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세화 "민주·통합당은 모두 보수…신자유주의 맞설 좌파 있어야"

양동훈 / 2020-03-27 13:04:12
신간 '결: 거침에 대하여' 낸 홍세화씨
"지금은 고문 공포 없어진 것만도 다행
비판의식 형성 막혀 있는 교육 바꿔야
"운영하는 장발장은행 곧 폐업됐으면"
홍세화(72) 씨(장발장은행장)는 30대 초반에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라는 공안사건에 연루돼 프랑스로 망명했다. 해당 사건에 연루된 인물 대부분은 추후 민주화운동가로 인정받았다.

망명 시기였던 1995년 발간한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국내에 이름을 알렸다.

2002년 귀국한 홍 씨는 한겨레신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를 거쳐 2011년 진보신당 대표가 됐다.

장발장은행은 벌금형을 받았으나 생계 곤란으로 인해 노역장에 유치될 위기에 처한 사람들에게 무담보‧무이자로 대출해주는 소액대출기관으로 2015년에 열었다.

홍 씨는 민주화운동과 진보정치를 언급하면서 "사유하지 않는 교육 아래에서는 진보정치의 미래가 없다"고 단언했다.

▲ 홍세화 장발장은행장이 26일 서울 마포구 '소박한 자유인' 사무실에서 UPI뉴스와 인터뷰를 하고있다. [양동훈 인턴기자]

ㅡ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 사건에 연루돼 프랑스로 망명했다고 알고 있다

"남민전은 박정희 정부 시절 반체제 지하단체였다. 박정희 체제를 어떻게 무너뜨릴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단체다. 저야 말단이고 삐라 뿌리는 정도밖에 참여한 게 없지만, 단체의 중추는 거의 대구지역 분들이었다.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 사건 당시 8분이 사형집행을 당하면서, 그 당시 추적을 피하는 데 성공했던 분들이 단체를 만든 거다. 나 같은 경우는 77년 여름쯤부터 활동을 했었다.

79년 3월에 다니던 무역회사에서 유럽지사로 발령을 냈다. 8월에는 가족들까지 모두 프랑스로 왔다. 10월 초에 남민전이 발각되고 70여 명이 잡혀가는 일이 터졌다. 당시에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꼈던 고문에 대한 공포가 지금은 없어졌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군사정권 시절 유명한 데는 거의 다 갔었다. 이런 시절에 맞서 싸웠던 선배들이 있었다는 점 정도는 후대가 알 필요가 있지 않을까."

ㅡ프랑스에서 거의 20년을 살았는데

"아무래도 망명자고 하니까 거리를 두게 되지만 사적으로 아는 분들도 있었다. 고등학교 선배가 파리에 업무차 나와 있기도 했다. 그런 분들의 도움으로 파리 관광을 안내하는 일종의 알바를 했는데, 이것만으로 먹고 살기는 힘들었다. 어느 날 르몽드 신문을 보는데 아주 조그마한 광고에 '당신도 파리의 택시기사가 될 수 있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눈이 번쩍 뜨여서 찾아가 나같은 정치 난민도 할 수 있냐고 물었더니 '바로 당신 같은 사람을 위한 일'이라고 하더라. 그래서 학원 등록하고 책 받아서 자격시험 공부해서 택시기사가 됐다. 체력적으로 힘들어서 오래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어려운 시기 넘기는 데 도움이 많이 된 직업이다."

