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끔찍하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부커상 최종 후보 '고래'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 2023-05-22 08:00:14
24일(한국시간) 아침 선정 앞두고 들여다본 작품세계
짧은 성장 과정 축적된 한국사회 모순과 인간 탐욕 풍자
"사악한 유머로 가득 찬 소설…거부할 수 없는 매력 넘쳐"
천명관은 '고래'에서 독자들에게 자주 말을 건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믿고 싶은 것만 믿으면 된다고, 조금 더 들어보라고, 이제 끝이 보이니 조금만 더 참으라고, 그리고 이야기는 계속된다고. 독자들에게 가끔 건네는 말 사이에 놓인 긴 회랑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빠른 속도로 전개된다. 그 서사는 일견 황당하지만 그렇다고 무시하기에는 흥미롭고 여운도 만만치 않아서 독자들은 두꺼운 소설을 끝까지 따라갈 수밖에 없다. 다 읽고 났을 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군데군데 눈길을 주면서 노파와 금복, 춘희와 코끼리 점보의 서사에 각자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2004년 문학동네소설상을 받으며 세상에 나온 장편 '고래'는 올 부커상 인터내셔널부문 최종 리스트 6편 중 하나로 선정됐고, 24일 오전 6시경(한국시간) 런던 스카이가든에서 열리는 시상식에서 최종 수상작이 가려진다. 이 상은 번역자와 작가에게 공동으로 수여하는 점이 특징이다. '고래'를 번역한 김지영은 신경숙 '엄마를 부탁해'로 맨아시아문학상을 받았고 김애란 정유정 김영하 등의 작품도 영어로 번역했다.
영어권 작품만을 대상으로 부커상을 진행해 온 재단이 영어로 번역된 비영어권 작품들을 대상으로 2015년부터 신설해 시상해온 이 상은 한국 작품으로는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수상한 이래 이번에 정보라, 박상영에 이어 4번째로 후보에 올랐다. 노벨문학상, 공쿠르상과 더불어 세계적 권위를 인정받는 부커상의 한 갈래라는 점에서 각별한 관심 대상이다. 부커상 심사위원회는 '고래'가 "사악한 유머로 가득 찬 소설"이라며 "생생한 인물들은 어리석지만 현명하고, 끔찍하지만 사랑스럽다"고 소개했다. 이들은 "캐릭터는 비현실적이지만 있을 법한 이야기"라면서 "착한 캐릭터는 아니지만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고 덧붙였다.
금복은 일찍이 고향을 떠나 바닷가에서 고래를 목도한 뒤 죽음을 이길 것 같은 거대한 생명체에 대한 동경을 품는다. 생선장수를 따라나선 이래 큰 덩치에 힘이 좋은 착한 남자, '희대의 사기꾼이자 악명 높은 밀수꾼에 그 도시에서 상대가 없는 칼잡이인 동시에 호가 난 난봉꾼이며 모든 부둣가 창녀들의 기둥서방에 염량 빠른 거간꾼', 약장수 등을 거치며 욕망에 충실하게 삶을 이어간다. 금복은 쌍둥이 자매의 코끼리 우리에서 딸 '춘희'를 낳았다. '세상에 나왔을 때 이미 칠 킬로그램에 달했던 그녀의 몸무게는 열네 살이 되기 전에 백 킬로그램을 넘어섰다. 벙어리였던 그녀는 자신만의 세계 안에 고립되어 외롭게 자랐으며 의붓아버지인 '文'으로부터 벽돌 굽는 모든 방법을 배웠다.' 천명관이 영국에서 독자들 앞에서 읽었다는 금복이 죽어가는 장면의 마지막 문단은 그녀의 삶을 압축한다.
-무모한 열정과 정념, 어리석은 미혹과 무지, 믿기지 않는 행운과 오해, 끔찍한 살인과 유랑, 비천한 욕망과 증오, 기이한 변신과 모순, 숨가쁘게 굴곡졌던 영욕과 성쇠는 스크린이 불에 타 없어지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함과 아이러니로 가득찬, 그 혹은 그녀의 거대한 삶과 함께 비눗방울처럼 삽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이야기는 금복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그녀가 어떻게 벽돌공장을 짓게 됐고 다시 도시에 고래 형상을 닮은 극장을 세워 승승장구하는지 따라간다. 밑바닥을 전전하던 금복이 사업가로 성장하게 된 '돈벼락'은 복수의 일념으로 '노파'가 숨겨두고 간 것이었다. '애꾸눈' 벌치기 딸에게 살해당한 노파는 유령처럼 떠돌며 금복을 포함한 수많은 인명을 화재 속에 몰아넣고 춘희마저 방화범으로 몰아 '복수'를 완성한다. 이 와중에 등장한 서커스단 퇴물 코끼리 '점보'와 거대한 덩치로 고독하게 살아가는 춘희의 교감은 욕망과 탐욕의 세상을 관찰하는 시적인 영역을 확보한다. 춘희는 감옥의 징벌방에서 점보와 대화를 나누며 광막한 어둠 속에서 한줄기 빛을 찾아낸다.
