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 "한국문학사에서 빠진 산업노동자를 살려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 2020-06-02 16:44:04
황석영 장편 '철도원 삼대' 기자간담회
민담 형식 적극 활용해 '후반기문학' 확장
포스트 코로나 시대 화두에 몰두할 예정
"작가는 죽을 때까지 은퇴할 수 없는 존재"

"우리는 식민지 근대를 통과해 오면서 엄청난 산업사회에 진입했는데, 정작 산업노동자를 한국문학에서 정면으로 다룬 장편소설은 거의 없습니다. 식민지 시대 막 산업화가 시작될 때부터 노동운동이 항일운동과 같이 섞이다 보니 이념적으로 사회주의적 배경을 띨 수밖에 없었던 거죠. 그래서 일제 때도 단편소설 한두 개를 빼고는 산업노동자를 본격적으로 다룬 적이 없고, 이후 우리가 지금 대부분 노동자의 삶을 살고 있지만 이 부분이 한국문학에서 빠져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입니다. 전쟁, 군사정부 개발독재를 거치면서 터부시돼왔기 때문입니다."

 

▲ 소설가 황석영이 2일 오전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에서 장편소설 '철도원 삼대'를 펴내고 기자들과 만나고 있다. [문재원 기자]


 소설가 황석영(77)이 신작 장편 '철도원 삼대'(창비)를 펴내고 2일 낮 기자들과 만났다. 그는 구상을 시작한 지 30년 만에 출간한 이번 소설은 "한국문학에서 소외돼 있던 근대산업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다룬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염상섭의 '삼대'가 개화기부터 3.1운동 시점까지 근대를 식민지 부르주아를 통해 조명하는 소설이라면 저는 그 뒤를 이었다"면서 "3.1운동 이후부터 전쟁까지를 산업노동자를 통해 다룬 것"이라고 자평했다.

 

1989년 방북 당시 평양에서 평양백화점 부지배인을 만나 그의 철도원 가계 이야기를 접하면서 태동된 이 소설은 이후 30여년 숙성 기간을 거쳐 이번에 햇빛을 보았다. 지난해 '채널예스'에 기관차 이름 '마터2-10'을 표제로 1년에 걸쳐 먼저 연재한 뒤 다시 다듬고 추려서 200자 원고지 2200장 분량의 두툼한 단행본으로 제목을 바꿔서 펴냈다. 일제강점기 철도 공작창에 다니던 '이백만'으로부터 시작해 그의 아들 '일철'과 손자 '지산'으로 이어지는 철도원 삼대 이야기를 풀어가며 산업노동자들의 노동운동을 풀어내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철도원 삼대를 이어 4대 노동자 이진오가 현재 시점에서 굴뚝에 올라 농성을 하면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전개된다.('조용호의 문학공간' http://www.kpinews.kr/newsView/upi202003310130)

 

"사실 전반기 문학에서 리얼리즘에 입각해서 굉장히 서구적이고 엄정한 문장 구성 방법으로 썼던 작품세계와 달리, 후반기 문학(방북 이후 감옥 갔다 와서 생산한 작품들)에서는 리얼리즘 세계를 더 확장하려는 노력을 하면서 형식실험을 했습니다. 우리가 원래 가졌던 서사나 형식을 채용해서 때로는 민속굿, 판소리, 민담을 가져다 쓴 거죠. 사실적 자료들이 많아 민담적 상상력을 방해하는 점은 있었지만, 조금씩만 이야기조로 풀면 자연스럽게 민담화 한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이 소설은 민담의 형식을 빌려서 쓴 작품입니다."

 

▲'철도원 삼대'는 구상부터 집필까지 30년이 걸린 작가의 역작으로 철도원 가족을 둘러싼 방대한 서사를 통해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전후, 21세기까지 이어지는 노동자와 민중의 삶을 실감나게 다루며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문학적으로 구현해낸 작품이다. [문재원 기자]


이번 작품에서 민담 형식이 두드러지는 캐릭터는 자손들의 꿈에 나타나거나 실제 유령처럼 등장해 도움을 주는 '주안댁'이라는 인물이다. 성장기를 보낸 영등포를 무대로 실감나는 당시 세태를 묘사하거니와 이 인물 또한 실제 인물이 모델이라고 황석영은 간담회 후 이어진 사석에서 밝혔다.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엄마에게 야단 맞고 누나 돈을 훔쳐서 가출해 기차를 타고 인천에 가서 처음으로 바다를 보았다"면서 "시장 생선가게 좌판 위에서 잠을 자다가 그 가게 주인 아주머니에게 이끌려 그 댁에 가서 잠을 자고 엄마에게 인계됐다"고 말했다. 이후 좌판 주인 집안과 오랫동안 친밀 관계를 유지했는데, 그가 '주안댁 이모'라고 부르게 된 덩치도 크고 털털한 그 여인이 이번 소설에 반영됐다고 했다. 이번 소설에는 신여성이었던 황석영의 모친이 '신금'이라는 인물에게도 투영됐다고 덧붙였다. 주안댁은 괴력으로 자손들을 돕기도 하고, 영등포 대홍수 때 대활약을 벌인다.