ㅡ귀국한 이후 한겨레신문에서 일하고, 진보신당 당 대표도 했는데 진보정치에 대한 생각은

"(우리나라는) 분단과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의식 자체가 완전히 반쪽으로만 허용되는 상황이다. 민주당이 왼쪽에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사회 전반적으로 의식지형이 우경화되고 좌편은 텅 비어있다. 미래통합당은 수구적 보수세력, 민주당은 자유주의 보수세력이고 이 둘이 나뉘는 건 국가보안법에 대한 입장 차이다. 수구보수는 국보법을 반드시 지키려는 반면, 자유보수는 없애거나 개정하려는 차이다. 이들과 구분되는 좌파라면 신자유주의를 구분선으로 봐야 한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에 단호하게 반대하는 정치세력이 한국에는 제대로 없다. 결국 한국에는 아직 좌파 진보 정치세력이 형성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역사적 문제 때문에 이념지형이 왜곡되고 반쪽만 허용돼왔던 데다 교육이나 미디어도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쉽게 해결될 수 있는 일은 아니고 오랜 시간이 필요한 문제다. 남북관계 변화를 비롯해 환경이 바뀌면 좀 나아질 텐데 만만치 않다. 지금 코로나19가 번지는데 이 문제도 인간이 자연을 너무 함부로 해왔던 것에 대한 자연의 역습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나. 이런 것들에 의해 의식구조가 변화하는 게 오히려 가능성이 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ㅡ교육과 미디어가 가진 영향력을 크게 보는 것 같다

"내가 이번에 낸 책 <결: 거침에 대하여>에서도 소개했는데 1946년 해방 직후 미군정이 남한 사람 대상으로 정치의식을 조사한 게 있다. 8453명을 대상으로 자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모름 4개 항목 중 무엇을 선호하는지 고르도록 했다. 아직 전쟁 일어나기 전이고 농민이 거의 80%이던 시절에 자본주의 14%, 사회주의 70%, 공산주의 7%, 모른다 8%가 나왔다(해방일기 4, 김기협). 이런 분포였기 때문에 극우적인 이승만 정부였어도 조봉암을 농림장관 시키고 농지개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46년 당시에 사람들 정치의식은 왜 그럴 수 있었을까. 여기서 우리가 참조해야 할 것이 그람시라고 본다. 그람시는 시민사회의 헤게모니를 얘기했는데 어떤 의식이나 이런 것이 미디어, 학교, 정당, 교회 이런 것들에 의해 장악되는 거다. 1946년에는 그들의 존재에 맞는, 어쩌면 존재가 요구하는 의식을 가졌다면 지금은 왜곡된 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46년은 분단이 체화되지 않았고 전쟁도 벌어지기 전이었으니까.

당시 사람들이 자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정확한 세부사항은 몰랐을지라도 좌파 지식인들이 많고 다양한 이야기들이 공유되고 있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ㅡ학교 교육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학교교육에서 비판의식 형성 자체가 막혀 있는 부분을 강조하고 싶다. 생각하고 사유하는 교육 자체를 애당초 하지 않으니까, 비판의식이 안 생긴다. 구체적으로는 글쓰기와 토론 수업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사유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준다. 지금의 교육을 봤을 때, 젊은 세대가 비판적 의식을 갖고 노동문제나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될 가능성이 있나. 제가 볼 때는 거의 없다. 우리 사회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인데, 그러면 초중고 사회 시간에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 가장 중요하게 배워야 할 것 아닌가. 사회적 존재로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잘 알아야 그 속에서 나의 정체성을 알 수 있고 그렇지 않나.

글을 쓰려면 참고할 문건도 찾아보고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 아주 쉬운 예로 내 아이들은 프랑스 학교에서 글쓰기를 엄청 많이 했다. 중3때인가 보니까 학교에서 사형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쓰라는 과제를 주더라. 그러면 사형제도에 대해 엄청 고민을 해봐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다음 나라들 중 사형제도가 폐지된 나라는 어디인가' 이따위 공부를 하고 사유는 하지 않는다. 굉장히 심각한 문제다.

지금 n번방, 페미니즘 이런 수많은 문제들이 있는데 이런 것에 대해 사유하지를 않는다. 이런 문제에서도 그런데 노동에 대해서는 두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헤게모니에 대해 입력만 돼 있으니 그걸 엄청나게 고집을 한다. 사유하지 않은 데다 변화의 가능성도 없는 꽉 막혀버린 상황이다."

ㅡ왜 우리는 사유하지 않는 교육을 하고 있을까

"근대식 교육이 시작된 게 갑오개혁부터다. 그 때 북촌에 관립 소학교가 세워지기 시작한다. 얼마 가지 않아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며) 다 망한다. 1945년에 미 군정 들어서고 1948년에 민주공화국 섰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새 나라가 세워졌으니 우리가 (청소년들을) 어떻게 교육할거냐에 대한 총체적 토론이 필요하다. 그걸 했나. 전혀 없었다. 분단과 전쟁 때문에 신경 쓸 여지가 전혀 없었다. 일제 부역세력 청산을 못 했으니 교육계도 그들이 꽉 잡게 됐다.

