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있지만 없는 것들을 위한 웃기고 슬픈 송가"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 2023-06-22 07:43:34

첫 장편 '없는 층의 하이쎈스' 펴낸 소설가 김멜라
젊은 세대 시선으로 돌아본 왕년의 간첩 조작 사건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존재들 시적 이미지로 서술
"순록이 피로 만드는 '이끼' 같은 이야기 쓰고 싶어"

-그래, 이게 내 독이고 약이다. 이 독은 삼키지 말고 몸에 쓴 약처럼 혀 밑에 넣고 살자. 사귀자는 그렇게 마음먹었다. 없는 죄, 없는 층, 이제는 가고 없는 사람. 그렇게 삼발이처럼 없는 것들을 지지대 삼아 사는 날까지 저 너럭바위 넋자리에 꽃 보여주고 새 소리를 들려주며 살겠다고 무릎을 꿇고서 오래오래 기도했다.

'없는 것들'을 지지대로 삼아 보아란듯이 꽃과 새들과 더불어 잘 살아내겠다고 다짐하는 '사귀자' 씨. 없는 것들이 어떻게 지지대가 될 수 있을까. 기실 당연히 존재하는 것들인데,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편견과 차별이 있을 뿐이다.

▲간첩 조작사건을 모티브로 첫 장편을 펴낸 소설가 김멜라. 그는 "한국 사회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세상에서 없다고 여겨지는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김멜라의 첫 장편 '없는 층의 하이쎈스'(창비)에 등장하는 '사귀자' 씨는 남산 밑에서 하숙을 쳤다. 문간방에 든 하숙생은 제때 하숙비도 안 내고 속을 썩이더니 끝내 사귀자 내외를 간첩으로 조작하는데 일조했다. 명문대 법대생인 순영이 한자는 모르지만 글씨는 잘 '그리는' 사귀자에게 도움을 청했는데, 사귀자가 써준 것들 중에 '김일성 만세'가 들어 있었다고 남산에서 나온 남자가 그를 협박했다. 알고보니 앞집 남산하숙 여자는 그녀에게만 귀띔했던, 결혼 전 잠시 이발소에서 일한 사실까지 당국에 알려줬다.

순영 양은 짜맞춘 각본에 따라 간첩으로 조사를 받던 중 투신했고, 그 사실을 접한 사귀자의 남편은 죄책감에 넋이 나가 방황하면서 마당에 '제단' 같은 너럭바위 하나 옮겨 놓고 먼저 세상을 떠났다. 사귀자가 자신의 간첩 혐의를 조작한 '보도문안'을 '독'(毒)으로 간직하며 '없는 것들'의 연대를 바탕으로 꿋꿋이 살아보겠노라고 다짐한 것이다.

이제 고등학교에 진학할 10대 후반 '아세로라'는 사귀자의 손녀다. 딸 내외가 횡령 공모 죄로 수배돼 잠적하면서 아세로라를 사귀자에게 맡겼다. 남산 밑 오래된 상가에 거주하는 사귀자의 공간 옆에 임시거처를 만들어 아세로라를 들인다. 아세로라가 '할머니'라고 부르자, 다른 이들을 깍듯이 '슨생님'으로 존대하는 사귀자는 손녀에게 '어이! 청소년'이라고 부르면 좋겠느냐고 어른다. 아세로라가 시종 사귀자를 '동거인'으로 지칭하는 배경이다.

아세로라의 동생 '칭퉁이'는 희귀 면역질환을 앓다가 죽었다. '큰 벌'이라는 의미의 이름 '칭퉁이'는 아세로라에게 자극적이고 공격적인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보호하고 싶은 애틋한 존재였다. 아세로라가 동거인과 교감하며 살아가는 이야기가 '없는 층의 하이쎈스'의 한 축이고, 사귀자가 어떻게 어이없이 없는 존재가 돼서 살아가게 됐는지 따라가는 이야기가 또 한 축이다.


"이야기보다는 이미지나 장면이나 말에서 파생되는 느낌들, 돌 하나 던졌을 때 파문 같이 이어지는 것들을 따라가고 싶었던 것 같아요. 읽는 분들이 그 사람의 삶도 느낄 수 있게 하려면 당연히 서사가 들어가야 되지만, 그런 서사 줄기를 따라가기보다 층층이 쌓인 이미지로 느끼게 해주고 싶었어요. 가장 좋은 방법은 읽는 이들이 정서로 느끼게 하는 거였죠."

'없는 층의 하이쎈스'는 2014년 '자음과 모음'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한 이래 두 권의 소설집을 내고 지난해 '제 꿈 꾸세요'로 이효석문학상을 받으며 각별한 주목 대상으로 부상한 김멜라의 첫 장편이다. 활달하고 자연스러운 퀴어 서사가 눈길을 끌고 시적 이미지와 서사의 입담이 잘 어우러지는 그녀만의 독특한 개성이 강점이다. 그에게 퀴어 서사란 패션이 아니라 창을 열면 내다보이는 자연스러운 풍경 같은 것이라고 했다. 이번 첫 장편도 그런 맥락에서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존재들에 대한 관심이 연장된 것이어서 어떤 당위나 주장과는 거리가 먼, 지금 이 시기에 그를 움직이는 생각들의 자연스러운 반영이라는 맥락이다.

