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윤의 줌인] 전기영 "격투기의 유혹 뿌리치고 교수의 길 택한 것 자부심"

김병윤 / 2019-01-14 09:30:54
올림픽 금 '업어치기의 달인' 한국유도의 자존심
▲ 전기영 교수 [문재원 기자·셔터스톡]

 

업어치기. 업어치기 한판. 금메달. 금메달. 전기영 금메달. 20여 년 전 한 젊은이가 국민들에게 큰 기쁨을 줬다. 96년 애틀랜타올림픽 유도 86킬로그램 이하 금메달리스트 전기영의 이야기다. 전기영은 누구인가. 잘 생긴 얼굴. 온순한 성격. 겸손한 자세. 강한 승부욕. 불 같은 투혼. 유도인의 모든 것을 갖췄다. 한국유도의 자존심이다. 유도 종주국 일본의 콧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린 업어치기의 달인이다. 전기영과 대결했던 선수들은 말했다. 업어치기에 당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당했다고. 국내선수 만이 아니다. 세계적인 선수들도 똑같은 말을 했다. 전광석화. 이 말은 전기영의 업어치기 기술에 어울린다. 순식간에 상대선수를 매트에 꽂아 눕혔다. 거의 모든 경기를 한 판 승으로 끝냈다. 유도의 묘미를 맘껏 보여줬다. TV시청률은 최고를 기록했다. 전기영의 경기를 보고 유도 지망생이 많이 늘기도 했다. 올림픽 금메달. 세계선수권대회 3회 연속 우승. 실력이 증명해준다. 실력만 뛰어난 게 아니다. 인품이 훌륭하다. 선배를 깍듯이 모신다. 후배를 알뜰히 챙긴다. 주위의 신망이 두텁다. 이런 전기영이 변신을 했다. 예전의 영광을 뒤로 하고 교수의 길을 걷고 있다. 용인대에서 후학을 지도하고 있다. 알려지지 않았던 영광도 있었다. 한국유도인 최초로 국제유도연맹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었다. 


한국유도의 자존심을 살려줬던 전기영 용인대 교수를 만나본다.

 

▲ 전기영 교수는 한국 유도인 최초로 명예의 전당에 헌정됐다. [문재원 기자]


-한국 유도인 최초로 명예의 전당에 헌정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 과정을 자세히 말해 달라. 


"국제유도연맹에서 2013년에 명예의 전당 헌정식을 처음 한 것으로 알고 있다. 2015년 카자흐스탄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 때 갈라 쇼를 하면서 명예의 전당 헌정식을 했다. 명예의 전당 헌정식으로는 2회였다. 한국유도 사상 처음으로 명예의 전당에 헌정됐다. 아내와 둘이 갔다. 헌정식 사진을 찍어 줄 사람이 없었다. 조금은 외로웠다. 물론 아내가 찍어 주긴 했지만. 2018년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 때 조민선이 북한의 계순희와 함께 명예의 전당에 헌정됐다. 조민선은 한국인으로는 2번째. 계순희는 북한 최초로 헌정됐다."

-유도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조건이 있는가.


"특별한 조건은 없는 것 같다. 무조건 올림픽 금메달을 따야 되는 것도 아니다. 선수생활을 오랫동안 꾸준히 했는가. 세계유도와 국가유도의 발전을 위해 얼마나 공헌 했는가 등을 보는 것 같다. 올림픽 메달이 없더라도 세계선수권 대회도 있고 지역 대륙별 대회도 있다. 유도는 특정 대륙만 잘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 일본 유럽 러시아 남미의 브라질 등이 유도 강국이다. 반면에 호주 북미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좋은 성적을 못 내고 있다. 한국에도 금메달리스트가 많으니 받을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일본은 더 많을 것이고. 그런데 선정되지 못 하는 사람이 많다. 아마도 자체적 공헌도를 책정하는 기준이 있는 것 같다. 자세히는 모르겠다."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면 특별한 대우가 있는가.


