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건국훈장 독립운동가 김백평 "나치 협력 가능성"
양동훈
ydh@kpinews.kr | 2020-01-10 19:25:49
"일부 재독 한국인들 나치에 협력하면서 호화생활"
나치 통치 기간 베를린에 살았던 한국인 일부가 히틀러의 통치 아래 번창했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8일 UPI통신에 따르면 미국의 한국학 전문가 프랭크 호프만은 저서 '베를린의 한국인, 사진 속의 한국인'에서 1909~1940년까지 베를린에 살았던 한국인들의 삶을 연구했다. 그는 현재 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세운 괴뢰국이었던 만주국의 베를린 대사관에 관한 책을 집필하고 있다.
호프만은 UPI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베를린에 살던 한국인들의 이념적 불화와 우정의 해체 과정이 한반도의 분단과 궁극적 분열을 예고한다고 말했다.
호프만은 "1920년대 이들은 다른 정치집단들로 분화된다"고 말했다. 일부는 조선 왕조의 복권을 원했고, 일부는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등 다양한 성향이 생겼다. 그럼에도 그들은 서로 배척하기보다는 유대감을 유지했다. 비록 이념이 분화했지만 '조국 독립'이라는 핵심적 가치가 그들의 결속력을 지켜주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호프만은 이 핵심 가치가 사라진 시기를 1933년으로 꼽았다. 1933년은 히틀러가 독일의 수상이 되고 일본이 만주를 합병한 해다. 호프만은 "이때쯤 한국인들의 독립운동 열기는 완전히 죽었다"고 설명했다.
미국해전대학의 부교수이며 '석유와 열강: 영국과 독일, 1914년부터 1945년까지'의 저자인 아난드 토프라니는 당시 독일의 특수한 상황이 끼친 영향에 주목했다. 그는 당시 독일은 전시 경제에 필요한 주요 품목 모두가 턱없이 부족했다고 분석했다.
토프라니는 유럽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고무, 퀴닌(말라리아 치료제의 원료), 텅스텐 등의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나치 독일이 선택한 방법은 일본과의 무역이었다고 했다. 일본의 동맹국인 나치가 통치하는 현실에서 베를린 거주 한국인들의 행동 역시도 복잡한 분화를 겪을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호프먼은 "1945년 이후 한국인들의 결속력은 완전히 사라졌다"고 봤다. 6.25 전쟁을 앞두고 베를린의 한국인들은 남북한 중 한 곳을 선택해 돌아갔다.
"안중근 사촌 안봉근, 나치에 협력했다"
호프만은 부유한 가정 출신으로 고등교육을 받은 한국인들이 나치 치하에서 남부럽지 않은 삶을 누렸다고 말했다.
호프만이 대표적으로 소개한 인물은 김백평이다. 김백평은 3.1운동 당시 경성고등보통학교 대표자 자격으로 시위를 주도한 독립운동가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1년 2개월간 복역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한국에는 3.1운동 이후 독일로 떠나 생물학과 의학을 배웠고, 1930년대부터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호프만의 주장은 다르다. 호프만에 따르면 김백평은 나치 치하 의학계에서 성공가도를 달렸다. 히틀러의 찬사를 받았던 대표적인 우생학자 유진 피셔를 스승으로 두고 두 개의 박사학위를 받았다.
호프만은 김백평이 독일에서 우생학에 기초해 나치에 협력했을 가능성을 주장했다. 호프만은 그가 1960년에 매사추세츠주의 벨처타운 주립병원에서 일했음을 확인했다. 김백평의 유해는 2009년 송석준, 최능익, 이정호, 정명, 장용호 5명의 유해와 함께 미국에서 송환돼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또한 호프만은 익숙한 인물 한 명을 더 꼽았다. 안중근 의사의 사촌으로 알려진 안봉근이다. 안봉근은 베를린 올림픽의 영웅 손기정, 남승룡의 파티를 열어준 것으로 유명하다. 베를린에서 두부 장사를 하며 독립운동가들의 자금을 지원했다고 알려져 있다.
호프만은 안봉근 역시도 나치에 협력했다고 보고 있다. 나치는 전쟁으로 인해 식량공급이 어려워지자 필사적으로 육류 대체품을 찾았는데, 호프만은 안봉근이 나치의 콩 공급책이었다고 주장했다.
KPI뉴스 / 양동훈 인턴 기자 ydh@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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