-남산 아래 간첩 조직 일망타진… 하숙을 경영하며 소시지 반찬으로 하숙생을 포섭… 문간방 하숙생에게는 보복으로 찬밥을 주었으며… 암호명 하이쎈스라고 불리던 사씨는 크게 뉘우쳐… 물가를 기록해 북괴에 보고토록 하는 등… 상세히 적힌 기록 문건 1천 8백여점을 압수… 공작금 1백 26만원… 국민 동향 수집… 평소 민화투를 즐기는 백합미장원의 미용원에게 접근… 부러 돈을 잃어주며 환심…

남산의 남자가 사귀자씨에게 슬쩍 보여준 '신문 보도안' 일부다. 사귀자가 보관해온 노란 종이의 그 보도안을 발견한 아세로라는 동거인이 '하이쎈스'라는 암호명의 간첩이었다는 사실에 놀란다. '십자수'로 글자를 수놓아 간첩으로 몰렸던 실제 사건을 참조했다는 김멜라는 "엄청난 이데올로기나 어떤 정치적인 이름도 글을 모르는 누군가에게는 그냥 자음과 모음일 뿐"이라며 "그것이 조작되고 악용됐을 경우에는 무시무시한 힘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슬픔과 기쁨을 전달하는 과정에 투입할 적절한 유머의 무게에 대해 고민한다고 했다.

▲김멜라는 "너무 자극적인 환경에서 자꾸 사라지는 존재들을 덜 아프게 만드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슬픔을 너무 무겁지 않게 드러내는 게 어려웠던 거 같아요. 제가 워낙 좀 진지하고 무거운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그 정서로 독자들에게 그대로 다가가기보다 좀 웃게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에도 유머러스한 면이 있긴 했지만 그걸 글로 써야겠다는 생각은 많이 못했는데, 첫 소설집을 내고 독자들을 직접 만나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내 슬픔의 정서를 담는다 하더라도 이렇게 웃음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것이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죠."

'칭퉁이'는 자극적이고 해로운 것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여린 존재의 상징이다. 희귀질환으로 끝내 세상에서 사라진 동생 칭퉁이를 그리워하며, '벌씨'들과 함께 그 연약한 것들이,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그 존재들이 살아갈 세상을 기원하는 주술적인 축제 같은 장면들을 시적으로 전개한 것도 그 때문이다. 김멜라는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하는 동안 특히 현대시에 매력을 느꼈다고 했다. 순록이 먹고 피로 만드는 이끼 같은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그의 갈망이 투사된 칭퉁이의 시 같은 독백.

양배추 모자를 쓴 아이가 순록 피를 마시면/ 사람들이 그걸 보면서 버터구이오징어를 먹고 캐러멜팝콘을 먹어./ 누나는 사람들을 배부르게 해주는 이야기를 만들어/ 이야기는 어떻게 사람들 뱃속으로 들어가/ 눈물이 되고 웃음이 되는 걸까./ 나는 점 밖에서/ 점 안으로 들어가/ 이야기 속에서 살아./ 안에서도 밖에서도, 나는 누나가 보고 싶어.

"칭퉁이는 순록들을 보면서 어떻게 이끼를 먹는데 뱃속에서 피가 될까 궁금해하잖아요? 그건 제가 늘 갖는 궁금증이거든요. 아무리 과학 책을 읽고 화학적인 것을 안다 해도 저에게는 신비로워요. 제 삶도 그렇고 이 자연의 세계도 그렇고, 항상 알지만 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뭔가 굉장히 신비로운 그런 지점들이 있는데, 저에게는 이야기라는 것도 그런 것 같아요. 칭퉁이가 사람들은 먹으면서 이야기를 보는데 그게 사람들에게 슬픔이 되고 기쁨이 된다고 그러죠. 이야기는 사실 누군가의 슬픔이나 기쁨에서 온 거잖아요? 이야기라는 걸 우리는 처음부터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사실 저에게는 이끼를 먹고 피가 되는 것처럼 너무 신비로운 일이거든요."

▲김멜라는 "물이 흘러가고 바람이 불고 새가 나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느껴지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말한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칭퉁이'는 국어사전에 '큰 벌'을 의미하는 이름으로 등재돼 있다. 자꾸 사라져가는 존재들이 아프지 않고 조화롭게 공존할 세상을 꿈꾸게 하는 상징으로 등장하는 이름이다. 소설에서 사라져가는 꿀벌들을 돌아오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꿀벌씨'들은 미약한 힘을 모아 축제를 꾸민다. 이 선량한 주민들은 달이 지구라는 점을 중심으로 돌 듯, 쓰러진 떡갈나무를 세워놓고 돌며 지상의 연약한 것들, 있지만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모든 것들을 위한 기도를 주문처럼 읊조린다.

김멜라는 "자연계의 곤충이나 지렁이도 인간들에게는 없는 존재들 같지만 분명히 있고 그들이 없으면 사실 우리 인간은 살기가 힘들다"면서 "정작 이 존재들은 인간과 상관없이 잘 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아주 작은 곤충이나 벌레, 지렁이나 땅속의 미생물들처럼 없는 존재 같은 그들의 목소리를 소설로 쓰고 있다"고 전했다. '없는 것들'로 가득한 공원 숲길에서 환하게 웃는 김멜라가 첫 장편에 새긴 말.

-자신의 고통을 증명하려면 세상과 싸워야 하는 이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도 지워진 사람, 없는 존재였습니다. 없다고 여겨지는 존재들이 살아 있는 저를 움직여 글을 쓰게 합니다. 그렇게 있음과 없음을 넘나드는 질서와 힘에 의지해 하이센스, 높은 감각을 느껴봅니다.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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