"특별한 거는 없다. 갈라 쇼에 초청받고 시상식을 한다. 개인적으로 간단한 영어 인터뷰를 한다. 헌정됐다는 자부심으로 살아간다."

 

▲ 2015년 8월 22일(현지시간)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에서 연 ‘IJF 명예의 전당 클래스 2015’ 행사. 국제유도연맹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전기영 교수(오른쪽). [구글이미지 검색]

-현재 국제유도연맹의 직책을 맡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두 가지 직책을 맡고 있다. 하나는 심판 슈퍼바이저다. 심판 감독관이다.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대회에 참가하는 모든 국제심판을 관리 감독하는 자리다. 지명되고 나서 의아했다. 왜 내가 지명 됐을까. 아직도 이유를 모르겠다. 사실은 조금 부담스럽다. 또 한 가지 직책은 경기위원이다. 국제유도연맹 경기가 1년에 20개 정도가 된다. 올림픽을 제외하고도 마스터스 그랑프리 등 많이 있다. 교수직을 맡고 있어 모든 대회에 참가는 못 하고 있다. 1년에 7~8개 대회에 나가고 있다. 대회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경기에 필요한 모든 설치 등을 총 관리 감독하고 있다. 국제유도연맹 명예위원으로 김정행 회장님이 계시다."

-국제대회 회의를 하려면 영어가 필수인데 어려움은 없는가.


"어려움은 없다. 원활하지는 않지만 소통할 정도는 된다. 2002년에 싱가포르에 교환교수로 1년 정도 다녀왔다. 싱가포르에서는 영어로 대화를 많이 한다. 자연스럽게 영어를 하게 됐다. 중국인이 70% 이상이라 중국어도 조금 배웠다. 한국식 영어를 콩글리시라 하지 않는가. 싱가포르에는 싱글리시가 있다. 특유의 억양이 있다. 좋은 경험을 했다. 싱가포르에서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되고 있다."

-한국유도의 현재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나.


"좋은 현상이라고 본다. 과거에는 엘리트 스포츠 위주라 저변이 넓지 않았다. 요즘은 생활체육 활성화로 저변이 넓어졌다. 유도클럽과 도장이 많아졌고 팬들도 늘었다. 유도를 배우려는 사람이 많아졌다. 단지 엘리트 선수들은 줄고 있다. 아쉬움은 있지만 팬들의 응원으로 힘을 얻고 있다. 엘리트 선수들은 체계적 훈련과 지원으로 근근이 성적을 내고 있다. 지금 생각해보니 선수촌이라는 좋은 시설에서 훈련하는 게 정말 큰 복이다. 엘리트 선수들에게는 특권이다. 눈만 뜨면 운동할 모든 여건이 갖춰졌으니 얼마나 좋은가. 사실 운동할 때 너무 힘들어 그만 두려한 적이 많았다. 그럴 때 선수촌에서 체계적으로 관리해주고 지원해 줘서 버텨온 것 같다. 선수촌 운영에 관해 말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선수촌을 운영 하냐고. 개인적으로는 선수촌 운영이 필요하다고 본다. 일본은 그동안 운영하지 않았던 선수촌을 만들었다. 태릉에서 훈련할 때 일본 대표 팀이 매년 한국으로 전지훈련을 왔다. 정기적으로 선수촌에서 합동훈련을 했다. 일본 코칭스태프나 선수들 모두 우리의 선수촌을 부러워했다. 일본이 왜 선수촌을 운영하려는지 생각해 봤으면 한다."


-영원한 라이벌. 유도 종주국 일본과 수준을 비교한다면. 


