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곳 총상에도 항전…독립투사 마춘걸·김표돌·김정하를 아시나요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 2026-08-04 16:39:16

광주 고려인 마을, 연해주 고려인 독립유공자 후손 발굴·지원 사업
28번째 인물로 김표돌 선정…마춘걸은 26번째, 김정하는 27번째
무장 투쟁 등 전개했지만 묻힌 곳도 알 수 없어…김경천도 마찬가지
'정부 공인 친일반민족행위자' 12명이 현충원에 안장된 것과 대조적

광주 고려인 마을은 국내에 입국한 고려인들이 구성한 대표적인 공동체 중 하나다. 고려인은 조선 후기인 1860년대부터 일제 강점기를 거쳐 1945년 8·15 광복 때까지 러시아를 비롯한 옛 소련 지역으로 이주한 한인과 그 친족을 말한다.

광주 고려인 마을은 '연해주 고려인 독립유공자 후손 발굴 및 지원 사업'의 28번째 인물로 김표돌을 선정했다고 2일 밝혔다. 지난해 말부터 이 마을이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에서 발행되는 고려신문과 공동으로 추진하고 있는 사업이다. 앞서 지난달에는 김정하를 27번째, 마춘걸을 26번째 인물로 선정했다. 

 

▲ 광주 고려인 마을 홈페이지.

 

김표돌, 김정하, 마춘걸은 낯선 이름이다. 독립운동사 연구자가 아니면 접할 일이 거의 없는 이름들이다. 이 3명만이 아니라, 이들에 앞서 이 사업의 1~25번째 인물로 선정된 이들 중 상당수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이름이 덜 알려졌다고 해서 이들이 전개한 항일 투쟁의 가치가 가벼이 여겨져도 괜찮은 것은 물론 아니다. 오늘날 한국이 주권 국가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이들처럼 이름이 덜 알려졌거나 이름 한 줄 남기지 못한 수많은 독립투사들의 희생과 헌신 덕분이다.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기록을 중심으로 이 3명의 삶을 간략히 되짚어보자.

1896년 러시아에서 태어난 김표돌은 러시아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1917년 볼셰비키 주도로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일본, 미국 등이 이듬해 러시아에 군대를 보내 간섭했다. 1920년 4월 일본군이 연해주 남쪽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한인들을 대규모로 학살한 4월참변이 일어나자, 볼셰비키 세력은 연해주 북쪽 하바롭스크 방면으로 이동했다.

볼셰비키 편에 서서 연해주 도시 이만(지금의 달네레첸스크) 지역 군대의 지휘관으로 활동하며 일본과 맞서던 김표돌도 부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향했다. 이어 시베리아 옴스크에서 안경억, 이다물과 함께 한인사관학교를 설립하고 노보시비르스크에 간이 군사 훈련소를 설치했다.

김표돌은 1921년 6월 자유시(지금의 스보보드니)에서 진행된 한인 무장 부대의 통합 과정에서 발생한 자유시사변에 휘말렸다. 한인 무장 부대 간 주도권 경쟁과 소비에트 러시아 측의 일관성 없는 정책으로 인해 무장 해제 과정에서 상당한 희생자가 발생한 비극이었다.

무장 해제를 당한 쪽에 속해 있던 김표돌은 러시아 붉은군대의 포로가 돼 이르쿠츠크로 이송됐다. 그곳에서 러시아 제5군단 산하 한인 여단에 배속됐는데, 1922년 다수의 병력을 이끌고 연해주 쪽으로 탈출하려다 발각·체포됐다. 그로 인해 이르쿠츠크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 1923년경 목숨을 잃었다. 2002년 김표돌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시베리아의 파리'로 불린 이르쿠츠크는 1825년 전제정 개혁을 요구하며 데카브리스트 봉기를 일으켰다가 이쪽으로 유배된 러시아 청년 장교들과 그들을 따라온 귀족 여성들의 낭만적 사랑으로 유명한 곳이다. 한국 초기 사회주의 운동의 중심지 중 한 곳이기도 하다. 그에 더해, 무장 투쟁을 전개한 김표돌 같은 사람이 생을 마감한 곳이라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김정하는 1897년 함경남도 이원에서 태어났다.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9월 러시아에서 폭탄 6개를 함경북도 청진으로 반입했다. 그해 11월 이후에는 일본군 등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 중국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제공하고, 독립운동 자금 모집 활동도 전개했다.

