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노무현, 제주4·3 첫 공론화 이어 사과
문재인, '가해자'인 국방당국의 첫 '유감' 표명
1949년 1월 21일 열린 제12회 국무회의록을 보면, 이승만 대통령은 '시정일반에 관한 유시의 건'으로 다음과 같은 지침을 전달했다.
"미국 측에서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동정을 표하나 제주도, 전남사건의 여파를 완전히 발근색원(拔根塞源) 하여야 그들의 원조는 적극화할 것이며, 지방 토색(討索) 반도(叛徒) 및 절도(竊盜) 등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여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
제주도, 전남사건은 제주 4·3사건과 전남 여순(여수·순천) 사건을 지칭한다. 토색(討索) 은 돈이나 물건을 달라고 억지로 요구함을 뜻한다. 한 마디로 말해 미국의 원조를 받기 위해서라도 인정사정 봐주지 말고 발본색원 하라는 군 통수권자의 지령이다.
이 대통령의 국무회의 지침은 즉각 군부대와 검찰, 경찰 계통을 통해 전달돼 제주4·3사건 진압과정에서 많은 제주도민의 희생을 낳게 한 것으로 4·3연구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그뒤로 제주도민들은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정부를 거치는 동안 반세기 가까이 반공법의 족쇄와 연좌제의 굴레에 억눌린 가운데서도 줄기차게 '신원'(伸寃)을 요구해왔다.
그러다가 헌정 사상 첫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룬 김대중 정부에서 비로소 제주4·3은 정부 차원에서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마침내 여야 합의로 1999년 말 국회에서 4·3 특별법이 제정되기에 이르렀고, 정부는 이 법에 따라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4·3 진상규명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이어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뒤로는 대통령이 직접 제주도민에게 사과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뒤로 이번에 제주4·3사건 71주년을 맞이해 국방부가 3일 제주 4·3 행사가 열리는 광화문광장을 방문해 처음으로 4·3 희생자를 애도하고 군·경의 무력 진압으로 수많은 양민이 희생된 것에 대해 유감을 표명한다.
이를 계기로 역대 대통령과 제주4·3의 '악연'과 '인연'을 15장의 사진으로 짚어본다.



| ▲ 이승만이 '신뢰한 토벌대' 서북청년단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이승만은 '신뢰할 수 있는 토벌대'로 서북청년회를 지목했다. 미군도 군 병력 대부분을 서북청년회 단원으로 충원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4·3사건 직전 제주도에 입도한 서청 단원은 500~700명이다. 4·3사건 발발 직후에는 500명, 1948년 말에는 1000명 이상이 제주도에 파견됐다. [김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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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평화기념관의 희생자 조형물 제주 4·3사건 희생자는 2만 5000명에서 3만명으로 추정된다. 신고된 희생자 수만 1만 4028명이다. [김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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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압후 이승만의 1956년 제주 방문 정부의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제주4·3은 1947년 3·1절 기념식 발포사건 때부터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통행금지령이 해제될 때까지 7년 7개월간 군경의 진압 등 소요사태 와중에 양민들이 희생된 것을 말한다. 이승만 정권은 제주도민을 직접 학살뿐만 아니라 반공법과 연좌제로 박정희-전두환 군사정부 시절까지 공포로 억눌렀다. [국가기록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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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백섬 제주의 4·3희생자 마을별 분포지도 동백꽃은 제주4·3희생자를 상징한다. 제주4·3희생자유족회가 펴낸 <제주4·3희생자유족회 27년사>(도서출판 각, 2015)의 지도를 '시사인'에서 지도를 재인용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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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적인 4·3특별법 서명 2000년 1월 11일 김대중 대통령이 1999년 12월 16일 여야 합의로 국회를 통과한 4·3특별법에 서명하고 있다. [4·3평화기념관 전시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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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4·3특별법 서명문서와 김대중 대통령의 만년필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4·3사건특별법, 법률 제6117호)은 2000년 1월 12일 제정되어 3개월 뒤인 2000년 4월 13일부터 시행되었다. [김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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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무현의 공식사과 정부의 4·3보고서가 확정됨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이 2003년 10월 31일 제주를 찾아 라마다프라자제주호텔에서 국민과 유족들에게 '과거 국가 공권력의 잘못'에 대해 머리숙여 사과하고 있다. [4·3평화기념관 전시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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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화의 섬 제주 2005년 노무현 대통령이 문정인 동북아위원장(앞줄 맨오른쪽)이 지켜보는 가운데 '제주 평화의 섬' 지정 서명식에서 서명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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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보 시절과 대통령 된 뒤가 180도 달랐던 이명박 이명박 대통령은 2007년 3월 후보 시절 평화기념관을 방문해 "4·3에 대한 평가는 제대로 됐으며, 평가대로 인정해야 한다"며 4·3영령들의 안식을 기원했다. 하지만 이명박은 대통령 재임중에 한번도 4·3추념식에 참석하지 않았다.[김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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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근혜의 절반의 약속 실천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인 2012년 8월 1일 제주4·3평화공원 위령제단에 참배했고, 이후 대선 과정에서는 '4·3의 완전한 해결'을 약속했다.박근혜는 대통령이 된 뒤에 2014년 3월 국무회의에서 '제주4·3희생자 추념일'을 국가기념일로 정하는 내용의 '각종 기념일 규정' 개정안을 의결해 민간 차원에서 이뤄지던 기념행사가 정부가 주관하는 위로 행사로 격상돼 치러지게 했다. [4·3평화기념관 전시 사진] |
KPI뉴스 / 김당 기자 dangk@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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