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원로 학자들이 소설로 보여주는 새 세상 가는 길"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 2024-05-31 17:45:36
김민환 '등대', 안삼환 '바이마르에서 무슨 일이'
소안도의 실제 사건 축으로 동학사상 쉽게 풀고
바이마르로 건너가 동학 서학의 회통 도모하기도
"한국 문학 새 조짐 보여주는 중요한 의미 함축"
두 원로 학자가 나란히 '동학'을 지주 삼아 장편소설을 펴냈다. 팔순을 넘긴 연배에 같은 출판사(솔)에서 동시에 펴낸 '등대'(김민환)와 '바이마르에서 무슨 일이'(안삼환)가 그것이다. 김민환 고려대 미디어학부 명예교수는 언론학자로 살다가 은퇴한 후 보길도로 내려가 본격적으로 소설을 집필해왔고, 안삼환 서울대 독문과 명예교수도 연전에 '도동 사람들'을 펴낸 뒤 집필을 시작한 지 1년여 만에 새로운 장편을 펴냈다.
이들은 출판사가 기획한 것도 아닌데 공교롭게도 각자 동학을 천착한 소설을 써서 같은 시기에 펴냈다. 올해는 수운 탄생 200주년이고 동학농민혁명 130주년이라서 의미가 각별하다. 이들이 각기 다른 빛깔의 소설로 '동학'이라는 같은 깃발 아래 모인 것은 김지하 백낙청 김용옥 임우기로 이어지는 선구적인 동학 관련 저작과 담론에 힘입은 바 크다. 서로 다른 분야에서 활동해온 두 학자가 동학으로 만난 것은 그들의 말처럼 '운명'이면서 '필연'인 셈이다.
김민환은 '담징' '눈 속에 핀 꽃' '큰 새는 바람을 거슬러 난다' 등을 집필한 보길도에서 그곳 앞바다 소안도의 '등대'에 얽힌 역사를 접하고 어쩌다가 남해 외딴 섬에서 일찍이 항일운동이 거세었는지 탐색했다. 그는 장흥에서 괴멸한 동학군의 일부가 이곳 섬으로 들어와 새로운 사상을 전파한 흐름을 파악한 뒤, 이들의 이야기를 3년에 걸친 집필 끝에 선보였다.
소안도에는 '삼현'으로 불리는 세 명의 훈장이 교육을 담당하고 있었거니와, 그 중 맹선리의 서범규 훈장은 동학 서적들을 접하면서 학문적 관심으로 접근하다가 큰 깨달음을 얻기에 이른다. 어린시절 서당에서 수학했던 김민환은 이번 소설에서 훈장과 서당꾼들 입을 빌려 동학 사상을 대중적으로 쉽게 설파하는 큰 미덕을 발휘한다.
'나는 동학 공부를 통해 많은 것을 깨달았네. 서학에서는 하느님이 주인이고, 유도에서는 임금님이 주인이네. 그러나 동학에서는 사람이 주인이고, 또한 사람이 하늘이여. 동학을 통해 가장 크게 깨 달은 바를 든다면, 나는 바로 이것, 사람이 주인이고, 사람이 하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네. 사람이 누구여? '나'이고, 또한 '너'가 아니겄어? '나' 안에 하늘이 있고, 또 '너' 안에도 하늘이 있다는 것이여. 우리가 세상의 주인이고 우리가 하늘이란 것이여.'
서 훈장의 아들 서진하와 또래의 청년들은 동학의 사상을 깨우치며 시시각각 조선을 침탈해 병탄해 나아가는 일본의 움직임에 촉각을 세운다. 이들이 말미에 이르러 일제가 소안도에 세운 등대를 습격하기까지의 과정이 서진하와 일본 여인 미유키(미옥)의 애틋한 인연를 따라가며 전개된다. 소안도 삼현, 그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진산리 김양목 훈장과 그의 두 제자 훈장이 설전을 벌이는 대목들은 김민환이 당대의 흐름을 명쾌하게 정리하면서, 왜 '소중화론' '위정척사' 따위를 파기하고 제대로 세워야 할 '등대' 가 '동학'인지 높은 설득력을 발휘한다.
'그러고 보면, 동학이 우리한테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고 할 수 있어. 그야말로, 동학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우리 한테 새 길을 밝힌 것이여. 간추리자면, 내가 주인이 되어야 해. 백성이 주인이 되어야 해. 또한, 우리 민족이 주인이 되어야 해. 내가, 백성이, 민족이 주인 노릇을 제대로 할 때, 천도에 이를 수 있어. 천도를 얻는 방법이 뭣이여? 산속에 처박혀서 도사 흉내를 냄시로 도를 닦는다고 천도를 얻는 것이 아니여. 주인 된 나, 주인 된 백성, 주인 된 민족이 되면, 그것이 천도를 얻는 것이고, 그곳이 곧 하늘이여.'
