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다음 세상 여는 위험한 상상 절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 2022-08-18 11:24:22

사유 곁들인 치밀한 경찰소설 '재수사' 펴낸 장강명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인물들 빌려 새로운 척도 상상
한국사회 현안인 '공허'와 '불안'을 키워드로 접근
'신계몽주의' 제시,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가치 극복
"꼼꼼한 취재로 담은 형사사법시스템 생생한 현장"

'체포되지 않는다는 보장만 있다면 나는 태연히 살아갈 수 있었다. 그것은 내가 염치가 없거나 비열해서가 아니다. 내가 강해서도 아니다. 내가 자유롭기 때문이다. '살인하지 말라'는 인간의 법과 신의 법 앞에 무조건 복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치밀한 취재와 깊은 사유를 동원해 두툼한 경찰 소설을 펴낸 소설가 장강명.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소설가 장강명이 두툼한 2권짜리 장편소설 '재수사'(은행나무)를 펴냈다. 200자원고지 3000장이 넘는 분량이다. 강력범죄수사대 소속 형사 연지혜가 22년 전 발생한 신촌 여대생 살인사건을 재수사하는 과정을 세밀하게 전개한다. 범죄를 수사하는 경찰 시스템이 꼼꼼한 취재로 상세하게 드러난다. 이것만으로도 흥미로운 범죄소설을 구성하지만, 여기에다 살인자가 오랫동안 메모해온 기록을 홀수 장에 지속적으로 덧붙임으로써 '신계몽주의'를 표방하는 작가의 '다음 세상'에 대한 야심적인 생각들이 사유의 길을 안내하는 묵직한 소설로 빚어졌다.

'재수사'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인물 유형을 빌려왔다. 살인을 저지르고 혼란스러워하는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 뻔뻔하고 당당하게 살인을 합리화하는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화자, 논리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구현하려는 '악령'의 스타브로긴을 혼합한 인격의 살인자가 '계몽주의'의 틀에 갇힌 윤리와 의식을 깨부수는 역할을 한다.

장강명은 "이 소설을 쓸 때 두 가지 목표가 있었다"면서 "한국 형사들이 수사하는 과정을 과장된 액션이나 초능력 같은 도구 없이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경찰 소설"이 첫째고, "2022년 한국 사회의 풍경을 담고, 그 기원을 탐색한 작품"이 두 번째 목표였다고 '작가의 말'에 썼다. 그는 "2020년대 한국 사회의 가장 깊은 문제를 두 단어로 설명하라고 한다면 저는 '공허'와 '불안'을 꼽겠다"면서 "그 공허와 불안의 기원이 이 사회의 시스템에 내재되어 있고, 이렇게 설계된 사회에서는 누구도 공허와 불안의 함정으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날 수 없다"고 덧붙였다.

2011년 한겨레문학상에 장편 '표백'이 당선돼 문단에 나온 이래 각종 문학상을 휩쓸며 매년 작품을 생산해오다 최근 3년 동안 '장강명 2기'를 열 분기점으로 이 작품에 매달려왔다는 그를 서울 서교동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만났다. 



-'공허'와 '불안'을 작금 한국사회가 맞닥뜨린 근본 문제로 제시한 배경은?
"지구상에 여전히 가난한 나라들은 있지만 일단 절대 빈곤 같은 문제들은 대충 해결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별로 충만한 삶을 살고 있다는 감각을 못 느낀다. 삶의 어떤 목적성이나 방향을 다들 모르고 있고 말해주는 사람도 없는 것 같다. 미래를 두려워한다. 한 개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사회 차원에서도 그런 것 같다. 이런 문제를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이 사회의 결핍을 숙고하다가 공허와 불안이라는 현대사회의 핵심 키워드에 이르렀다."

-'악령'에 등장한 무신론자 외피를 빌려 이번 소설에서 '공허'에 대적하는 살인자의 논리를 전개했다. 신이 사라진 계몽주의 시대에 궁극적인 '공허'를 명징한 이성으로 인간들이 극복할 수 있다고 보는가.
"극복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 이 소설을 썼다. 중세나 고대로 돌아가지 않고 신 없이도 가치판단의 기준이 자기보다 큰, 그런 기준을 마련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다음 세상의 기초가 돼야 한다고 '재수사'에서 범인이 주장하고 있는데, 같은 생각이다. 소설에서는 '신의 재발명'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창조주의 재발명이 아니다. 한 개인보다는 거대한 가치 판단의 척도, 이런 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 것들을 명징한 언어로 포착할 수 있다고 본다."

