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이서진…맞다, 이 남자 배우였다
홍종선
| 2018-10-28 11:30:50
뜨거운 배우들이 함께하는 촬영장에서 '환기' 역할 톡톡
50년 경력 '꽃보다 할배' 앞에서 20년차 배우는 아이
아참, 이 남자 배우였다. 웬만한 전문 예능인보다 자연스럽게, 개성있게 그리고 멋지게 예능을 소화하다 보니 잠시 잊고 있었다. 영화 '완벽한 타인'에서 여자들에게 인기 많은 레스토랑 사장 준모로 분한 이서진에게선 예능의 냄새가 피어오르지 않는다. 연기파 배우 유해진 조진웅 염정아 윤경호와 어우러져 누구보다 자연스러운 연기를 한다. 감정의 절제, 동작의 유연함이 돋보인다. 15년 전 드라마 '다모' 때부터 가까이 지내며 자연인 이서진의 얼굴을 아는 이재규 감독이 그의 개성을 캐릭터에 녹여 내고 화면에 포착해 낸 공도 있다.
영화배우로 인터뷰를 하니 더 반가웠다. 영화 개봉을 앞두고 각종 예능에 출연하며 홍보에 열심인 이서진을 서울 삼청로 카페에서 만났다. 영화 속 준모, 예능 속 이서진, 스크린 밖에서 만난 배우 이서진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금 더 얼굴이 작아 보이고, 조금 더 어려 보이고, 많이 상쾌한 느낌이라는 것 외에 솔직하고, 단순명료하고, 까칠한 모습이 똑같았다. 스스로 '까칠'이라는 단어를 쓰니 그대로 썼지만 뾰족한 까칠함이라기보다는 명백한 솔직함에 가까웠다. 여느 배우라면 굳이 드러내지 않거나 감출 수 있다. 아름다운 포장 띠를 둘러도 될 법한 직선적 표현. 말투와 내용, 모두가 머뭇거리지 않는 직선이었다. 스스로도 스트레이트(straight)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일테면 이런 거다.
"영화를 보면서 너무 많은 감정을 담고 있어서 좋았어요. 이렇게 훌륭한 대본이었나, 대본 읽을 때 이렇게 훌륭한 줄 몰랐는데. 인간의 모든 감정이 들어가 있고 요즘 상황에 맞는 이야기여서 좋아요. 10년 전이면 휴대전화를 매개로 한 이 이야기가 불가능했을 것이고 10년 후에는 또 구닥다리로 보일 것이고."
보통은 "읽을 때 이렇게 훌륭한 줄 몰랐다"는 얘기를 빼고 시나리오로 볼 때보다 영화로 보니 좋다는 얘기를 하기 쉽다. 자신이 선택해 자신이 연기한 작품 아닌가. 자신뿐 아니라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사람을 생각해서라도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서진이 웃기기 위해, 이 말에 힘을 주어 개그 요소로 한 것도 아니다. 이런저런 앞뒤를 재지 않고 느낌 그대로, 생각 그대로 말한다는 게 전해진다. 이서진 스스로 표현한 대로 "심각한 걸 좋아하지 않고 깊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어서 가능한 화법이다. 그런데 이런 이서진이 조금도 거칠어 보이거나 얕아 보이지 않는 이유는 뭐지? 이 남자의 화법에 빠져 보자.
드라마로 2년(결혼계약, 2016), 영화로는 3년(오늘의 연예, 2015) 만에 연기하면서 배우로서의 공백을 느끼지 않았는지에 대한 답변에서도 그런 솔직함이 배어나왔다.
"역할 자체가 심각하거나 깊이 있게 생각하는 인물이 아니라 연기 공백 못 느꼈어요. 영화다 보니 편안하게, 제가 계획을 짜기보다는 감독이 만들어 준 그 공간에서 편안하게 연기했어요. 극중에서 준모는 심각한 분위기를 없애는 역할이에요. 개인적으로 심각한 것 안 좋아하기 때문에, 촬영하지 않을 때도 심각하면 반전시키는 역할을 하는 게 저이기 때문에 연기하기 더 편했던 것 같고요. 감독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아요. 안 믿었던 것 아니지만 영화 보고 더 믿음이 커졌어요."
