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도 죄 없이 총살된 시대, 일반 시민들은 죽을 맛이었다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 2026-11-04 16:20:14
[김덕련의 역사산책 57] 여순사건과 학살
박찬길 검사·부친 박인서 희생, 국가 배상 책임 인정 판결
1948년 여순사건 당시 경찰에 의해 억울하게 목숨 잃어
얼마나 무분별한 학살이 자행됐는지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
자의적 계엄 선포와 집행이 학살 문제를 심각하게 만들어 ▲ 윤호중 행정안전부 장관이 지난달 19일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순천시 오천그린광장에서 열린 '제78회 여순사건 합동 추념식'에서 여순사건 희생자를 추모하고 있다. [행정안전부 제공]
박찬길의 삶은 기독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박찬길은 기독교도였다. 평양을 중심으로 활동한 기독교계 민족주의 지도자 조만식의 제자이기도 했다. 숭실전문학교는 기독교계 교육 기관이었고, 유학 시절 박찬길에게 장학금을 준 곳은 조선예수교장로교 총회였다.
1945년 광복 후 소련군이 38선 이북에 주둔하자, 박찬길은 가족과 함께 월남했다. 공주지법 특별검찰부 사법 시보 등을 거쳐 1947년 11월 광주지검 순천지청 차석 검사로 부임했다.
이력이 말해주듯이 좌익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순천에 내려온 이듬해, '반역에 부역한 빨갱이 검사'로 몰려 처형됐다. 그렇게 된 계기로 경찰과 빚은 마찰이 거론된다.
박찬길은 경찰 조서를 그대로 믿는 대신 직접 조사해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면 형사를 구속·취조하기도 했다. 좌익 인사를 추격하던 중 좌익과 무관한 도벌꾼(산의 나무를 몰래 베어 가는 사람)에게 총을 쏘아 죽인 경찰관에게는 징역 10년을 구형했다. 경찰은 이에 반발해 박찬길을 '적구(赤狗, 공산당 앞잡이) 검사'로 규정했다.
경찰과 빚은 이러한 갈등이 박찬길 피살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은 분명하다. 그간 박찬길 총살 사건이 몇몇 언론에서 검경 갈등의 뿌리 격으로 언급된 이유다. 그런데 경찰과 빚은 갈등 이외에도, 그간 덜 거론됐지만 주목해야 할 이 사건의 또 다른 원인이 있다. 순천 지역 우익 세력의 분화와 대립이 그것이다.
초대 국회의원을 선출한 1948년 5·10선거 당시 순천 지역 우익은 이른바 오전파와 오후파로 나뉘어 심하게 대립했다. 오후파의 중심인물은 이 선거에서 당선되는 황두연이었다. 박찬길은 황두연과 가까운 사이였다. 두 파의 대립은 5·10선거 후에도 이어졌고, 여순사건 때 박찬길이 총살을 당하는 데 중요한 원인이 됐다.
여순사건은 그해 10월 19일 국군 14연대 소속 일부 군인들이 제주 4·3사건 진압을 위한 출동 명령을 거부하면서 시작됐다. 순천은 20일 이들에게 점령됐다. 23일 진압 군경이 순천을 탈환했다.
박찬길은 20일 14연대 군인들의 순천 공격 소식을 들은 직후 국회의원 황두연에게 달려가 피신을 권했다. 그리고 지인 집에 몸을 숨겼다. 황두연은 외국인 선교사 집에 은신했다.
진압 군경은 순천을 탈환한 후 주민들을 순천북국민학교에 집합시켰다. 오지 않으면 부역자로 간주하겠다고 경고했다. 그렇게 모인 주민들을 대상으로 부역 혐의자 색출 작업을 진행했다. 자의적으로 부역 혐의자로 지목하고, 재판을 비롯한 적법 절차를 무시한 채 마구잡이로 즉결 처형하는 참혹한 민간인 학살이 이어졌다.
숨어 있던 박찬길도 순천북국민학교에 갔다. 그런데 박찬길에게는 '14연대 점령 시기 인민재판장으로 활약한 검사'라는 딱지가 붙어 있었다. 터무니없는 누명이었지만 벗을 길이 없었다.
경찰관들이 박찬길을 집단 구타했다. 박찬길은 순천북국민학교를 방문한 황두연에게 구명을 호소했다. 황두연은 박찬길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현직 국회의원인 황두연조차 '인민재판 배석 판사로 부역했다'는, 사실과 거리가 먼 혐의로 특별조사국에 끌려가 고초를 겪다가 겨우 목숨을 구했을 만큼 살벌한 분위기였다.
