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때려 '일본의 안전문제로 투쟁한 정치인' 이미지 획득
이번엔 '한국 때리기'…'중국의 어부지리'는 아베의 예상 밖
아베 신조(安倍晋三)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총리의 후계자다. 1993년 중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아베는 1995년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고이즈미를 지원했다. 이후 2000년 7월 제2차 모리 요시로(森喜朗) 내각에서 고이즈미의 추천으로 정무담당 내각관방 부장관(다른 나라의 국무부 차관이나 국무조정실장에 해당)이 된다.
이듬해 고이즈미의 지원으로 자민당 간사장 대리가 된 아베는 고이즈미 내각에서 정치인으로서 일생일대의 기회가 된 역사적 사건을 접한다. 북한의 일본인 납치 사건이 그것이다. 그 일생일대 사건의 '복선'은 1997년에 깔렸다.
아베의 정치 인생 바꾼 김정일의 '통 큰 자백'
아베는 1997년 2월 절친인 나카가와 쇼이치(中川昭一) 전 재무상과 함께 '일본의 앞날과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의원모임'(日本の前途と歴史教育を考える会)을 결성해 사무국장을 맡아 교과서 개정운동을 주도한다. 또 그해 요코다 메구미 가족을 중심으로 '북한에 의한 납치피해자 가족연락회'(가족회)가 발족하자 동료 의원들을 규합해 '북한 납치의혹 일본인 구조 의원연맹'을 결성했다.
아베는 나중에 자신의 책에서 일본인 납치문제를 '일본 안전보장에 관한 중대문제'로 인식했다고 썼다.
"내가 납치문제 해결에 몰입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일본의 주권이 침해되고 일본 국민의 인생이 침해받았다는 사실의 중대함에 있었다. 일본 안전보장에 관한 중대문제다."(아베 신조, <아름다운 나라로>(美しい国へ). 文藝春秋, 2006년, 46쪽)
정치권의 일본인 납치문제 전문가가 된 아베는 자민당 간사장대리 자격으로 2002년 9월 17일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에 동행한다. 그리고 북일 정상회담의 역사적인 현장에서 아베는 김정일로부터 충격적인 고백을 듣게 된다.
"과거에 북한의 대남 공작기관이 열세 명의 일본인을 납치했는데 여덟 명은 죽었고 다섯 명이 살아 있습니다."
김정일이 북일 수교회담을 진척시키기 위해 '통 큰 자백'을 한 것이다. 북한은 그때까지 납치 문제는 없다는 태도였다. 김정일은 공작기관의 일본어 교육과 남한 잠입을 위해 납치했다고 인정했다. 김정일은 일본이 확인을 요구해 온 11명의 생사여부 외에 요구가 없었던 3명의 생사여부까지 통보해 주었다.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일본인 납치를 공식 시인한 이 '통 큰 자백'은 아베의 정치 인생과 동북아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일대 사건으로 확대되었다. 당장 일본의 언론과 여론이 들끓고 우익의 목소리가 거세졌다.
아베는 "김정일 위원장이 납치에 대해 국가적 관여를 인정하고 사과하지 않으면 평양선언에 서명해선 안된다"고 진언했다. 고이즈미는 고심 끝에 이런 요구를 북측에 전달했다. 김정일은 이번에도 뜻밖에 일본인 납치 13명의 납치를 인정하고 사과했다. 아베의 강경 카드가 먹힌 것이다.
북한 때려 '일본의 안전문제로 투쟁한 정치인' 이미지 획득
정상회담이 끝나고 그해 10월 생존한 납치 피해자 5명이 북한 복귀를 전제로 일본 땅을 밟았다. 일본에서 논란이 벌어졌다. 국가 간 약속이기 때문에 돌려보내야 한다(외무성)는 의견과 돌려보내지 말아야 한다(정치권)는 의견이 맞섰다. 아베는 고이즈미로부터 '정부 방침으로 송환 불가' 결정을 이끌어냈다. 아베는 일본 언론에서 원칙 있는 정치인으로 주목받으며 우익의 새 지도자로 떠올랐다.
고이즈미는 2003년 9월 아베를 자민당 간사장으로 발탁했다. 각료 경력도 없는 3선 의원이 집권여당 간사장에 취임한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국정 전반에 대한 체계적인 경험을 쌓은 의원 경력 13년의 아베는 2006년 9월 대망의 집권 자민당 총재로 등극했다.
