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 국가 보호 의무 외면한 판결…'간첩 조작' 납북 어부의 피눈물은 진행형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 2026-09-18 16:35:27
17일 법원 '국가가 어부 보호 의무 소홀히 했다고 보기 어려워'
납북 귀환 어부들의 마음을 또다시 무겁게 만든 아쉬운 판결
'납북 귀환 어부 인권 침해 진상 규명 특별법' 속도 붙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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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치, 고문, 간첩 조작. 하나같이 무시무시한 일이다. 이 가운데 하나만 겪어도 한 사람의 삶 전체가 망가지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
납북 귀환 어부 상당수는 세 가지를 모두 겪어야 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 후 많은 어부가 동해와 서해에서 조업하다가 북한 경비정에 나포돼 끌려갔다. 기관 고장 등으로 선박이 북측 수역에 표류했다가 붙잡혀 오랫동안 억류되기도 했다.
남한으로 돌아온 후에도 가혹한 시련을 견뎌야 했다. 다수가 수사 기관에 불법 구금돼 고문을 당하고 간첩으로 조작됐다. 만신창이가 돼 장기간 옥살이를 한 후에는 수십 년간 감시와 사찰을 받았다. 연좌제로 인해 가족까지 진학, 취업 등에서 피해를 봐야 했다.
1960~1970년대 박정희 정권 시기와 1980년대 전두환 집권기에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고문 기술자 이근안처럼 간첩을 조작하던 수사·정보 기관 관계자들에게 납북 귀환 어부는 손쉬운 표적이었다.
1987년 6월항쟁을 분수령으로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납북 귀환 어부를 표적으로 삼은 간첩 조작 등의 진상이 서서히 드러났다. 하지만 3000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납북 귀환 어부의 고통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피눈물을 흘려야 했던 이들의 마음을 또다시 무겁게 만드는 판결이 17일 났다. 이날 서울고법 춘천재판부 민사2부(심영진 부장판사)는 납북 귀환 어부와 그 가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납북 당시 국가가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원고 측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심과 마찬가지로 '국가가 어부들을 보호할 의무를 소홀히 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그 부분에 대한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재판부가 원고 측 주장을 모두 수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들이 남한으로 돌아온 후 겪은 불법 구금 등 위법한 공권력 행사로 인한 피해와 관련된 위자료 액수를 1심 판결보다 소폭(200만~1000만 원) 늘렸다. "50년 전에 위법한 수사에 기초해 내려진 유죄 판결이 재심으로 시정될 때까지 겪었던 불명예와 고통"에 대해 사법부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사과도 했다.
사과 부분이 의미 있기는 하지만, 10대이던 1970년대 초 동해에서 납북됐다가 귀환 후 간첩으로 몰린 김춘삼 동해안납북귀환어부피해자시민모임 대표를 비롯한 원고들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판결이었다. 이들에게는 위자료 액수보다, 국가가 어부들을 보호할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점을 인정받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1970년대 전후 상황을 되짚어 보면, 원고 측 주장에 귀를 기울일 만한 부분이 적잖다. 어선 납북이 되풀이되던 때인 만큼, 원고 측 주장대로 납북 위험을 국가에서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는 점도 그중 하나다.
해군 전력 등을 고려할 때 국가가 적극 대응했다면 납북을 막거나 어부를 구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원고 측 입장도 무리한 주장이라고 치부하기 어렵다. 이와 관련해, 앞서 안보 전문가이자 이 재판의 전문심리위원으로 지정된 문장렬 전 국방대 교수는 1971년 당시 해군이 어선 납북을 저지하거나 구출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고 한미 연합 전력을 고려하면 북한군보다 우위였다는 취지의 의견서를 재판부에 제출했다.
이런 점들이 충분히 고려된 판결인지 의문이라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선고 직후 원고 측 변호사가 지적한 것처럼, 재판부가 이 사안에서 입증 책임을 피해자인 원고들에게 지운 것도 아쉬운 대목이다. '최선을 다해 어부들을 보호하려 했다'는 것을 사건 관련 자료를 대부분 보유한 국가에서 입증하게 하지 않고, 반대로 '국가가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원고 쪽에서 입증하게 했다는 얘기다.
납북 귀환 어부들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은 이날 판결만이 아니다. "(잘못된) 유죄 판결이 재심으로 시정될 때까지 겪었던 불명예와 고통"에 대해 사과라도 받은 이 재판 원고들과 달리, 아직 재심을 통한 시정 절차조차 밟지 못한 이들도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제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국가 폭력 진상을 규명하고 재심을 권고한 139건 중 50건은 아직 권고가 이행되지 않았다(8월 13일 기준). 피해자가 재심을 청구했으나, 검사가 재심 청구 기각 의견을 낸 후 법원의 재심 개시 결정이 미뤄지는 사례도 거론된다.
특별법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더불어민주당 허영 의원 등 33명이 지난해 12월 발의한 '납북 귀환 어부 인권 침해 사건 진상 규명 및 피해자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안'이 현재 소관 상임위원회인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심사 단계에 있다. 특별법 제정에 속도를 붙여 고령의 피해자인 납북 귀환 어부들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줘야 할 때다.
KPI뉴스 /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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