일제 강점기 때 식민지 백성에게 생각하는 교육을 했겠나. 어림도 없다. 그 흐름이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거쳐 지금까지 왔다. 이게 대학서열화와 찰떡궁합이다. 글 쓰고 토론하고 말하게 하면 이걸 어떻게 객관적으로 평가하나. 그러니까 너 얼마나 암기하고 있느냐로 서열 매긴다. 일제강점기에 자리잡힌 생각하지 않고 비판적 안목 가질 필요 없는 교육이 대학서열화와 딱 맞아떨어져서 굳어져 버렸다. 그래도 80~90년대는 선배로부터 책 소개받고 토론하고 하면서 의식을 키울 기회라도 있었지만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잦아들기 시작해 지금은 대학의 그런 문화가 거의 사라져버렸다."

ㅡ현실정치에서는 손을 뗀 건가

"(진보신당 대표 출마할) 당시 진보신당이 많이 힘들어서 중추적 당원들, 활동가들이 떠나는 상황이 되니까 이런 식으로 하는 건 아니다 싶어 일종의 핀치히터(대타) 식으로 나서게 된 거다. 근데 역시 현실정치는 정서적으로 안 맞더라. 망명 생활 두통이 심했는데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책 내고 나서 좋아졌다. 속에 있던 응어리를 책으로 풀어내고 나니 소멸된 게 아니었나 싶다. 근데 없어졌던 두통이 진보신당 대표할 때 다시 찾아왔다.

지금은 노동당 당원이자 고문이다. 진보정당에 몸담는 게 나로서는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니까 앞으로도 계속 당원일 거다. 한국과 같은 상황에서는 진보정당이 조금 더 균형자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생각도 갖고 있다. 한국 공식 정당 중에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정당이 그래도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두고 있다. 요즘 자주는 못 보는데 같은 당원인 박노자 교수와 '우리 이렇게 힘 없어서 어떡하냐' 이런 얘기 하기는 하는데. 그래도 선배들로서 이렇게 버티는 게 그나마 역할이 아니겠냐 생각하고 있다."

▲ 홍세화 장발장은행장이 독서토론모임 '소박한 자유인' 입간판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양동훈 인턴기자]

홍 씨를 만난 장소는 '소박한 자유인' 사무실이었다. 홍 씨는 2010년 한겨레 칼럼에서 "'완전한 자유인'보다 '소박한 자유인'이 돼라"고 전한 바 있다. 완전한 자유인이 되기를 열망하다 소박한 자유인의 길마저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소박한 자유인은 "소박한 생존에 머물 줄 아는 사람이면서 자아실현 또한 소박한 것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ㅡ소박한 자유인은 어떤 단체인가

"그냥 같이 책 읽고 토론하는 시민 모임이다. 매달 책 한 권씩 주로 신간 중심으로 선정하고, 석 달에 한 권은 회원들에게 보내준다. 지금 한 3년 정도 됐다. 회원들에게 가입조건을 걸었다. 석 달에 한 권 보내주는 책은 반드시 읽고, 매달 선정하는 책은 읽도록 노력하고, 매달 한 번은 시민사회운동 현장을 찾고, 사람‧세상에 대한 공부의 끈을 놓지 않으며, 노조를 인정하지 않고 반도체 직업병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삼성 제품을 최대한 피하라는 다섯 가지다."

홍 씨는 마지막으로 장발장은행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지금까지 812명에 총 14억4490만 원을 대출했으며 434명이 상환 중이고 135명은 상환을 완료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후원자 8170명에 대한 감사 인사도 빼놓지 않았다.

홍 씨는 "우리도 유럽처럼 소득과 재산을 기준으로 벌금을 정하는 일수벌금제를 도입해야 한다"며 "그러면 우리 은행의 가장 큰 소망인 '폐업'이 이뤄질 것"이라고 전했다.

KPI뉴스 / 양동훈 인턴 기자 ydh@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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