-언제부터 도스토예프스키에 심취했는가.
"20대 초반 군대에 있을 때 도스토예프스키 책들을 접했다. 그중에서도 '악령'은 엄청나게 충격을 받은 '인생의 책'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무신론을 반박하려고 쓴 소설인데 작품 속 무신론자들 논리가 너무 설득력이 있다 보니 그때까지만 해도 천주교 신자였다가 무신론자가 돼버렸다. '까라마조프가 형제들'도 그때 읽었고, '죄와 벌'은 오히려 그다음에 읽었다. 다른 단편이나 '지하로부터의 수기'나 '백치'를 계속 읽었다."

▲장강명은 계몽주의가 받들어온 '행복 지상주의' 이데올로기를 소설 속 범인의 메모를 빌려 비판한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살인자는 쓴다. '행복이라는 개념이 극히 모호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길을 잃은 듯한 느낌에 빠지게 되었다. 행복을 추구하라고 하는데 정확히 무엇을 좇아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행복을 고통의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 보는 일반적인 해석 때문에 이런 혼란은 더 커진다. 예를 들어 성취감은 대개 행복으로 분류하지만, 이 감정을 느끼려면 괴로운 인내 과정이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 …낭만적인 이들은 그런 구분에 반발하며 현재 이 순간에 충실해야 한다고 외친다. 그들 역시 시간의 흐름과 관련된 특성을 무시하면서 행복의 많은 부분을 놓치기는 마찬가지다. 보통 사람들은 그 사이에서 오락가락할 수밖에 없다.'

-'다음 세상' 척도로 이른바 '신계몽주의'를 내세우고 있다. 현실적이고 효율적인 삶의 태도를 안내하는 내용들이 솔깃하다. 계몽주의가 집착하는 행복의 주박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대목을 부연한다면?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위대하고 물론 존경한다. 문명을 발전시켰고 장점이 많긴 하지만 인간의 심오한 욕구 중에는 계몽주의로 해결이 안 되는 것들이 있다. 인간을 너무 이상적 존재로 생각했다. 자유를 주고 충분히 교육을 시키면 다들 원하는 걸 자신들이 결정할 것이라고 보았다. 스스로 지도자를 뽑게 하고, 정치적 자유를 주면 민주주의가 잘 작동을 할 것이고 경제적 자유를 주면 필요한 재화를 각자 구입을 할 것이고, 자유가 있으면 사람은 당연히 최선의 대안을 찾고 그걸로 해결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사실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인간은 그 이상을 원하고, 자유는 도구적 가치이다. 사람에게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의미이다. 내 인생의 의미가 무엇이냐는 것에 대답을 하고 싶어 하고, 항상 그 의미는 자기 자신보다 거대한 것이어야 답이 된다. 자기 자신보다 거대한 무엇이 필요하다. 거대한 것을 위해서 헌신하고 그 거대한 것의 일부가 되고 이런 게 인간의 심오한 욕구 중에 하나인데, 계몽주의는 인간 그 자체가 목적이라고 주장을 하고 각자 자유를 얻으면 최선으로 생각했다."

-신계몽주의에서는 '진화된 신'이 필요한 것인가.
"그래서 '신의 재발명'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중세의 신으로 돌아가자는 얘기가 아니다. '객관적 가치'를 추구하자는 것이다. 계몽주의에서는 모든 사람이 그냥 각자의 주관적 가치를 추구하면 된다. 다만 어느 선을 넘지는 마라, 이 정도 답을 준다. 소설에도 썼지만 계몽주의는 좋은 개인에 대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좋은 사회에 대한 이데올로기다. 주관적 가치만으로는 사람이 공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주관적 가치를 추구하다가도 막히는 지점이 있고 힘든 때가 있을 때 자신 바깥에 있는 가치 척도가 필요하다. 중세의 신도 자신 밖에 있는 가치 척도였지만 그 척도와는 다르다. 그것은 우리가 찾아낼 수 있는 객관적 가치일 것이다. 우리가 만들 수 있고 찾을 수 있다."