1923년에는 임정의 진로 문제를 놓고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했다. 이어 만주에서 고려혁명군 제3대 사령관, 단지동맹암살대 대장, 대한통의부 군정위원으로 활동했다.

그 후 만주, 모스크바, 서울 등에서 활동을 이어가다가 1937년 스탈린 정권의 한인 탄압 정책에 휘말려 소련 당국에 체포됐다. 이듬해 1월 김정하는 총살을 당했다. 2008년 김정하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마춘걸은 1902년 서울 태생이다. 연해주와 만주 등지에서 무장 투쟁과 독립운동을 전개했는데, 마춘걸의 생애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이만 전투다.

자유시사변 반년 후인 1921년 12월 러시아 내 반혁명 세력인 백군(白軍)이 연해주 도시 이만 일대에서 한인 무장 부대인 고려혁명의용군을 공격하면서 벌어진 전투다. 백군 뒤에는 일본이 있었다. 러시아에 파병된 대규모의 일본군과 그 지원을 받은 백군은 한인 무장 부대는 물론 러시아에 이주해 수십 년간 터전을 다진 한인 사회에 심각한 위협이었다.

마춘걸은 고려혁명의용군 제2중대 제1소대장이었다. 제2중대는 모로봉에서 백군을 격퇴했다. 그 후 수천 명에 이르는 백군이 진격해 왔다. 제2중대는 백군 600여 명을 사살했지만 중과부적에 탄환 부족으로 패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전투에서 제2중대장 한운용을 비롯한 대원 46명이 전사했다. 마춘걸은 17곳에 총상을 입었지만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17곳 총상으로 죽음 문턱까지 갔다가 돌아온 후에도 항전을 멈추지 않았다. 1923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적기단이라는 무장 단체를 조직해 활동하는 한편 독립운동 자금도 모집했다. 1926년까지 활동을 이어갔지만 탄압으로 적기단을 해산할 수밖에 없게 되자, 레닌그라드 국제사관학교에서 군사 교육을 받고 소련군 145 카스트롬 사격 부대장으로 복무했다.

마춘걸도 김정하와 마찬가지로 스탈린 정권의 한인 탄압 정책에 휘말렸다. 1937년 10월 간첩 및 반혁명 조직죄로 체포돼 이듬해 1월 법정 최고형을 선고받았다. 그 후 안타깝게 목숨을 잃지만, 1957년 소련 군법 재판에서 복권됐다. 2019년 마춘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 마춘걸의 독립유공자 공적 정보. [공훈전자사료관 홈페이지 갈무리]

 

김표돌, 김정하, 마춘걸은 묘소 위치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다. 어디 묻혀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김표돌과 김정하는 후손의 소재도 확인되지 않는다. 마춘걸의 경우 후손의 존재는 확인됐지만, 아직 독립유공자 후손으로 공식 인정받지는 못한 상태다.

묘소 위치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는 이들만이 아니다.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일본군 장교로 복무했던 김경천도 그런 경우 중 하나다.

김경천은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일본군 장교로서 보장된 미래를 버리고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때 함께 망명하는 또 다른 일본군 장교 후배가 지대형, 즉 훗날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내는 지청천이다. 망명 후 김경천은 연해주 등지에서 무장 투쟁에 앞장서며 '백마 탄 김 장군'으로 불리게 된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김표돌, 김정하, 마춘걸과 마찬가지로 김경천의 유해가 어디 묻혀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현충원에 12명의 '정부 공인 친일반민족행위자'가 국가유공자 자격으로 안장돼 있는 것과 대조적인 풍경이다. 12명 중 11명은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가들의 적이었던 일본군 또는 일제의 괴뢰 국가인 만주국 군대의 장교였다.

  

KPI뉴스 /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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