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평생 감금돼 있던 나의 시인에게 용서를 구한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 2021-03-10 13:33:54

시집 '구시렁구시렁 일흔' 펴낸 소설가 박범신
시인을 꿈꾸었지만 산문가로 살아온 슬픔 담아
문학과 인생을 돌아보며 독자들에게 쓰는 손편지
"프로청년작가를 소금에 절여 숨을 죽이려는 시도"

"시인답게 사는 게 내 평생의 꿈이었지요. 산문의 세계는 기실 잔인하기 이를 데 없어 차마 마주 보기 두려웠어요. 그래서 나는 내 혼의 체형에 맞는 비애의 안경을 만들어 쓰고 세상을 보았으며 그 안경 너머의 세계를 오직 기록하며 살아왔어요. 그게 지금은 정한으로 남는군요. 나는 왜 행복한 이들의 이야기를 쓰지 못했을까.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존재하긴 존재하는가."

▲ 가슴 속에 시인을 품고 살아온 소설가 박범신. 그는 시집을 펴내면서 그동안 지향해온 '청년작가'에게 이별을 고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소설가로 48년을 살아온 작가 박범신(75)은 산문의 세계는 잔인하다고 진술했다. 소설은 논리의 그물망을 촘촘히 짜야 하고 감성과 이성, 엄격함과 직관이 동시에 필요해서 절반 정도는 학문적 접근이 필요한 장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박범신은 문학소년 시절부터 시인으로 살고 싶었지만 신춘문예 응모 시점에는 이미 소설의 길에 들어서서 지금까지 펴낸 소설책만 80여 권에 이른다. 그는 평생 산문의 세계에서 살아왔지만 늘 자신이 소설과 잘 맞는지 회의할 때가 많았다고 했다. 그는 '예인으로서의 작가'의 길을 걸어왔는데, 그 '예인'이란 문학보다는 노래나 춤 같은 장르에 어울리고 문학 중에서도 산문보다는 시에 더 가까운 기질을 지닌 사람이라는 것이다. 

 

엄격한 산문의 길을 걸어오느라 '슬픔'이 컸던 그가 이제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는 시집 하나를 얻었다. 2015년 이후 소설을 쓰지 않고 지내온 시간의 정서와 사유를 응축시킨 140여 편을 직접 손으로 쓰고, 그림까지 곁들여 담아낸 '구시렁구시렁 일흔'(창이있는작가의집)이 그것이다. 등단 30주년 기념으로 제자들과 출판 기념을 하자고 낸 기념품 성격의 시집이 있긴 하나, 정규 시집을 내는 건 처음이다. 말미에는 산문과 책으로 묶이지 않은 단편소설도 첨부했다.

 

"숙성돼지막창, 이라고 쓴 것을/ 숙성돼지하늘, 이라고 나는 읽는다/ 한낮의 홍제동 먹자골목에서// 숙성되면 막창도 하늘이다"('하늘')

 

 기쁨(喜), 노여움(努), 슬픔(哀), 즐거움(樂), 사랑(愛), 미움(惡), 욕망(欲) 등 7개 항목으로 나누어 시를 편집했거니와, 그 첫 항목의 첫 시는 막창도 하늘로 여기는 '기쁨'이다. 그는 지난 5년 동안 슬픔에만 침윤해 있었던 건 아니고,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의 인생과 문학을 더 깊이 들여다 볼 수 있었다고 했다. 그동안 줄기차게 달려온 관성으로 예상하자면 매년 장편 하나씩 써서 인터뷰하고 살았을 터인데, 어떤 의미에서 최근 몇 년은 정교한 프로그램에 따라 새로운 인생을 부여받은 것 같다고도 했다. 여전히 불안장애로 고통 받고 있긴 하지만, 그 고통이 주는 다른 축복들을 자신 안에서 만나고 있다는 것이다. 시집을 여는 '숙성되면 막창도 하늘'이라는 첫 시는 그런 맥락에서 나왔다.

 

"기쁨은 작게 슬픔은 크게 느낀 죄/ 죽음에서 삐어져나오는 아침부터/ 심연으로서의 저물녘 떡갈나무에게까지/ 경이감은 줄이고 균열은 늘인 죄/ 사랑으로 스스로의 자유를 제한한 죄/ 불똥에 불과한 걸 사랑이라고 말한 죄/ 부분을 전체라고 우긴 죄/ 자신이 탄 구명보트를 송곳으로 찌른 죄/ 진심을 부끄럽게 여겨 감춘 죄/ 여전히 슬픔과 균열을/ 삶의 밑바닥 대지로 삼으려 한 죄/ 오늘도 저리 눈은 내려 쌓이는데/ 무릎 꿇어 나의 원죄에게 경배 드리면서"('눈 오는 날')

▲ 박범신은 "나는 애오라지, 이야기하는 바람"이라고 썼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박범신은 '노여움'(努)의 항목에서 자신의 죄를 열거한다. 기쁨보다 슬픔을, 자유보다는 구속을, 진심보다는 균열과 자학을 선택한 죄를 고백한다. 그것은 예술을 탐하는 자들의 '원죄'이기도 하다. 그는 '시인의 방식'이란 한순간에 삶의 본질을 거두절미한 어떤 표현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여긴다. 그런 시인의 마음으로 볼 때, 산문가의 숙명일지도 모르지만 작가 박범신의 유리창은 얼룩이 가득할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그가 생각하는 시인은 한순간에 그런 단계로 넘어가는, 그야말로 빛나는 직관으로 본질에 가 닿는 그런 존재이다. 그는 직관으로 본질에 단숨에 육박하는 그런 방식을 너무 오랫동안 산문 속에 살면서 잃어버린 것 같다고 했다. 삶을 경영하는 것도 마찬가지여서 구구한 자의식이 많아, 좀 더 단순하고 맑게 볼 수 있는 것도 너무 많은 진술과 설명을 거느리는 것이 습관이 됐다고 했다. 그런 자의식은 슬프다고 했다.