경찰은 현지 진압군 책임자의 만류에도 박찬길 즉결 처형을 밀어붙였다. 24일 오전 박찬길 등 21명을 총살했다.
닷새 정도 지난 29일경에는 박찬길 부친 박인서가 경찰에 끌려갔다. 경찰관들은 70세인 박인서를 마구 때려 죽음에 이르게 했다. 그리고 시신을 공동묘지에 내다 버렸다. 이듬해인 1949년에 작성된 경성지법 형사 사건 기록에 따르면, 박인서 연행은 박 검사에 대한 악감정이 그 부친에게까지 미쳐 벌어진 일이었다.
박찬길·박인서에게 일어난 비극은 여순사건 당시 진압 군경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얼마나 무분별하고 광범위하게 자행됐는지를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다. 기독교도이자 우익임이 분명한 현직 검사 박찬길조차 죄 없이 총살되는 판에 일반 시민들은 말 그대로 죽을 맛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과 진배없이 여겨졌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시기였다.
즉결 처형 등을 통한 민간인 학살 문제를 심각하게 만든 원인으로 자의적인 계엄 선포·집행을 빼놓을 수 없다. 여순사건 발발 사흘 후인 10월 22일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이 선포됐다. 선포한 사람은 진압군 부대 중 하나인 5여단을 이끌던 친일반민족행위자 김백일 중령이었다.
이때는 계엄법이 존재하지 않던 시기였다. 즉 법적 요건이 결여된 상태에서 선포된 계엄이었다. 거기에다 현지 지휘관이 임의로 계엄을 선포한 것으로 비치는 게 부담스러웠는지 이승만 정부는 그달 25일 대통령령으로 여수·순천 지역에 다시 계엄을 선포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법적 요건 결여 문제를 덮을 수는 없었다. 11월 1일 호남 방면 계엄사령관이 자기 마음대로 계엄 지역을 전남북으로 확대하는 등 곳곳에서 계엄을 제멋대로 집행한 것도 문제가 됐다.
여순사건 계엄 선포의 법적 정당성을 둘러싸고 국회에서 논란이 일었다. 계엄법은 그 이후인 1948년 12월 초안이 제출돼 이듬해 11월 제정된다.
박찬길 검사·부친 박인서 희생, 국가 배상 책임 인정 판결
1948년 여순사건 당시 경찰에 의해 억울하게 목숨 잃어
얼마나 무분별한 학살이 자행됐는지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
자의적 계엄 선포와 집행이 학살 문제를 심각하게 만들어
광주지법 순천지원이 지난달 29일 박찬길 검사와 그 부친 박인서 씨의 희생에 대한 국가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두 사람이 1948년 여순사건 때 경찰에 의해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지 78년 만이다.
한국 현대사 연구자 임송자의 2024년 논문(「순천지역 여순사건의 재조명과 박찬길 사건」)과 박찬길 총살 사건을 추적한 정병진 목사의 2023년 논문(「여순사건 당시 '박찬길 검사 총살 사건'의 진실」)을 중심으로 당시 상황을 되짚어 보자.
박찬길은 1910년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에 평양에 있던 숭실전문학교를 마친 후 일본에 유학해 도쿄의 주오대(중앙대) 법학부를 졸업했다.
박찬길의 삶은 기독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박찬길은 기독교도였다. 평양을 중심으로 활동한 기독교계 민족주의 지도자 조만식의 제자이기도 했다. 숭실전문학교는 기독교계 교육 기관이었고, 유학 시절 박찬길에게 장학금을 준 곳은 조선예수교장로교 총회였다.
1945년 광복 후 소련군이 38선 이북에 주둔하자, 박찬길은 가족과 함께 월남했다. 공주지법 특별검찰부 사법 시보 등을 거쳐 1947년 11월 광주지검 순천지청 차석 검사로 부임했다.
이력이 말해주듯이 좌익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순천에 내려온 이듬해, '반역에 부역한 빨갱이 검사'로 몰려 처형됐다. 그렇게 된 계기로 경찰과 빚은 마찰이 거론된다.
박찬길은 경찰 조서를 그대로 믿는 대신 직접 조사해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면 형사를 구속·취조하기도 했다. 좌익 인사를 추격하던 중 좌익과 무관한 도벌꾼(산의 나무를 몰래 베어 가는 사람)에게 총을 쏘아 죽인 경찰관에게는 징역 10년을 구형했다. 경찰은 이에 반발해 박찬길을 '적구(赤狗, 공산당 앞잡이) 검사'로 규정했다.
