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작 '소니도', 소리 형상화…"공예성보다 회화성 살리려 노력"
'시골 된장' 같은 예술…"인내하면 영감 받아. 작가들 지혜 터득하길"
불교의 일체무아 닮은 작품세계…"나의 실체 없다. 참다운 나 찾아야"
청동기나 철기 시대 등으로 역사를 구분하는 것은 어쩌면 남성의 일방적인 역사관일지도 모른다. 카시아 세인트 클레어는 저서 '총보다 강한 실(실은 어떻게 역사를 움직였나)'에서 여성의 손에 쥐여있던 '실'이 역사의 큰 축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이 아니더라도 실은 여러 면에서 인류 역사의 중요한 구실이나 방편이었던 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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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업 중인 김성혜 작가 [작가 제공] |
이런 실을 물감과 치환해 캔버스 위에 자기 미술 세계를 구현하는 한국 작가가 있다. 김성혜 작가다. 현대미술은 '한계와 제한이 없다'는 정의처럼 여러 국내외 작가는 이미 다양한 혁신적 사고와 방식을 미술에 도입하고 있다. 김 작가의 이런 시도도 어떤 면에서 '그럴 수 있겠다'고 받아들일 수 있다. 그래도 조금만 돌려 생각하면 그가 선택한 '실'은 고도의 철학적 의미와 역사성을 내포하고 서로 다른 미술 장르를 꿸 수 있는 독특한 재료임엔 틀림없다. 그도 사실 수십 년 물감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물감을 내려놓고 실을 선택하기까지 수십 년이 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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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혜 작가, 소니도 시리즈 [SayArt(세이아트)] |
현재 김 작가는 북한산국립공원 북쪽 끝에 있는 사패산 자락 아래, 행정구역으론 의정부에 속하는 한 아파트에 마련된 작업실에서 두문불출하고 있다. 그는 맏딸이자 맏며느리였다. 이른 결혼에 밀려드는 가사에 예술에 향한 갈망을 뒤로 숨긴 채 청춘을 보냈다고 한다. 그가 최근에도 집에 틀어박혀 작업에 몰두하는 이유가 지난날에 대한 회한일지도 모른다.
수십 년 예술가로 살았으니 인고의 세월은 말로 형용하기 어렵다. 그래도 그에겐 힘든 시간 버팀목이자 울타리인 가족이 있었다. "우리 사이에 어떻게 연꽃 같은 저런 아이들이 태어났지"라는 짝꿍의 이야기는 어둡고 긴 터널을 헤쳐나오는 데 밝은 횃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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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혜 작가, 소니도 시리즈 [SayArt(세이아트)] |
그는 홍익대학교에서 섬유 관련 학과를 졸업하고 작가를 꿈꿨다. 하지만 숙명 같은 일상은 그런 호사를 허락하지 않았다.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자 공방을 차려 타피스트리(tapestry·여러 가지 색실로 그림을 짜 넣은 직물)로, 미술학원을 차려 학원 원장으로 예술을 향한 출구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잠시 짬을 낸 작업은 속 깊이 타들어 가는 갈증을 풀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래도 김 작가는 그렇게 수십 년 붓을 손에 쥔 채 느리지만 한 걸음씩 나갔다. 인터뷰 내내 그는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치는지 아련한 눈빛을 보이곤 했다. 그의 지난 시간은 아파트 창 너머로 보이는 아찔한 사패산을 오르는 것처럼 때론 절망적이었고 때론 힘에 부치는 인고의 세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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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혜 작가, 소니도 시리즈 [SayArt(세이아트)] |
꾸준함의 힘일까. 세월이 흐르자 작가로서 시야도 넓어졌다. "한세월 그림을 그리다 보니 구상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죠. 일월도를 그렸어요, 하늘 땅 나무 바람을 캔버스에 모두 담았죠. 무언가 새로운 시작이란 걸 느꼈어요. 컬렉터들은 만족했지만, 그래도 완전한 나의 것을 찾진 못했죠.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잠을 설쳤어요."
길이 막히자 그는 아예 붓을 내려놓고 긴 호흡에 들어갔다. 어느 날 "달을 봐야지. 왜 달을 가리키는 손끝을 보나?"라는 성철스님의 이야기가 뇌리를 강타했다. 반년쯤 혼돈의 시간을 보내곤 눈이 밝아졌다. 생각이 열렸다. 잊었던 섬유, 실이 머리를 스쳤다. "그래 이거야!" 멈춰섰던 그의 예술 시계는 다시 째깍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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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혜 작가, 소니도 시리즈 [SayArt(세이아트)] |
그는 이때 이젠 꽤 유명해진 대표작 '소니도' 시리즈를 시작했다. 소니도는 스페인어로 '소리'라는 뜻이다. 소리를 형상화하는 파격적인 발상이다. 그는 이런 생각을 실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실의 공예성보다는 회화성을 살리려고 노력했어요. 소리의 파동에서 느껴지는 삶의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거죠. 여기에 실보다 좋은 재료는 없죠."
