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으로 대중과 공유하는 시집 이끌어
한국 민중시 계열 좌장이자 타고난 서정시인
한국 문단의 거목 신경림 시인이 22일 오전 8시 17분 국립 암센터에서 숙환으로 타계했다. 향년 89세.
고인은 한국 시단이 지식인들만의 관념을 희롱하던 무렵, 농투성이들의 신명을 민요 가락에 담은 시 '농무'(農舞)를 쏘아 올려 한국 시의 새로운 흐름을 열었다. 이른바 '민중·민요 시인'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삶의 현장에 바탕을 둔 감성으로 누구에게나 깊은 울림으로 다가갈 시편들을 생산한, 특정 수식어가 따로 필요하지 않은 서정시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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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경림 시인 [뉴시스] |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벼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거나/ 고갯질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농무' 전문)
충북 충주군(현재는 중원군) 노은면 연하리 470번지에서 태어났다. 노은초등학교 재학 시절 충북도교육위원회 주최 글짓기 대회에서 장원을 차지하는 등 시 잘 쓰는 아이로 통했다고 한다. 평론가 유종호의 모교이기도 한 충주고를 거쳐 1955년 동국대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다.
시인의 본명이 '응식'인데, 충북 충주에서 일찍이 개화한 할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받는 손주로 자랐다. 할아버지는 손주와 겸상을 하지 않으면 숟가락을 들지 않았고, 기대에 못 미친 아들은 응식의 어머니와 할머니랑 같이 밥상을 받았다. 인삼 녹용 따위는 손주에게 먹였다. 키가 작은 이유가 어린 시절 삼을 많이 먹어서 그렇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응식의 지극한 행복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는 7살 때까지 지속됐다. 이후 아버지는 광산에 손을 대고 빚을 지고 바람을 피우는, 불쌍한 이들 보면 집으로 데려와 보살피는, 사람은 좋지만 식구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그런 캐릭터로 살았다.
응식은 초등학교 때부터 문재를 발휘해 주목받았다. 노은초등학교 6학년 때 수학여행을 다녀왔는데 충북에서 주최한 문예백일장에서 그 학교 출신이 장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교장을 비롯해 담임은 물론 집안 사람들까지 철석같이 응식이 그 주인공이라고 믿었다. 정작 시상식장에서는 아버지가 장날이면 술에 취해 끌려가는 산지기 집 아들이 불려나갔다.
이때 응식이 받은 상처는 "깊고 질겼고 오래 갔다"고 소설 '시인 신경림'에 이경자는 기술했다. 고교시절엔 전국 문예백일장에서 장원도 했고 동국대 영문과에 들어가 대학시절 '문학예술'을 통해 시를 추천받아 시인으로 나온 건 이미 알려진 대로다. 이경자의 글을 따라가면 산지기집 아들이 준 상처는 신경림을 겸손한 '권력'으로 만드는 데 기여한 무의식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동국대 입학 이듬해에 '문학예술'지에 '갈대' '낮달' '석상' 등이 추천돼 등단했다. 건강이 나빠 낙향해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이후 농사, 공사판 노동, 광산일 등 온갖 일을 경험하며 약 10년간 절필했다. 충주읍내에서 만난 김관식 시인의 조언에 따라 1965년 상경해 서울 홍은동 산1번지에 살며 다시 시를 창작했다. 현대문학사, 희문출판사, 동화출판사 등에서 편집일을 보며 생계를 꾸렸다.
신경림의 시에서는 늘 슬픈 정조의 노래가 들린다. 그 노래는 삭막한 생활 속 누군가의 가슴을 파고들어 헛헛하고 쓸쓸한 삶을 위무해주는 탁월한 기능을 수행한다. 그의 시에서 그러한 슬픔을 지탱하는 한 축은 너무 빨리 사별해버린 그의 아내가 만들었다.