경찰과 빚은 이러한 갈등이 박찬길 피살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은 분명하다. 그간 박찬길 총살 사건이 몇몇 언론에서 검경 갈등의 뿌리 격으로 언급된 이유다. 그런데 경찰과 빚은 갈등 이외에도, 그간 덜 거론됐지만 주목해야 할 이 사건의 또 다른 원인이 있다. 순천 지역 우익 세력의 분화와 대립이 그것이다.
초대 국회의원을 선출한 1948년 5·10선거 당시 순천 지역 우익은 이른바 오전파와 오후파로 나뉘어 심하게 대립했다. 오후파의 중심인물은 이 선거에서 당선되는 황두연이었다. 박찬길은 황두연과 가까운 사이였다. 두 파의 대립은 5·10선거 후에도 이어졌고, 여순사건 때 박찬길이 총살을 당하는 데 중요한 원인이 됐다.
여순사건은 그해 10월 19일 국군 14연대 소속 일부 군인들이 제주 4·3사건 진압을 위한 출동 명령을 거부하면서 시작됐다. 순천은 20일 이들에게 점령됐다. 23일 진압 군경이 순천을 탈환했다.
박찬길은 20일 14연대 군인들의 순천 공격 소식을 들은 직후 국회의원 황두연에게 달려가 피신을 권했다. 그리고 지인 집에 몸을 숨겼다. 황두연은 외국인 선교사 집에 은신했다.
진압 군경은 순천을 탈환한 후 주민들을 순천북국민학교에 집합시켰다. 오지 않으면 부역자로 간주하겠다고 경고했다. 그렇게 모인 주민들을 대상으로 부역 혐의자 색출 작업을 진행했다. 자의적으로 부역 혐의자로 지목하고, 재판을 비롯한 적법 절차를 무시한 채 마구잡이로 즉결 처형하는 참혹한 민간인 학살이 이어졌다.
숨어 있던 박찬길도 순천북국민학교에 갔다. 그런데 박찬길에게는 '14연대 점령 시기 인민재판장으로 활약한 검사'라는 딱지가 붙어 있었다. 터무니없는 누명이었지만 벗을 길이 없었다.
경찰관들이 박찬길을 집단 구타했다. 박찬길은 순천북국민학교를 방문한 황두연에게 구명을 호소했다. 황두연은 박찬길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현직 국회의원인 황두연조차 '인민재판 배석 판사로 부역했다'는, 사실과 거리가 먼 혐의로 특별조사국에 끌려가 고초를 겪다가 겨우 목숨을 구했을 만큼 살벌한 분위기였다.
경찰은 현지 진압군 책임자의 만류에도 박찬길 즉결 처형을 밀어붙였다. 24일 오전 박찬길 등 21명을 총살했다.
닷새 정도 지난 29일경에는 박찬길 부친 박인서가 경찰에 끌려갔다. 경찰관들은 70세인 박인서를 마구 때려 죽음에 이르게 했다. 그리고 시신을 공동묘지에 내다 버렸다. 이듬해인 1949년에 작성된 경성지법 형사 사건 기록에 따르면, 박인서 연행은 박 검사에 대한 악감정이 그 부친에게까지 미쳐 벌어진 일이었다.
박찬길·박인서에게 일어난 비극은 여순사건 당시 진압 군경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얼마나 무분별하고 광범위하게 자행됐는지를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다. 기독교도이자 우익임이 분명한 현직 검사 박찬길조차 죄 없이 총살되는 판에 일반 시민들은 말 그대로 죽을 맛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과 진배없이 여겨졌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시기였다.
즉결 처형 등을 통한 민간인 학살 문제를 심각하게 만든 원인으로 자의적인 계엄 선포·집행을 빼놓을 수 없다. 여순사건 발발 사흘 후인 10월 22일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이 선포됐다. 선포한 사람은 진압군 부대 중 하나인 5여단을 이끌던 친일반민족행위자 김백일 중령이었다.
이때는 계엄법이 존재하지 않던 시기였다. 즉 법적 요건이 결여된 상태에서 선포된 계엄이었다. 거기에다 현지 지휘관이 임의로 계엄을 선포한 것으로 비치는 게 부담스러웠는지 이승만 정부는 그달 25일 대통령령으로 여수·순천 지역에 다시 계엄을 선포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법적 요건 결여 문제를 덮을 수는 없었다. 11월 1일 호남 방면 계엄사령관이 자기 마음대로 계엄 지역을 전남북으로 확대하는 등 곳곳에서 계엄을 제멋대로 집행한 것도 문제가 됐다.
여순사건 계엄 선포의 법적 정당성을 둘러싸고 국회에서 논란이 일었다. 계엄법은 그 이후인 1948년 12월 초안이 제출돼 이듬해 11월 제정된다.
KPI뉴스 /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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