그의 작품엔 전체에서 뿜어나오는 아우라가 있다. 일관된 호흡이 스치고 간 듯한 묘한 여운이 있다. "저는 직감에 의존해요. 물론 계획이 없는 건 아니지만 맘에 따라 몸을 자연스레 움직여요. 이때 느끼는 몰입의 쾌는 설명하기 어려워요." 그의 이런 직관의 힘은 자연에서 왔다고 한다. "제게 유일한 휴식은 산책이죠. 자연의 체취가 좋아요. 자연에서 느낀 잔상이 캔버스에 자연스레 녹아드는 듯해요. 풀 한 포기에서도 우주를 볼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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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혜 작가 [작가 제공] |
그의 작업은 노동집약적이다. 100호 작품 한 점을 완성하는데 석 달 동안 꼬박 매일 대여섯 시간을 매달려야 한다. 재료의 특성상 마무리에도 몇 주를 더 보태야 한다. 산책은 그런 지난한 작업의 잠시 쉼표다.
작품의 주제나 재료, 작업 방식 모든 면에서 그의 예술은 '시골 된장' 같다. 깊은 맛이 난다, 수십 년 세월을 낚으며 쌓아온 공덕과 내공이 만드는 깊은 맛일 터다. "대부분 사람은 빠른 결론을 원하죠. 미술은 그렇지 않아요. 작가가 서두르면 작품이 작가를 가지고 놀 수 있죠. 예술은 기다림의 미학이에요. 기다리지 않으면 예술은 도망가죠. 인내하고 미련하게 기다리면 예술은 작가에게 또 다른 영감을 선물하죠. 젊은 작가들도 기다릴 줄 아는 지혜를 터득하기를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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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혜 작가, 소니도 시리즈 [SayArt(세이아트)] |
그는 가끔 작업을 마친 자기 작품을 볼 때 "이걸 누가 작업했지?"라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주체와 대상이 하나가 돼 나인지 너인지 모를 황홀경의 시간을 보낸 결과다. 그래서인지 그는 의도하진 않았지만, 작품 하는 시간이 자기에겐 수양이자 수행이 되고 있다고 했다. 그의 작품 세계는 일면 불교의 일체무아(一切無我)와 닮아있는 이유다. "우리가 '나'라고 하는 것들[六根, 四大, 五取蘊]은 이렇게 내가 아니고[非我], 나의 것이 아니다. 변하지 않고 항상 할 수 있는 나의 실체는 없다. 그런데도 우리 범부들은 그러한 것을 나의 실체로 집착하고 그 같은 아집 때문에 대립, 분열 등의 괴로움에 빠진다. 그래서 참다운 나를 찾아야 한다. 나 아닌 것을 나로 착각하고 있다면 참다운 나를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라는 석가모니 설법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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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혜 작가, 소니도 시리즈 [SayArt(세이아트)] |
작품이 완성되려면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한다. 우선 캔버스를 만들어야 한다. 대개 그는 한지를 사용해 캔버스를 구성하는 데 초배지를 두르고 한 참 시간이 지난 뒤에 배접을 한다. 바탕이 되는 캔버스를 만드는 일은 그가 접할 새로운 우주의 청사진이다.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그는 이 한지 위에 직감에 따른 우주를 만들어 내야 한다. 캔버스가 마련되면 그 위에 여러 날 공을 들여 실로 엮은 직물을 나누어 붙인다. 서둘러도 안 된다. 패턴이 자리를 잡는 건 마치 화초가 성긴 땅에 뿌리를 내리는 것과 같다.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 이런 작업은 더디게 서너 달 이어가야 한다.
그는 여러 번 미술이 자기를 살렸고 철들게 했다고 했다. 젊은 시절 가슴 벅찼던 '화기'는 이제 물러났다. 인간사 누구나 맘속에 맺힌 '분노'가 있을 테지만 그의 그것은 이미 먼 길을 떠난 객이었다.
최근 그의 작품은 형식과 색상이 더 단출해졌다. "곡선은 감정이고 직선은 이성이죠." 간편한 설명이지만 카오스 같던 그의 우주가 이런 단출함으로 정리되기까진 폭풍처럼 몰아치던 수십 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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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혜 작가, 소니도 시리즈 [SayArt(세이아트)] |
그는 가끔 광릉 수목원 봉선사에 들려 맘을 식힌다. 종교적 이유는 없다. 그저 대웅전에 들어서 호흡을 내리고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다. 그러니 부처님에게 일체 무언가를 내놓으라는 요구도 없다. 돌아오는 길엔 근처 식당에 들러 낯선 종업원과 동무가 돼 허기를 달래니 이보다 좋을 건 없다고 한다.
김성혜 작가는 평생 미술에 허기졌다. 그는 다시 캔버스 앞에 서서 빈속을 채우기 시작한다. 그는 인터뷰 중에 "삼베에 번지는 먹이 제일 깊은 맛이 난다"고 했다. 다시 김 작가가 선 한지 캔버스 위엔 어느덧 그가 자연스레 번지기 시작했다.
KPI뉴스 / 제이슨 임 아트전문기자 Jasonyim@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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