▲장강명은 "최선의 대안으로 여겨 온 계몽주의는 인간의 심연에서 솟는 욕구들을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한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살인자는 쓴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트롤리가 달려오고 있다. 멀리 선로에 인부 다섯 사람이 묶여 있다. 내 옆의 뚱뚱한 남자를 밀어 아래로 굴려, 그 몸뚱이로 트롤리를 막을 것인가. 그렇게 해서 한 사람을 죽이고 다섯 사람을 구할 것인가. 신계몽주의는 이 딜레마에도 답을, 적어도 돌파구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앞에 놓인 선로에 다섯 사람이 묶여 있으며, 옆에 있는 뚱뚱한 남자를 밀어서 트롤리를 멈춰 세울 수 있을 때,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뚱뚱한 남자가 내 옆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도덕적 책임에 원근법을 도입할 것을 제안한다.'

-이를테면 '도덕적 책임의 원근법' 같은 것이 신계몽주의 시대의 객관적 가치 중 하나인가?
"그런 건 아니다. 그냥 어떤 윤리를 다루는 방식 중 하나일 뿐이다. 신계몽주의 자체는 이 소설에서 구체적으로 얘기하지 않았다.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게 신계몽주의이든 뭐든 우리가 다음 세상을 상상할 수 있고 해야 된다는 것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사회를 설계하려면 먼저 상상을 해야 한다. 지금 이 현대를 이루고 있는 것도 근대 사람들이 상상한 사회이다. 삼권분립이니 이런 것들을 누군가 처음 상상을 했고, 그 개념을 채택했다. 그 상상들이 등장할 때는 위험했을 것이다. 사회계약론 같은 위험하고 거대한 상상들을 해야 다음 세상을 우리가 움켜쥘 수 있다. 그 다음 세상을 상상하려면 지금 세상을 이루는 상상을 하나하나 검토를 해봐야 되는데 거기에 결함이 있다. 지금 현대인이 느끼는 심오한 불만족의 원인이 지금 현대의 설계에 있다. 그것을 보완하는 새로운 상상을 해야 된다. 여기까지가 제 생각이다." 

'재수사'는 살인자를 찾는 세밀하고 흥미로운 '경찰 소설'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살인자의 메모를 배치한 홀수 장은 건너 뛰어도 무방하지만, 이 대목만 따로 읽어도 신선한 사유의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 장강명는 '경찰 소설'을 쓰기 위해 많은 형사들을 인터뷰했고 흔쾌한 도움을 받았다. 동아일보 기자 출신인 그는 "경찰 기자 시절에는 피해자와 발표 결과에만 초점을 맞추었는데 막상 이번에 취재를 해보니 몰랐던 부분이 많았다"고 했다. 소설 속 살인자는 "내가 상대하는 것은 신이나 양심이나 내면의 목소리 따위가 아니고 멀어지는 사이렌 소리나 경찰 마크나 형사 한두 명도 아니었다"면서 "내가 상대해야 하는 것은 이 사회의 형사사법시스템"이라고 썼다.

▲장강명은 아내 김혜정 씨를 도와 온라인 독서토론 플랫폼 '그믐'을 9월 공식 오픈한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장강명은 "홀수 장에 담은 범인의 독백들을 다 빼고 읽어도 충분히 완성된 경찰 소설"이라면서도 "좀 위험한 상상 같은 것들이 있지만 한번 고민을 해볼 만한 질문들이니 그 부분들을 좀 눈여겨봐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많은 분량을 써내는 동안 슬럼프에 빠지기도 했다"면서 "이제는 충분히 더 방대한 이야기도 써낼 수 있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살인자의 입을 빌린 '궤변'이라는 외피를 씌우기는 했지만, 장강명은 자신의 생각이 스며들었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같은 불교의 교리를 부정하고 헤르만 헤세의 인기작 '데미안'의 논리를 뒤엎는 주장도 서슴지 않는다. 그는 "등단했을 때 논쟁을 두려워하지 않는 작가의 등장이 반갑다는 평을 들었다"면서 "지금은 그때보다 더 논쟁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번 작품도 어떤 눈치도 보지 않았다"고 맺었다. 살인자는 썼다.

'나의 불꽃심은 내가 살인자라는 사실이다. 그것이 내 정체성의 핵심이다. 내가 살인자라는 사실이 내게 힘을 준다.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도, 내가 살해한 민소림만큼 억울하지는 않다. 나는 죽음보다 약한 모든 시련을 감사히 받아들일 수 있다.'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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