할 것이다. 포옹하고 뺨에 키스하는 서양식 인사법도 사라질지 모른다는 소리까지 나온다.
코로나19와의 전쟁은 인류가 직면한 절박한 화두이기 때문에 국가별 각자도생 방식이 아니라 범국가적 연합기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실러국제연구소 창립자 헬가 라루시 박사는 지난 8일 열린 국제포럼을 통해 "지금 팬데믹, 금융, 전쟁 위기를 해결하려면 미국과 중국, 러시아, 인도가 참석하는 4자 회담을 시급히 개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사무총장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연대다. 연대만이 바이러스를 퇴치하고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역사는 코로나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질 것이다. 바이러스를 극복하고 새 패러다임에 적응하는 국가는 주도권을 쥘 것이고, 이를 극복하지 못하는 나라는 도태될 것이다.
KPI뉴스 / 공완섭 재미언론인 wanseob.ko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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