바로 그해 7월 북한의 미사일 발사도 그가 총리가 되는 데 '큰 힘'이 됐다. 자타가 공인하듯, 일본 국민에게 각인된 '자국민의 안전문제로 투쟁한 정치인' 이미지가 아베의 결정적 자산이 되었다. 북한을 때려서 우경화된 일본 국민의 지지를 획득한 것이다.
"내가 납치문제에 목소리를 낼 때, '우익 반동'이라는 레테르가 붙을 것을 걱정해 소수의 의원들만 운동에 참가했다. 사실, 그 후 우리들은 미디어의 비판에 몸을 제물로 바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응원하고 있다'는 의원은 많았지만, 함께 행동하는 의원은 많지 않았다. '투쟁하는 정치가' 수가 많지 않은 것은, 유감스럽지만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다."(아베 신조, <아름다운 나라로>(美しい国へ). 文藝春秋, 2006년, 4쪽)
1970~80년대에 발생한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사건에 대해 현재 일본 정부는 17명을 납치피해자로 공식 인정하고 있다. 이에 반해 북한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2년 9월 고이즈미 총리와의 수뇌(정상)회담에서 일본인 납치를 인정하고 같은해 10월에 5명의 피해자를 귀국시켰다.
북한은 이후 "납치문제는 이미 해결된 문제"라고 주장하지만 일본 정부는 "납치 문제는 일본의 국가주권 및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관한 중대한 문제로서 이 문제의 해결 없이는 일조(일본-조선) 국교정상화는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와 관련 기자는 김정일-고이즈미 북일 수뇌회담 당시 북측 통역을 맡았던 황호남 북한 '종군위안부 및 태평양전쟁 피해자 보상대책위' 서기장(현 대외문화연락위원회 부위원장)을 평양에서 인터뷰한 적이 있다. 또한 기자는 납치 문제가 논의된 노무현-고이즈미 한일 정상회담을 2~3회 취재한 적이 있다.
이에 대한 북한의 입장은 확고했다. 일제의 강탈정책으로 20만명의 조선여성이 성노예의 비참한 운명을 강요당했는데도 불구하고 일본은 '한줌도 안되는 납치'를 구실로 피해자로 자처하면서 그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는 것이다.
2004년 12월 일본 가고시마(鹿兒島)현 이부스키(指宿)시 정상회담에서 고이즈미 총리는 북핵문제와 납치문제의 동시해결 방침을 밝혔다. 이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은 "일본 국민이 이(납치문제)에 대해 감정의 상처를 입고 분개하는 것은 잘 이해가 간다"면서 "그러나 그것은 국민의 입장이고 책임있는 지도자들은 국민과는 다른 판단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대북 경제제재를 완곡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고이즈미와 그의 후계자 아베는 '국민 감정'을 따르거나 오히려 부추기는 쪽으로 갔다. 실로 아베는 많아야 17명인 북한의 일본인 납치자 문제와 적게는 10만, 많으면 20만 명인 강제 연행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등치'시킨 '두 얼굴의 정치인'이었다.
김정일-김정은은 대(代)를 이어 아베와 '적대적 공생'
아베는 1기 내각(2006. 9~2007. 9) 당시 총리대신이 본부장을 맡고, 납치문제 담당대신, 내각관방장관 및 외무대신을 부본부장으로 하고, 모든 국무대신이 구성원으로 참여하는 납치문제대책본부를 발족해 현재도 이를 운영하고 있다. 이처럼 아베는 북한의 일본인 납치 사건과 그 해결사 역할을 자신의 정치적 브랜드로 삼았다. 오죽하면 '납치의 아베'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다.
또한 2006년 7월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와 10월 발생한 북한의 1차 핵실험은 아베의 대북 강경책이 옳았다는 신념을 강화했다. 당시 국제사회와 UN은 '안보리 결의안 1695호'(북한 탄도미사일 프로그램 관련 모든 활동 중단 요구)와 '안보리 결의안 1718호'(북한 핵실험 규탄 및 경제제재 결정)를 채택했다.
이처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납치문제에 대한 '통 큰 자백'과 핵실험으로 아베의 1기 내각 수립에 기여했다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쏴서 대를 이어 아베 정권의 '근육 만들기'에 기여했다.