 

대륙으로 이어지는 철도의 현장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점도 이 소설의 매력 중 하나이다. 남북관계가 교착된 상황에서 언제쯤 새로운 한반도의 미래가 열릴지 궁금했다. 그는 "지구상에서 누구를 괴롭힌 적도 없는데 70년 동안이나 전쟁을 종식하지 않는 나라가 어디 있느냐"면서 "전쟁을 끝내서 이제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조차 이렇게 힘들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일단 한반도를 둘러싼 화두는 이미 다 나와 있고 이것만 해도 굉장히 큰 진전"이라며 "조만간 코로나 문제가 가시고 나면 다시 대화와 협상도 시작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날 황석영은 말년에 작품이 제대로 써지지 않아 몸부림을 쳤던 세계 문호들을 열거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뒤 엽총을 물고 자살한 헤밍웨이에서부터 벼룩시장에서 구입한 권총으로 생을 마감한 로맹가리, 마약 과다복용으로 숨진 가와바다 야스나리, 할복한 미시마 유키오를 비롯해 절필선언을 한 뒤 치매에 걸렸다가 타계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등을 언급하면서 "작가는 기운이 남아 있는 한 죽을 때까지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작가는 은퇴 기간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아서 죽을 때까지 써야 합니다. 그게 세상에 대한 책무이지요. 기운이 남아 있는 한 써야 되는데, 그냥 마구 쓰는 게 아니라 죽을 때까지 계속 새로운 정신으로 새로운 길을 가는 작품을 써야 합니다. 그게 안 되면 더 이상 못 쓰겠다고 하는 게 낫죠."

 

그는 "'장길산'을 쓸 때 무려 19번이나 집필실을 옮겨 다녔는데 이번 소설도 보따리를 싸서 집을 나와 익산에서 썼다"면서 "확실히 기운이 달리고 기억력이 떨어져 등장인물이 바뀌는 혼돈을 겪으면서 고생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이번 작품을 쓴 곳이자 지금 머물고 있는 장소가 익산 원불교 시설인데 이 종교의 창시자 소태산 박중빈을 모델로 어린 성자가 사물에 대해 깨달아가기 시작하는 과정을 다음 소설로 쓰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황석영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운명적 변화에 동참하는 깊은 공부를 시작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문재원 기자]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로 퍼지면서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 변화가 생기고 있는데, 포스트 코로나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사람들은 20세기 이후 지구상에 만들어진 자본주의 체계와 작금의 모습들이 과연 앞으로 어떻게 바뀔 것인지 질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여태까지 우리가 잘 살아온 건지, 이 문명이 잘 걸어온 길인지 돌아보는 시점에 도달한 거죠. 세계사적인 변화 시점마다 그 길목에서 동행하는 생이었는데, 이제 이런 질문들에 응답하는 작품 활동을 이어갈 생각입니다."

 

광주항쟁 전후에는 그 지역 현장에서, 독일 통일 시점에서는 베를린에서, 남북 분단의 핵심 장소 중 하나인 평양에서 각각 세계사적 변화의 운명과 동행했던 황석영이 이제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운명적 변화에 동참하겠다고 선언한 셈이다. 그는 "익산에 계속 머물면서 '장길산'을 집필할 당시 깊이 공부한 '미륵사상'을 더 파고들 생각"이라며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는 생물을 넘어서서 무생물과 우주까지 포괄하는 생각과 철학이 대단히 중요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 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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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조용호 / 문화부 문학전문기자

소설가, 문학전문기자. 일간지에서 30년 가까이 주로 문학전문기자로 일함. 1998년 '세계의문학'에 단편소설 발표. 소설집 '떠다니네' '왈릴리 고양이나무' '베니스로 가는 마지막 열차', 장편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 '기타여 네가 말해다오', 산문집 '꽃에게 길을 묻다' '키스는 키스 한숨은 한숨' '여기가 끝이라면' '시인에게 길을 묻다' '노래, 사랑에 빠진 그대에게' '돈키호테를 위한 변명' 등. 한무숙문학상, 통영 김용익문학상, 무영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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