충북 노은면에서 상경해 김관식 시인의 집에 세 들어 살다가 겨우 집 한칸 장만해 이사했는데 그의 장남이 만 6살이던 때 아내는 갔다. 그러니 결혼생활 길어보았자 6∼7년이다. 그 사이 시인은 얼마나 나고 드는 '건달'의 방황을 반복했던가. 그 아픔이 그의 초기 시 곳곳에 배어 있다.
"아내가 고향에 가 묻히던 날은 비가 내렸다/ …비가 내렸다 그녀와 헤어지던 그 가을/ 무력한 내 손에 꽂히던 연민과 경멸의 눈빛/ 머리칼이 젖고 목덜미가 젖고 나뭇잎이 젖고/ 우리들 오랜 떨림과 기쁨이 젖고…// 그날도 비가 오리라 내가 세상을 뜨는 날/ 벗어놓고 갈 헌 옷과 신발을/ 허위와 나태의 누더기를/ 차고 모진 빗줄기로 매질하면서"('비'에서)
1970년 10여년간의 침묵을 깨고 '창작과 비평'지에 '파장'을 발표했다. 홍은동 동네 어귀에서 만난 술취한 두 젊은이를 보고 지은 시인데 문단에서는 "민중시의 물꼬를 텄다" "문학과 현실이 처음으로 하나의 육체를 만났다"는 등의 찬사가 이어졌다. 이후 핍박받는 농민의 애환을 노래한 '원격지'(1970) '산읍기행'(1972), '시제'(1972) 등을 발표했다.
첫 시집 '농무'를 1973년 펴냈다. 민요 정신을 계승한 소박한 언어로 붕괴돼가는 농촌의 삶과 산업화 이면의 궁핍상을 절절하게 노래한 이 시로 이듬해 제1회 만해문학상을 수상했다. 1975년에는 고은, 백낙청, 박태순, 이문구, 염무웅 등과 함께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창립했다.
1984년 광주민주화항쟁 직후 후배 유해정 등과 함께 민요연구회를 만들었다. 우리 사회를 오염시킨 미국과 일본 문화에 대항해 건강한 우리 문화를 만들고, 80년대 독재정권의 탄압에 봉쇄된 사람들의 공간을 확보하자는 것이었다. 민요기행을 통해 채집한 가락과 정서를 녹여 만든 시집이 '민요기행'(1985)과 '길'(1990)이다. 장시집 '남한강'을 1987년 발표했고 90년 제2회 이산문학상을 수상했다. 1992년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을 역임했고 98년 '벽초 홍명희 문학비 건립 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았으며 2001년 제6회 현대불교문학상, 제2회 4·19문화상,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농무' '새재' '달 넘세' '가난한 사랑노래' '길' '쓰러진 자의 꿈'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뿔' '낙타' '사진관집 이층' 등과 장시집 '남한강', 산문집 '민요기행 1, 2'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1, 2' '바람의 풍경' 등을 남겼다. 생전에 만해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단재문학상, 대산문학상, 시카다상, 만해대상, 호암상 등을 수상했으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과 동국대 석좌교수를 역임했다.
대한민국 문인장으로 치러질 예정이며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25일 오전 5시30분, 장지는 충주시 연하리 선영. 시인은 이제 그를 유혹하던 '강 저편'으로 무사히 건너갔을까.
"장되쟁이는 침방울을 튕기며 이승 얘기를 하고/ 할머니는 맞장구로 빈 잔을 채울 거야/ 할아버지는 돋보기 너머로 식물도감을 훑고/ 아버지는 조합 숙직실에서 마작으로 밤을 새우겠지/ 아내는 오늘도 뜨개질을 할까/ 대추나무에 와 걸리는 바람소리에도 몸을 떨며/ 친구들은 누룩이 뜨는 밀주집 뒷방에서/ 화투판 투전판으로 나를 유혹하고// 저승인들 무어 다르랴 아옹다옹 얽혀 살던/ 내 가족 내 이웃이 다 거기 가 살고 있는데"('강 저편')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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