그렇게 편안히 연기해서일까. 이서진의 준모 연기는 긴장감 넘치는 영화에 이완을 주고 때로 브레이크도 걸어 잠시 쉬게 한다. 역대 최고연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진웅이가 형은 태어날 때부터 대본 받았어요? 할 만큼 잘했어요. 저랑 흡사한 부분이 있죠. 심각한 걸 싫어하고 농담 좋아하고 분위기 무거워지면 바로바로 깨고, 이런 부분이요. 나이 어린 여자랑 결혼하고 그건 아니고요. 다른 배우들도 잘했죠. 진웅 부부, (유)해진 부부에게는 심각한 일이 있잖아요. 유해진 배우는 예민하고 치밀하고 생각 많아서 저보다 힘들었을 거고 진웅이는 집들이 호스트니까 또 힘들었을 거고. 아, 그래도 진웅이에겐 좋은 신들이 있잖아요. 딸하고의 대화도, 욕실에서 부인과의 대화도요."
조진웅의 입을 빌어 자신의 연기에 대한 호평을 전한 게 멋쩍은지 말이 다른 배우들 연기로 달린다. 준모 외에 탐났던 배역을 묻는 질문에도 자신의 얘기뿐 아니라 동료 얘기를 보탰다. "해진은 태수 역에 딱 맞고, (윤)경호 역할, 영배를 진웅이가 한다면? 오, 괜찮을 것 같더라고요. 이 영화의 주인공은 영배 아닐까 할 정도로 매력적 캐릭터죠, 저도 바꾼다면 그 역인데, 그냥 준모가 딱이에요. '완벽한 타인' 이후 윤경호 배우가 크게 주목 받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주연배우 7명, 유해진 염정아 조진웅 김지수 윤경호 송하윤 그리고 이서진이 한 달 동안 모여 하루를 다 같이 보내며 촬영한 영화 '완벽한 타인'. 숙소의 각자 방만 다를 뿐 같이 먹고 자고 아침을 사우나에서 같이 시작하며 그야말로 식구처럼 보냈다는 이서진의 전언에 좀 얄궂은 질문을 던졌다. 정말 쟁쟁한 배우들이 모였다. 본인 외 6명의 배우들에게서 아무거든, 외모 일부든 재능 하나든 3가지를 가져올 수 있다면 무엇을 가져오겠나?
"먼저 유해진의 순발력이요. 썰렁한 농담일 수 있는데 그걸 계속 만들어 파급력을 이어내는 재능이 있더라고요, 그런 게 좋았어요. 진웅이 같은 경우는 치밀한 스타일은 아닌데 어떤 자신감이 있죠, 굉장한 자기 자신감, 프라이드가 센 친구인 점이 좋았고. 염정아 씨는 그 오랜 연기생활 속에서도 아직도 굉장히 자기 연기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고 저한테 계속 모니터링을 해달라고 하는 거예요. 나 어땠어? 어땠어? 자기의 연기에 대해 계속 욕심내는 거잖아요, 좋았어요. (그 외에도) 전부 좋은 배우들이에요."
뭘 물어도 속 시원히 대답해 주니 좋다. 이것도 묻고 싶었다. 영화 말미에 나오는 자막, 인간은 누구나 세 가지 삶을 산다. 공적인 삶, 개인으로서의 삶, 그리고 비밀의 삶. 동의하는지 묻자 "너무나 공감한다"며 자연인 이서진이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을 들려줬다.
"저는 누구에게든 '완벽한 타인'으로 살아요. 인간은 혼자라고 생각합니다. 같이 죽는 거 아니고 혼자 가는 것이기 때문에요. 마찬가지로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100% 저를 공개 못 해요. 당연히 (비밀의 삶이 있다는 것에) 너무 공감합니다. 제목도 딱 맞다고 생각해요. 임팩트 있는 다른 제목 없을까 다같이 머리 맞대고 고민했지만 없었어요. 영화 보시기 전엔 평범해 보이기도 하고 무슨 말이야 하실 수 있지만 보시고 나면 ‘완벽한 타인’이라는 제목에, 또 그 뜻에 고개가 끄덕여지시리라 생각합니다."
완벽한 타인으로 살고 있다는 게 말뿐은 아닌 듯하다. 사회관계망 안에 자신을 편입시키지 않고, SNS메신저조차 하지 않는단다. 단체창이 생기고는 더 꺼려졌고, 이서진에게만은 문자로 개별 연락해야 하는 지인들에게 한소리씩 듣기도 하지만 지금까지도 하지 않은 바에야 앞으로도 시작할 생각이 없다고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이유 역시 명료하다.
"심플하게 살고 싶어요, 깊이 생각하기 싫거든요."
이서진에게 있어 완벽한 타인으로 산다는 건 결코 '나만 아는' 삶을 의미하지 않는다. '완벽한 타인' 촬영 기간 동안 이서진은 함께한 동료들과 식사할 곳을 매번 기꺼이 찾아 안내했다. TV 예능 '꽃보다 할배'에서 대선배들의 짐꾼이자 가이드 역할을 충실히 하는 모습을 줄곧 보아왔다. 이서진은 별일 아니라며 칭찬을 사양했다.