"한 수 위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보다 수준이 높은 거는 사실이다. 선수층이 두껍고 시설 지원 행정 모든 것이 앞선다. 국제대회 나가면 한마디로 부럽다. 일본은 세계선수권대회 나오는데 훈련 파트너까지 데리고 온다. 우리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모든 것이 우리의 10배 정도는 앞서 있다. 왜 일본이 유도 종주국인가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언론의 관심사만 해도 그렇다. 일본은 국제대회에 취재진이 수 십 명씩 달라붙는다. 한국 취재진은 올림픽 빼고는 거의 볼 수 없다. UPI뉴스가 저를 이렇게 취재해 주는 것만으로도 정말 고맙다. 올림픽 이슈가 있는 것도 아니고. 현역도 아닌데. 아마 기사가 나가면 유도계에 화제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인사도 많이 받을 것 같다(웃음). 여하튼 한국유도가 일본과 엎치락 뒤치락하는 건 대단한 일이다. 한국유도가 일본과 경쟁하고 대등하게 가는 거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 이유는 한국의 훈련 시스템이 뛰어나기 때문인 것 같다."

-격투기 유혹이 많았을 거로 사람들은 생각한다. 유혹을 받지 않았나. 


"2005년에 용인대 교수로 임용됐다. 임용 한 달 뒤 에이전시에서 연락이 왔다. 만났다. 미끼를 던졌다. 그림이 뻔했다. 격투기로 영입해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홍보를 하려 함이었다. 라이벌 요시다와 리벤지 매치를 만들려 했던 것 같았다. 유도 매트가 아닌 링 위에서. 중요한 건 원래 관심이 없었다. 처음에는 3억에서 10억 사이로 제안을 하려 했던 것 같다. 자세한 거는 모르겠다. 돌아보면 안 가길 잘 했다. 주변 모든 분들도 그때의 판단을 칭찬해주신다. 저의 경우 유도만 보고 앞만 보고 가니까 응원을 많이 해주신다. 현재 유도 6단인데 내년에 7단을 신청할 계획이다. 앞으로도 유도에 정진해 9단에 도전하려 한다. 9단은 유도인 최고의 명예이다. 마음과 몸을 갈고 닦아 유도인의 명예를 지켜 나가겠다."

-은퇴를 결정하게 된 이유는.


"무릎 부상이 결정적 요인이었다. 운동이 정말 힘들었다. 올림픽과 세계선수권에서 금메달을 땄으면 편하게 운동을 했어야 했는데 그게 안됐다.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컸다. 좋은 성적을 내야 한다는 생각에 하루도 편하지 않았다. 금메달 땄다고 방송사 신문사 불려다니는 것도 힘들었다. 체중조절을 하기도 어려웠다. 저의 경우 97년까지가 전성기였다. 93년 세계선수권대회 우승할 때 78킬로그램 이하로 출전했다. 95년 97년 대회 때는 86킬로그램 이하로 체중을 올렸다. 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때도 86킬로그램 이하로 나갔다. 늘어나는 체중을 감당할 수 없었다. 경기 전에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체중감량에 대한 어려움을 겪어보지 못 한 사람은 그 아픔을 이해할 수 없다. 스트레스를 받느니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다 생각해 은퇴를 했다."

 

▲ 전기영 교수는 "대표팀 코치로, 교수로, 어린 선수들과 학생들을 보면 저절로 힘이 난다"며 웃어 보였다. [문재원 기자]


-교수로 지도자로 느끼는 보람은.


"대표 팀 코치를 하며 보람을 많이 느꼈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 이원희 금메달.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최민호 금메달을 따는 데 코치로 참여했다. 많은 보람을 느꼈다. 지금도 학교에서 강단에 설 때 기쁨이 넘친다. 어린 선수들과 학생들을 보면 저절로 힘이 난다. 저는 국가와 모든 유도인들의 혜택을 많이 받고 살았다. 이제는 모든 사심을 버리고 보답할 일만 남았다. 앞으로도 모든 힘을 쏟아 후배들 양성에 힘을 쏟겠다. 유도에 관심을 많이 가져주시길 바란다."

 

KPI뉴스 / 김병윤 기자 bykim7161@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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