 

"먼 바람이 와서/ 오래 씻겨 그러신가/ 먼 눈물이 와서/ 따뜻이 씻겨 그러신가/ 아니야 허공이 내려와/ 그대 몸에 깃든 게지/ 허공의 뿌리/ 허공의 사랑이 내려와/ 그대 뼈에 깃든 게지/ 내가 평생 되고 싶은"('자작나무는 왜 저리 흰가')


박범신은 그동안 세계에 대한 사랑이 훨씬 깊어진 것 같다고 했다. 자신 안에 깃들어 있는 무변의 허공 같은 것을 만나면서 잘 늙어가는 중이라고 했다. 예전에는 소설을 쓰지 않는 것은 삶의 의미가 없는 것으로 여기고 전투력이 가득했지만, 이제 소설로 영달을 꿈꾸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고 작가의 길을 등졌다는 뜻은 아니고, 오히려 더 깊이 깃들어 있는 상태라고 했다. 절필 후 다시 소설을 시작하면서 발표한 '흰 소가 끄는 수레'에는 두 작가가 등장하거니와, 하나는 줄기차게 써서 발표하는 인기작가이고, 또 하나는 평생 썼지만 한편도 발표하지 않는 작가이다. 그는 자신이 쓴 소설처럼 동일 작가인 두 분신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평생 감금되어 있던 나의 시인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은 아침이에요. 만약 용서받을 기회가 있다면 당신의 식탁 위에 시인이 된 내가 '가시 많은 생선'으로 눕도록 허락해주세요. 당신은 '슬로비디오로 내 몸의 가시를 바르고' 그럼 먼 데서부터 비가 내리고, 그리고 저기 저 호수가 한 뼘씩, 감청색으로 돌아눕는 꿈을 지금 꾸고 있답니다. 당신이 내 몸의 가시를 천천히 바를 때 시인이 된 내가 얼마나 행복할지 생각하면 온몸에 전율이 지나가요. 본래 '시인'인 나를 지금이라도 부디 '시인'으로 너그럽게 받아주세요."

 

이번 시집의 제목을 정하게 된 배경은 '그 너머'로 분류된 산문 항목에 수록돼 있다. '청년작가'를 고집하며 살아왔는데 기실 자신이 오래 겪어온 고통의 연원이 거기에 있었다는 자각을 했다. '구시렁구시렁 일흔'이라는 제목은 청년이기를 포기하는 명백한 표현이지만, 그는 "'아마추어 시인'의 권리로 '프로청년작가'를 소금에 절여 숨을 죽이려는 시도가 나를 위해 나쁠 건 없다고 여겼다"면서 "기운을 좀 더 빼서 되롱되롱 무심해질 수만 있다면 일흔 살이든 여든 살이든 나이가 왜 축복이 되지 않겠는가"라고 묻는다.

 

"젊을 때는 아내와 부부싸움을 하게 되면 버럭, 소리부터 질렀다. 아내는 그럼 대화의 창에 빗장을 채우고 아예 돌아앉기 일쑤였다. 전망은 늘 캄캄했다. 그러나 화가 나도 돌아앉아 구시렁구시렁하는 듯 싸웠더니, 요즘 부부싸움엔 싸움 안에서도 당연히 남는 빛이 있었다. 버럭, 하고 소리 지를 때 아내와 나의 관계는 전망 부재로서 '꼰대문화'였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구시렁구시렁 하고 마는 지금의 내 부부싸움은 남겨진 빛의 전망을 가졌으니 오히려 청춘의 이미지에 더 가깝다고 말하면 지나친 아전인수일까."

▲ '예인으로서의 작가'를 지향해온 박범신은 자신에게 산문은 스스로 견제하고 더 깊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못하게 만든 방부제였다고 술회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박범신은 이번 시집은 독자들에게 일일이 손으로 편지를 써서 전하는 자신의 심정을 담은 것이라고 했다. 편집 디자이너의 요구로 짧은 시간에 140여 편을 손으로 일일이 써내는 고통을 감내한 것도 주소를 모르는 독자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형식의 책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예기'(藝氣)가 승한 그는 자신이 그나마 문학을 선택했기에, 그 중에서도 산문의 길을 걸어왔기에 스스로 견제하고 더 깊이 다지는 노력을 끝없이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고 돌아보았다. 그는 "찰랑찰랑 머물고/ 얼쑤절쑤 흐르는가// 나는 바람/ 애오라지, 이야기하는 바람"('정체성1')이라면서 "어느덧 취꽃이 피었는데/ 왜 이리 맘 내려놓을 데 없나 했더니/ 네놈 태생이 바람이라 그렇구나/ 뒤돌아볼 거 없이 가거라/ 머뭇거리면 그게 바람이겠냐"('태생')고 썼다. '이야기하는 바람'은 이제 다시 어디로 불어갈까.

 

"'버럭'과 '구시렁구시렁' 사이, '청년작가'와 '노인'의 위험한 틈새, 거기에서 절로 비어져 나온 오욕칠정의 얼룩들을 실존적 나의 항아리에 쟁였더니 보아라, 그것들이 여기 '구시렁항아리'에서 지금 이렇게 발효되고 있는 중이다."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 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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