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평화의 흐름을 이끈 '식탁외교'
임혜련
| 2018-09-23 13:22:46
햄버거 대신 조화 녹여낸 코스요리의 북미정상회담
7끼 중 4끼 함께하며 친밀감 과시한 평양정상회담
"음식은 관계 발전을 위한 가장 오래된 외교 도구이다." 힐러리 클린턴 전 미 국무장관이 국가 요리사 임명장 수여식에서 한 말이다.
당시 힐러리 국무장관은 "전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상대국 관계자들과 나눈 가장 의미 있는 대화는 대부분 식사를 하면서였다"고 전하면서 "우리는 음식을 나눔으로써 서로의 장벽을 뛰어넘어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었다"며 식사를 통한 외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외교에서 식사는 단순히 배를 채우기 위한 행위가 아니다. '한솥밥을 먹는다'는 표현이 있듯이 협상 당사자는 함께 얼굴을 마주보고 서로의 문화가 담긴 음식을 공유하며 상대를 이해하고 친밀감을 쌓는다. 실제로 식사는 국가 간 장벽을 뛰어넘게 해주는 가교 역할을 한다.
평화를 향한 첫걸음. '4.27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2018년은 남북 관계에 훈풍이 불었던 해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4월 27일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을 시작으로 북한과 대화의 물꼬를 텄다.
한국전쟁 이후 이어진 68년의 적대관계를 끝내고 북한과 미국의 정상이 만나 회담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이렇듯 올해 이어진 판문점 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 그리고 지난 18~20일 열렸던 평양 정상회담에서도 '식탁외교'는 힘을 발휘했다.
4.27 남북정상회담 때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함께 손을 잡고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역사적인 첫걸음이었다. 이날 회담만큼이나 주목받은 것이 바로 남북한 정상이 함께한 만찬 메뉴였다. 만찬메뉴가 담고 있는 메시지는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문 대통령이 준비한 정상회담의 만찬 메뉴엔 남북의 미래에 대한 메시지가 녹아있었다. 만찬 메뉴는 민족의 평화와 남북 관계의 개선을 위해 노력해온 인물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김대중(전남 신안), 노무현(경남 김해), 윤이상(경남 통영), 정주영(충남 서산)으로 이들 고향의 특산물이 재료가 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0년 6월 13일 평양에서 첫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킨 평화의 주역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김 전 대통령의 고향인 신안 가거도에서 공수해 온 민어와 해삼초를 이용한 민어해삼편수가 상에 올랐다.
이어 2007년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킨 노무현 대통령을 대표한 메뉴는 비빔밥이었다. 노 전 대통령의 고향인 봉하마을에서 지은 쌀과 비무장지대(DMZ)의 산나물을 이용해 남북교류의 의미를 담았다.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소떼를 몰고 방북'한 것을 연상시키는 충남 서산목장의 '한우 숯불구이', 그리고 남북한 예술의 가교 역할을 했던 윤이상 작곡가의 고향 통영에서 가져온 ‘문어 냉채’ 등도 함께 상에 올랐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만찬 메뉴에 대해 "우리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애쓰셨던 분들의 뜻을 담아 준비했다. 그분들의 고향과 일터에서 먹을거리를 가져와 정성스러운 손길을 더했다"고 설명했다.
4.27 남북정상회담에서 특히 주목받았던 메뉴는 바로 '옥류관 평양냉면'이었다. 정상회담 이후 서울엔 냉면 열풍이 불었고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을 파는 집들이 문전성시를 이뤘다. 청와대 구내식당에도 특식 메뉴로 '평양냉면'이 등장했다.
정상회담의 만찬 메뉴를 기획했던 맛칼럼니스트 황교익은 평양냉면을 주 메뉴로 선정한 이유에 대해 "김구 선생이 1948년 분단의 고착화를 막기 위해 38선을 넘어 김일성을 만나러 가기 전 냉면을 먹었다는 일화를 들었다. 그러나 북측 대표 음식인 냉면을 낸다는 것이 애매해 고민하던 중 문재인 대통령이 북측 냉면을 가져오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고 밝혔다.
북한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옥류관 수석요리사를 직접 판문점으로 파견했고 문재인 대통령은 제면기로 갓 뽑아낸 평양냉면을 맛볼 수 있었다. 김정은 위원장도 "먼 곳에서 평양냉면을 가지고 왔다"고 말문을 열었다가 "아, 먼 곳이라고 하면 안되겠다"고 말하며 경직된 분위기를 풀어나갔다.