김민환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주인 된 백성, 주인 된 민족이라는 새로운 프레임으로 사회를 개벽하고자 하는 동학이 있었지만 1930년대에 들어 지식인 사회는 사회주의가 휩쓸었고 해방이 되면서 극심한 좌우대립으로 치달았다"면서 "지금까지도 좌우가 공생 관계를 유지하면서 싸우고 있는데, 이쯤에서 우리는 서양의 이데올로기를 떠나서 주인 된 민족의 길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서 이 소설을 썼다"고 밝혔다.
'바이마르에서 무슨 일이'는 안삼환 서울대 명예교수가 지난해 바이마르에 다녀오면서 서구와 회통하는 동학 사상의 본질을 작금의 한국사회를 돌아보면서 풀어내는 장편이다. 독문학자로 살아온 안삼환은 "내가 지금까지 전공해온 서양철학이란 것이 서양인의 사고방식, 종교와 문화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다소 필요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그 철학이 우리 땅에서, 우리 한반도에서 우리가 당면한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막상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유감스럽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면서 "이 사실은 나 자신을 위해서나 내 나라를 위해서나 실로 허망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고 썼다.
불곡(佛谷)의 '할매 부처' 앞에서 조우한 독일 여성들과의 인연으로 바이마르에 간 소설 속 인물 최준기는 동학의 후예다. 조부 최내천, 부친 최여경을 거쳐 그에게 이르는 근현대사의 아픔을 통해 이땅의 곡절을 드러낸다. 할매부처는 물론 괴테와 죽은 부친 등 다양한 '귀신' 화자가 등장해 종횡으로 작가의 생각을 삼투해낸다. 독일 예나대학에서 동학 사상 강연을 하며 '파우스트'가 품은 '하늘'과 동학의 '하늘'이 어떻게 회통하는지 톺아본다. 안삼환이 생애 내내 공부했던 독문학의 중심 인물 중 하나인 괴테는 최준기에게 나타나 훈계한다.
'나 괴테는 그대가 청년 시절에는 나보다 쉴러를 더 좋아했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바이마르 궁정에 초빙되어 군주에게 봉사하고 나중에는 귀족 칭호까지 받은 나를, 젊은 그대가 좋아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나는 이해한다, 대학생 시절의 그대는 신군부 독재에 항거하던 열혈청년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대도 깨달았는가? 이상주의만으로는 그대의 조국과 그대 자신의 공동체를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 한때는 '빨갱이'라고, '친일파'라고 서로 욕하며, 칼부림, 총싸움이 극성이더니, 요즘은 그 '이름'만 더 지독해졌단 말이냐! 그렇게 서로 자기주장만 되풀이할 뿐, 상대방을 무조건 비방만 하고 있으니, 쉴러의 위대한 이상주의가 거기로 간다하더라도, 오히려 독이 되어 너희들의 싸움에 부채질만 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구나!'
최준기는 바이마르에서 괴테의 훈계가 아니더라도 낙심천만이다. 그는 "어리석은 지도자를 뽑아놓고는 온 국민이 아첨꾼들과 비판자들로 분열되어, 무엇이든 자기 편 말만 옳고 상대방의 말은 거짓말이라고 우기면서, 언어의 본원적 의미마저 왜곡하고 있다"고 탄식한다. 그가 잠시라도 이 나라를 떠나고 싶었던 속내는 계속 이어진다. "정치적 망발과 시대착오적 발언들을 무조건 지지하는 상당수의 보수적('보수'라는 개념이 심히 왜곡되었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는 차라리 '이기적'이라 해야 맞을 것 같다) 국민에 대해 내가 매일같이 느껴야 하는 이질감을 참기 어려웠기 때문이기도 했다."
기자들과 만난 안삼환은 "독문학자가 갑자기 변심을 한 게 아니라 바로 서양문학을 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이라면서 "평등 민주 사상을 품은 동학은 우리 근대의 태동으로 봐야 하고 촛불혁명의 맨 위에 있다"고 역설했다. 그는 "늦게 작품을 쓰기 시작한 게 오히려 의미가 없지 않겠다는 생각도 간혹 들었다"면서 "그나마 아직은 총기를 잃지 않은 노인의 시각으로 내가 살아온 시대를 한번 뒤돌아보는 그런 글쟁이도 이 복잡한 나라에는 한둘 필요할 듯했다"고 썼다. 소설 마지막 대목에서 작가의 분신인 최준기가 간절하게 밝힌 소원은 "'자유'를 핑계로 '통일'을 한없이 미루지 않고, '통일'을 지상 과제로 내세워 '자유'를 억압하지도 않는 나라"이다.
두 소설을 펴낸 솔 출판사 대표 임우기 평론가는 "한국 문학에는 조로 현상이 있는데 두 선생님들은 80이 넘으셨는데도 이런 훌륭한 작품을 썼다"면서 "이 사실 자체가 작금 한국 문단에서 중요한 의미를 함축하는 것으로, '옛것이 새로워지는' 동학의 '원시반본(原始返本)'을 두 분이 보여주는 양상"이라고 평가했다.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 KPI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