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살리는 정치’ 숙제 남기고 진보의 별이 되다

김당 / 2018-07-24 07:23:24
노회찬(1956~2018)의 정치와 어록

 

▲ 2008년 4월 한국 진보학계의 대부인 최장집 교수(오른쪽에서 두번째)와 조희연 교수(맨오른쪽)가 진보신당 지지선언을 하며 선거 캠프에 방문했을 때.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는 생전에 권력에는 당당했고, 약자에는 부드러운 정치인이었다. 그는 정치-경제 권력에 당차게 맞서 촌철살인의 비유와 풍자로 독설을 날리면서도 소탈한 인간적 풍모로 서민의 사랑을 받았다.

 

부산 출신으로 경기고에 들어가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대학 입학에 실패하자 재수 대신에 군대를 다녀와 늦깎이로 고려대 정외과(79학번)에 다녔다. ‘광주민중항쟁’을 계기로 민주화운동에 앞장섰으며, 대학 시절에 용접기술을 배워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인민노련(인천지역민주노동자동맹)을 출범시켜 노동자의 정치조직화에 힘쓰다가 감옥에 다녀와선 평생 진보정치의 외길을 걸었다.

그는 운동의 가치와 정치의 현실로 직조(織造)한 재치 있고 구수한 입담으로 수많은 어록을 남긴 대중 정치인이다. 그의 걸쭉한 입담이 대중에게 각인된 것은 2004년 17대 총선 때이다.

"50년 쓰던 고기판에 삼겹살 구우면 새까매진다. 이젠 삼겹살 판을 갈아야 한다."

그는 당시 '삼겹살 불판'을 예로 들어 '판갈이론'을 펼쳐 일약 스타 정치인 반열에 올랐다. 그후 몇 차례 정치적 위기가 있었지만, 그가 3선 정치인으로 유권자의 사랑을 받은 것은 민중의 눈높이와 진보적 가치를 일치시키려고 노력한 보기 드문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소탈했다. 노동운동가 출신으로서 생각과 언행을 일치시키려고 노력했다. 다른 진보정당 동지들과 함께 새로운 정치를 꿈꾸는 가운데 그는 세비를 당에 내고 한달 생활비 180만원으로 살았다. 그 돈으로 어떻게 의정활동과 생활이 가능할까?

노동운동을 하다가 만난 노회찬-김지선 부부는 고려대 정외과 선배인 박계동 전 의원 부부와 친하게 지냈다. 노회찬 부부는 한동안 박계동 부부가 쓰던 침대를 썼다. 박계동이 송파구로 이사가면서 집이 좁다며 침대를 버렸는데, 김지선씨가 가져온 것이다. 그는 “아내랑 침대를 사자고 했지만 돈이 없어서 못 사고 한동안 박계동이 쓰던 침대를 그냥 썼다”고 별 일 아닌 것처럼 말했다. 생활비를 아끼느라 옷은 아파트 단지에 재활용품 모아놓은 데서 주워 입기도 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열정적이었다. 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한 뒤에 주로 법제사법위원회에서 활동했다. 법사위는 교섭단체들에는 매우 중요한 ‘길목’이지만 의원들한테는 표에 도움이 안되는 비인기 상임위다. 그는 아무도 안 가려는 법사위에서 사법개혁을 위해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했다.

의원회관에 에어컨이 가동되지 않는 주말과 저녁에도 그의 방은 국정감사를 준비하느라 밤늦게 불이 켜져 있었다. 그는 법사위 첫 국감에서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고 하는데 1만명만 평등한 것 아닌가"라고 사법부를 질타해 눈길을 끌었다. 비슷한 시기 여의도 정치권에서 종북(從北) 논란이 일 때는 "원조 종북이라면 박정희 장군"이라며 새누리당에 맞불을 놓기도 했다.