두 정상의 추억을 담은 메뉴도 제공됐다. 문재인 대통령의 고향인 부산의 달고기 구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유년시절을 보낸 스위스의 음식 뢰스티를 재해석한 퓨전음식 감자전 등이 이날 메뉴에 포함됐다.
디저트로 나온 망고무스 역시 남북 화합의 메시지를 전했다. 단합된 민족을 뜻하는 한반도기가 올려져있는 망고무스는 단단한 껍질로 싸여있었다. 이 껍질을 직접 깨트림으로써 반목을 넘어 남북이 하나됨을 형상화했다는 게 청와대의 설명이다. 차와 다과로 나온 백두대간의 송이꿀차와 제주 한라봉편도 백두산에서 내려온 평화의 기운이 제주 끝까지 전해지기를 기원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외신도 만찬의 메뉴가 담고 있는 의미에 주목했다. 영국 BBC방송은 '요리외교'가 세계의 역사를 어떻게 움직여왔는지 설명하며 "남북정상회담 메뉴가 긍정적인 논의를 위한 테이블을 차려준 것"이라고 분석했다.
회담의 메뉴가 "남북한 모든 지역을 아우르며 통일시킨다. 목표는 테이블 위의 통일인 것 같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CNN방송은 평양냉면을 만드는 법을 선보이며 "평양냉면이 남북관계의 다리 역할을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68년의 적대관계를 끝내고 마주앉은 북한과 미국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만남으로 세계적인 화제가 됐던 북미정상회담에서도 많은 이들이 오찬 메뉴에 관심을 가졌다. 이날 오찬 상에 오른 다양한 메뉴는 평화와 화합의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했다.
북미정상회담 오찬 메뉴의 화두는 '햄버거'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2016년 대선 후보 유세 당시 "북한 김정은과 함께 햄버거를 먹으면서 핵 협상을 하겠다"고 발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찬에는 햄버거 대신 북한과 미국, 그리고 북미회담의 개최 장소인 싱가포르의 현지 음식으로 조화를 맞춘 코스요리가 제공됐다.
제일 먼저 나온 에피타이저는 아보카도 샐러드를 곁들인 미국식 새우 칵테일 요리, 신선한 문어와 라임 드레싱을 뿌린 싱가포르의 그린망고 케라부, 한국의 궁중 요리인 '오이선'이었다. 이는 회담의 당사국인 북한과 미국, 그리고 개최국인 싱가포르의 음식을 모두 담으며 '화해와 교류'라는 회담의 메시지를 강조하려는 메뉴였다.
오이선은 백악관이 한글 발음 그대로 '오이선'(Oiseon)이라 표기하며 한국 음식이라 설명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오이선의 '선(膳)'은 궁중음식으로 오이선은 오이에 칼집을 내 고기와 계란·당근 등을 끼워 넣은 여름 별미다.
이후 나온 전체 요리 역시 동일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전체 요리로는 레드와인 소스와 찐 브로콜리를 곁들인 소갈비조림, 바삭바삭한 돼지고기를 넣고 해산물 소스를 곁들인 양저우식 볶음밥, 무와 채소를 넣어 간장으로 조려낸 대구조림이 나왔다.
이 역시 미국인이 즐겨먹는 서양식 요리, 싱가포르에서 즐겨먹는 중국식 요리, 한식으로 구성된 메뉴였다. 앞선 에피타이저와 마찬가지로 세 국가를 대표하는 음식을 모두 포함하며 '평화와 통합'이라는 정치적인 의미를 구현해냈다는 평을 받았다.
디저트로는 초콜릿 가나슈 타르트, 체리 맛 소스를 곁들인 하겐다즈 바닐라 아이스크림, 브리오슈 파이인 트로페지엔이 나왔다.
북미정상회담의 오찬 메뉴는 북한, 미국, 싱가포르 현지 음식의 균형을 맞추며 외교적, 정치적 의미를 담았고 회담이 전하고자 한 메시지를 더욱 분명히 했다.
찰떡행보로 보여준 친밀감. '평양 남북정상회담'
18~20일 평양 남북정상회담은 식사외교의 절정이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평양에서의 총 7끼 중 절반 이상인 4끼를 부부동반으로 함께 식사하며 친밀감을 보였다. 이는 역대 남북 정상회담 중 가장 많은 횟수였다.
첫 식사는 18일 김정은 위원장 부부가 평양 목란관에 준비한 환영 만찬이었다. 김 위원장 부부는 문 대통령 부부와 북한을 방문한 공식·특별·일반 수행원 200여명을 위한 만찬을 준비했다. 첫 만찬이었던 만큼 다양한 메뉴가 제공됐다.