지난 2016년 7월 제24회 참의원 선거 이후에도 아베는 모리토모(森友)학원과 가케(加計)학원 스캔들로 지지율이 20~30% 대까지 폭락하는 큰 타격을 받았다. 그런데 다름 아닌 김정은 위원장이 아베를 위기에서 구해줬다. 북한은 2017년 7월말 ICBM을 발사해 일본 열도를 패닉에 빠트렸다.
이에 아베는 안보불안 심리를 활용한 '북한 때리기'로 지지율을 40% 대로 회복했다. 아베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9월 중의원을 해산하는 결단을 내려 10월 중의원 선거에서 다시 한번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것도 아베가 이끄는 연립여당의 개헌 발의선(2/3 의석) 확보라는 의미있는 승리였다. 김정일과 김정은이 대(代)를 이어 아베와 '적대적 공생' 관계를 유지하는 셈이다.
납치문제에 대한 아베의 집요함은 일본을 방문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납치 피해자 가족을 두 번 만나도록 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트럼프는 2017년 11월에 이어 2019년 5월에도 메구미 모친 등 피해자 가족을 만나 "납치 문제는 항상 내 머릿속에 있다"며 "납치 문제를 북미 정상회담에서 제기하려고 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베는 트럼프 대통령을 통해 일본인 납북 피해자 문제를 부각시킴으로써 자신이 잊지 않고 있음을 대중에게 상기시켰다.
지금도 총리 직속의 납치문제대책본부 홈페이지에는 일본인 납치문제 계몽 애니메이션 〈메구미〉를 링크해 놓고 일본어는 물론, 영어·중국어·한국어·러시아어·불어·스페인어·독일어·이탈리아어로 시청할 수 있게 해놓았다. 반면 일본은 '2014 프랑스 앙굴렘국제만화페스티벌'에서는 관객들이 위안부 애니메이션을 관람하는 것을 방해하는 등 국제사회에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준 바 있다.
흔히 일본인은 '혼네(本音, 속마음)'와 '다테마에(建前, 겉표현)'가 다르다고 하지만, 특히 아베는 일본 역사의 과오를 인정했다가도 납치자 문제로 뒤통수를 치는 언행을 되풀이해왔다. 일본군 위안부(성노예) 문제에 대한 접근방식도 그런 대표적 사례다.
그런 점에서 아베는 북한을 '이지메'(집단적 괴롭힘) 해서 지지율과 정치적 승리를 확보한 대표적인 극우 정치인이다. 이런 극우세력에게는 가치판단의 기준이 '북한'이라는 '악의 축'이다. 2019년 7~8월 아베의 1·2차 경제 보복 조치를 통한 '한국 때리기'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아베 내각은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두고 '한반도 유사시'를 상정한 대응책을 발표하는 등 한반도 위기론을 끝없이 부채질했다. 그런데 남북 관계 및 북미 관계가 호전돼 북한의 위협이 사라지자 아베는 한국을 때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교과서, 독도, 위안부 문제 등의 과거사 갈등을 이용해 왔지만 북한에 대한 이지메가 어려워지자 자국민의 '반한' 감정을 최대한 자극하고 나선 것이다.
![]() |
| ▲ 일본 자민당 헌법개정추진본부의 개헌 홍보 메뉴얼 [자민당 홈페이지] |
아베의 '한국 때리기'로 지지층 결집에는 성공한 듯하다. 지난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연립 여당은 거의 개헌선(2/3)에 근접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아베가 2012년 2기 내각부터 발의한 자민당의 '헌법개정초안'은 천황의 국가원수 복권, 해외에서의 전쟁권 및 군대 확보, 그리고 전시의 국민권리 통제 등을 내용으로 하는 국가주의 파시즘적 요소를 담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야당 일부를 설득해 얼마 남지 않은 개헌선을 넘어서 '자위대'의 존재를 헌법 9조에 표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화웨이가 아니다'라는 해외의 비판에서 보듯, 아베의 '트럼프 따라 하기' 경제 보복은 한국의 피해와 자국의 자해 외에도 제3국(중국)의 어부지리라는 뜻밖의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크다. 대한(對韓) 무역보복이 궁극적으로 미국의 최대 라이벌인 중국의 어부지리로 끝날 것임은 아베가 미처 예상치 못한 경우의 수다. 이는 과거사 문제로 촉발된 한일 갈등이 '경제전쟁'을 넘어 한미일 2인3각 안보구도에 심각한 균열을 일으킬 수 있음을 의미한다.
KPI뉴스 / 김당 기자 dangk@kpinews.kr
[ⓒ KPI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