쿠데타에 성공해 독재를 이어가는 장군이 등장하고, 벽돌공장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키며 쏟아내는 각종 구호에는 짧은 시간에 많은 역정을 지나온 한국사회의 모순들이 상징적으로 압축돼 풍자의 형태로 다가오기도 한다. 붙잡힌 일꾼들은 혹독한 고문을 받고 난 뒤 수십 장이나 되는 조서의 말미에 자신이 빨갱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서명을 해야 했다. 벽돌공장 일꾼들이 벌인 파업 시위의 한 장면을 묘사하는 만연체의 긴 한 문장은 신랄한 풍자의 정점이다.
-어디선가 튀어나온 '파쇼에게 죽음을! 노동자에게 생존권을!'이나 '재벌독재 타도하여 노동자 천국 이룩하자!'와 같은 구호는 산골짜기에 있는 벽돌공장에서 써먹기엔 다소 유난스런 감이 없지 않았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나 '수령님의 영도 따라 미제를 박살내자!'와 같은 구호는 다소 수상한 감이 없지 않은데다, '아름다운 금수강산에 벽돌공장 웬 말이냐!'나 '생태계를 파괴하는 개발독재 물러가라!'와 같은 구호는 다소 때 이른 감이 없지 않았는데, 또 어디선가 느닷없이 튀어나온, '영숙아, 사랑해!'나, '씹할, 그때 홍싸리를 먹는건데'와 같은 소리는 그야말로 구호도 아니고 뭣도 아닌, 분위기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자들이 내지른 잡소리에 불과했다 아니할 수 없다.
천명관은 부커재단 인터뷰에서 "민주화 과정을 통해서 한국 사회는 뭔가 정상화되는 듯했지만 오랫동안 일제강점기부터 시작해서 군부 독재를 오랫동안 거치는 동안에 축적된 모순들이 심화되는 모습들도 있다"면서 "지난 20년간 부자들은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 가난해지는 과정을 겪었고, 사회 각계각층의 갈등과 혐오 이런 것들이 훨씬 더 강력해졌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 한국인들에게는 매우 뜨거운 어떤 역동성이 있다"면서 "그래서 지난 20년간 그랬듯이 또 뭔가 큰 변화를 이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천명관은 영화 '총잡이'(1995), '북경반점'(1999), '이웃집 남자'(2009) 등의 각본을 쓰며 영화인으로 살다가 단편 소설 '프랭크와 나'가 2003년 문학동네 신인상에 당선되며 소설가로 나섰다. '고래' 이후 '유쾌한 하녀 마리사'(2007), '고령화 가족'(2010), '나의 삼촌 브루스 리'(2012),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2016) 등을 출간한 그는 지난해 영화 '뜨거운 피' 감독으로도 데뷔했다.
그는 이어진 인터뷰에서 "우리는 매우 한이 많은 민족이라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면서 "그건 인류 모두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정서일 것"이라고 '고래'가 지닌 한의 정서를 묻는 질문에 답했다. 천명관은 "한국인의 정서 속에는 슬픈 정서도 있지만 명랑하고 해학적이고 유머러스한 에너지들도 그만큼 가지고 있다"면서 "'고래'는 그런 한도 있지만 반대의 명랑한, 성적 에너지 같은 것들도 넘쳐난다"고 덧붙였다.
세르반테스가 17세기 초 감옥에서 집필한 '돈키호테'에서 일찍이 '나는 이 모험이 거짓인지 사실인지를 단정하지 않은 채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면서 '그러니 신중한 독자여, 당신 좋을 대로 판단하시라. 나는 더 이상의 의무도, 책임도 질 수 없으니 말이다'라고 독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모험담을 진설한 바 있다. 천명관도 '야기란 본시 전하는 자의 입장에 따라, 듣는 사람의 편의에 따라, 이야기꾼의 솜씨에 따라 가감과 변형이 있게 마련이다. 독자 여러분은 그저 믿고 싶은 것을 믿으면 된다. 그뿐이다.'라고 소설 속에서 세르반테스의 이야기 전통을 이어받는다. 굳이 세르반테스가 아니더라도 우리네 판소리의 '아니리'처럼 이야기 바깥으로 나와 독자와 직접 대화를 나누는 형식이 생소한 것은 아니다.
남미 매직리얼리즘의 대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노벨문학상 수상작 '백년의 고독'에서는 혁명에 실패한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이 고독 속에서 조그만 황금물고기만 만들다 가는 모티브가 나온다. 천명관의 고독한 캐릭터 춘희 또한 모든 고통을 거대한 육신 속에 눌러놓은 채 황량한 공장 마당에 붉은 벽돌만 줄기차게 만들어 쌓아놓고 백골이 되었다. 2300여년 전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 기록한 이래 이야기의 본질은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얼마나 활달한 상상력으로 당대의 인물과 내용을 새롭고 묵직하게 담아내느냐에 따라 걸작은 늘 생산되는 법이다. '고래' 화법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문학의 법칙'이다. 이야기는 계속된다.
-사내는 성큼성큼 걸어와 대뜸 금복을 깔고 앉아 있던 어부의 멱살을 잡아 번쩍 치켜들었다. 두 발이 모두 땅에서 떨어져 버둥대는 어부의 사타구니에서 불알이 덜렁거렸다. 그것은 중력의 법칙이었다. …가뜩이나 파란 많은 그녀의 운명을 다시 한 번 거센 소용돌이 속으로 몰고 간 그날 밤의 기적 같은 사건은 며칠 전부터 쉬지 않고 내린 장맛비로 인해 가능한 일이었다. 도대체 무슨 얘기냐고? 성급한 독자여, 조금만 더 들어보시라.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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