이날 만찬 테이블에는 백설기 약밥, 강정합성 배속김치, 칠면조말이랭찜, 해산물 물회, 과일남새 생채, 상어날개 야자탕, 백화 대구찜, 자산소 심옥구이, 송이버섯구이, 흰쌀밥, 숭어국, 도라지 장아찌, 오이숙장과 수정과와 김일성 주석이 직접 재배를 지시했던 강령녹차 등이 올랐다. 만찬주로는 홍성수삼인삼술, 평양소주, 와인이 나왔고 와인과 어울리는 햄과 멜론 등도 준비됐다.
목란관에서의 식사는 문재인 대통령이 처음이 아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은 목란관에서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답례만찬을 열었다. 이날 상에 올랐던 비빔밥은 남북의 평화와 화합을 강조한 음식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2007년 목란관에서 김영남 당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주최로 열린 공식 만찬을 대접받았다.
정상회담 둘째날 남북정상은 평양 옥류관에서 오찬을 함께했다. 이날 메뉴로는 지난 4.27 회담의 가교 역할을 했던 평양냉면이 다시 한 번 올라와 평양냉면을 주제로 남북 간 화기애애한 대화가 오갈 수 있었다.
리설주 여사는 유홍준 명지대 교수에게 "평양냉면을 처음 먹느냐"고 물으며 "판문점 연회 때 옥류관 국수를 올린 이후로 평양에서도 더 유명해졌다. 외부 손님들이 와서 계속 '랭면 랭면'한다"고 말했다.
이날 상에는평양냉면 외에도 잉어달래초장무침, 삼색나물, 록두지짐, 자라탕, 소갈비편구이 등이 올랐다.
세 번째 날 문재인 대통령은 북한 현지인들이 가는 평양의 대동강수산물식당을 찾으며 특유의 '대중식당 외교'를 펼쳤다. 대동강수산물식당은 '평양 시민들이 자주 가는 식당으로 안내해 달라'는 문 대통령의 요구에 북측이 적극 추천한 장소이다. 문 대통령은 앞서 중국과 베트남을 방문했을 때도 숙소 인근의 식당을 찾아 아침식사를 하며 현지인들과 교류한 바 있다.
이번에도 문 대통령은 20분가량 북한 주민들과 격의 없는 시간을 가졌다. 주민들의 손을 잡으며 안부를 물었고 "음식이 맛이 있습니까? 우리도 맛 한 번 보러 왔습니다"라며 대화를 나눴다.
이날 김 위원장이 갑작스럽게 참석 의사를 밝히며 대동강수산물식당을 '깜짝 방문'했고 두 정상은 다시 한 번 식사 자리를 가지게 됐다. 문 대통령 내외와 김 위원장 내외는 4인 테이블에 함께 앉아 담소를 나누었다. 식사는 생선회에 간단한 반주를 곁들인 메뉴였다.
두 정상은 마지막 날 백두산 방문을 마친 후에도 삼지연에서 함께 점심 식사를 했다. 메뉴는 백두산에서 나는 재료를 이용한 것들로 백두산 산나물, 천지에 사는 산천어 요리, 들쭉 아이스크림 등이 나왔다.
삼지연에서의 점심 식사까지 포함해 문 대통령은 방북했던 사흘 동안 김 위원장과 총 4번의 식사를 함께했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의 브리핑에 따르면 문 대통령은 김 위원장과 함께한 17시간5분 중 식사 시간으로 9시간가량을 함께 한 셈이다. 김 대변인은 "첫날 환영만찬 4시간, 둘째 날 옥류관 오찬 1시간 30분, 대동강수산물시장에서 1시간 30분, 삼지연 오찬에선 2시간을 함께 했다"고 전했다.
이렇듯 두 정상은 4번의 만찬을 함께하며 밀착 행보를 보였고 늘 옆자리에 앉아 친밀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이며 신뢰와 친분의 메시지를 강조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남한과 북한은 함께 마주 앉아 식사를 하며 많은 결과를 성취했다. 4·27 정상회담 이후 5개월의 시간 동안 3번의 만남을 가졌고 평양 공동선언에서는 사실상의 불가침 합의를 끌어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북미정상회담에서 북한과의 업무오찬을 마친 뒤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똑똑한 협상가'라고 평하며 북미관계에 변화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가시적인 결과를 떠나 남한과 북한, 미국과 북한의 정상이 함께 마주 앉아 식사를 하는 장면은 그 자체만으로도 세계에 평화와 화합의 메시지를 전했다. 앞으로도 평화의 흐름을 이어갈 '식탁외교'가 계속될지 세계인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KPI뉴스 / 임혜련 기자 ihr@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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