그는 늘 소수 야당이었지만 때로는 여당의 최재천 의원(열린우리당)과 공조해 국회 예결위에서 “현재 미국이 한반도에서 추진하고 있는 ‘주한미군 지역역할’은 북한과 중국에 대한 선제 군사개입을 위한 것”이라고 폭로해 노무현 정부를 곤혹스럽게 했다. 학계 일부에서 ‘주한미군의 지역역할’과 ‘전략적 유연성’이 중국과 북한을 향한 것이라는 주장을 펼친 적은 있지만, 정부 문서로 공식 확인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다. 그가 공개한 ‘주한미군 지역역할 수행 대비책’ 문건은 최재천 의원이 토스한 것이었다.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그는 진보신당 대표 시절인 2009년 4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박연차 태광실업회장 돈을 아내 권양숙씨가 받았다고 고백한 것과 관련, "참 구차하다"고 독설을 퍼부었다. 이후 노 전 대통령이 투신하면서 한동안 노무현 지지자들의 ‘표적’이 되었다.

2010년 서울시장에 출마해 진보정당 후보로는 처음 완주했을 때도 그는 ‘판갈이론’을 들고 나왔다. 하지만 한명숙 후보가 석패하고 오세훈 후보가 서울시장으로 당선되자 그는 민주진영의 ‘역적’으로 몰렸다. 이후 2012년 총선(서울 노원병)에서 당선됐지만, 삼성 X파일 사건으로 의원직을 상실해 ‘백수’가 됐다.

그럼에도 그는 늘 낙천적이었다. 그는 2013년 '삼성 X파일' 사건 폭로로 대법원에서 징역형 확정 판결을 받은 직후 "폐암 환자를 수술한다더니 폐는 그냥 두고 멀쩡한 위를 들어낸 의료사고와 무엇이 다른가"라고 개탄했다.

원숭이띠인 그는 나무에서 떨어질 때도 있었지만 오뚝이 정치인이었다. 검찰과 사법부는 그의 의원배지를 떼었지만, 그는 2016년 20대 총선에서 심상정과 함께 둘뿐인 정의당 지역구 의원으로 다시 국회에 입성했다.

그는 여전히 판을 바꾸는 전복을 꿈꾸었다. 그는 2017년 신년 연설에서 "최순실·박근혜 게이트는 20~30년 간 켜켜이 쌓인 문제가 터져 국민이 분노한 것"이라며 "여기까지 타고 온 1987년식 낡은 자동차를 이제는 새 자동차로 바꿀 때가 됐다"고 역설했다.

그는 독설만 내뱉는 정치인은 아니었다. 지난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하루 앞두고 문재인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쓴 조남주 작가, 동료 당직자와 보좌진, 국회 여성 청소 노동자, 국회 여성 기자들에게 장미꽃 260송이를 선물했다. 2005년부터 매년 같은 이벤트를 해온 그는 이렇게 말했다.

"권력의 힘으로 강제된 성적 억압과 착취,굴종의 세월을 헤치고 터져 나오는 현실을 보며, 부끄러운 마음을 감추기 어렵다."

그는 일찍이 2000년 1월 30일 민주노동당을 창당해 제도권에 들어온 뒤로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해 ‘노회찬의 난중일기’를 썼다. 그중에서 인상적인 것은 ‘울산바위는 울산에 있어야 한다’는 글이었다. 그는 노동자의 벗이 되는 진보정치의 험로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걸어왔다. 길이 아니면 가지를 않고, 길이 없으면 만들면서 걸어왔다”고 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자기자신에 엄격하고, 염치를 아는 정치인이었다. 그는 유서에 ‘경공모’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것에 대해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이었다”고 자책했다. 그는 “무엇보다 어렵게 여기까지 온 당의 앞길에 큰 누를 끼쳤다”면서 “법정형으로도 당의 징계로도 부족하다”고 했다. 이어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그가 세상을 등진 날, 최광웅 데이터정경연구원장은 정치개혁 3법(공직선거법, 정치자금법, 정당법)을 개정하자면서 “사람 잡는 게 정치냐?”고 반문했다. 노회찬(1956~ 2018)은 우리에게 ‘사람을 살리는 정치’에 대한 숙제를 남기고 진보 정치의 별이 되었다.

 

KPI뉴스 / 김당 기자 dangk@kpinews.kr 

[ⓒ KPI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김당

김당

S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