"누구라도 그랬을 거예요. 맞춰 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내가 그렇게 해드릴수록 의지하시고 그럼 저는 책임감이 더 커지고요. 사실 ‘꽃보다 할배’ 생각보다 너무 힘들어요. 그 나라에 뭐가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나요. 다시 가봐야겠다, 뭔가 좋은 게 있었던 것 같은데… 싶을 정도예요. '어디가 기억에 남으세요?' 누가 물으면 '기억에 남겠니? 밥밖에 안 했는데'라고 말해요. 선생님들이 주인공이시고 저는 서포트(보조)하는 입장이라 생각해서 나서려고도 하지 않아요."
선배들을 모시기만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얻는 게 크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선생님들 뵙잖아요, '얼마 남지 않았다' 싶어 조급하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는데 전혀 조급하지 않으세요. 인생을 깨달은 느낌이랄까 편안해 보이세요. 배웠다기보다는 문득 생각해 보면 나도 모르게 내게 스며들었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아요. 덕분에 많이 여유로워졌어요. 선생님들 막 50년씩 하셨는데 저는 이제 겨우 20년, 명함도 못 내밀죠. 20년 경력이면 애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만 보다 보니 아직 전 많이 남았다고 생각하게 되고 지금부터 더 다양한 배역을 할 수 있는 나이라고 생각하게 된 거죠. 어렸을 때는 오히려 한정적 역할들, 멜로에 집중했다면 앞으로는 다양한 역할을 할 수 있겠다 싶어요. 주인공에 연연할 나이도 아니니까 더 재밌는 역할들이 많이 있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차기작이 될 드라마에서도 '완벽한 타인'에 이어 배우 이서진의 새로운 얼굴을 볼 수 있을 듯하다. 제목은 '트랩', 직업은 앵커, 가족이란 놀러갔다가 인간사냥 당하는 이야기인데 큰 반전이 숨어 있다고 말하며 생글거리는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멜로 이런 것 없고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장르물이에요. 범인을 좇는 형사 역은 성동일 배우가 맡았는데, 제가 갖고 노는 거예요. '완벽한 타인'을 만든 이재규 감독, 박철수 대표를 만났더니 '이건 서진 씨밖에 없다'고 해서 다시 뭉치게 됐죠."
"출연작은 까다롭게 선택하지만 선택하면 되든 안 되든 절대 후회 안 해요. 제가 선택 잘못한 거니까 지나간 것에 대해 연연하지 않는 거죠. 실패도 재미있게 얘기할 수 있어요, 시간이 흐르면. '옛날에 망했잖아' 가볍게 툭 던지는 거죠. '말하지마!' 금기어로 삼기보다는요."
끝으로 배우 이서진에게 기대되는 부분을 마치 남 얘기하듯 객관적으로, 특유의 냉정함(cool)으로 얘기해 달라고 주문했다.
"큰 기대 안 하는데 (다 같이 웃음소리). 꾸준히 좋은 사람들과 일하는 것, 정도요. '완벽한 타인' 하면서 좋은 사람들과 일하니 재미있다, 편하다, 더 느꼈어요. 감독도 친하고 배우도 또래다 보니 대기하는 시간도 재미있고 촬영도 재미있고. 한 번도 '촬영, 왜 빨리 안 끝나나' 생각한 적 없어요. 촬영하다, 같이 놀았다, 그렇게 한 것 같아요. (배우 이서진은) 그런 상황을 계속 만들어 가리라 기대해요."
깊이 생각하는 걸 싫어한다며 뭐든 간단명료하게 답하는 듯했지만 이서진은 현상이나 과정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영화나 드라마나 함께 만들어가는 대중예술인 만큼 혼자가 아닌 공동의 창의적 작업에 있어 ‘꾸준히 좋은 사람들과 일하는 것’만큼 중요한 요소가 어디 있으랴. 누구와도 나를 100% 공유하지 않는 '완벽한 타인'으로 살기, 함께하는 동료들과 '아름다운 거리' 유지하기. 깔끔해 보이면서도 차갑지 않은, 개인주의적으로 보이되 이기적이지 않은 이서진을 보며 떠오른 게 있었다. 뜨겁게 달구어진 쇠를 식히는 물, 벌건 쇠가 쓰임새를 지닌 무엇이 되게 하는 그것. 뜨거운 배우들의 열기가 가득한 현장에서 '환기' 역할을 자청하는 이서진이 멋있어 보인 이유다.
KPI뉴스 / 홍종선 기자 dunastar@kpinews.kr
[ⓒ KPI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