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내리는가"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 2023-05-17 20:58:28

'한국 근대 문학기행' 4부작 펴낸 소설가 김남일
서울 도쿄, 북방 무대 글 찾아 근대 풍경 재구성
100년 전 세계문학은 읽어도 우리 근대는 외면
"근대는 고루한 게 아니라 풍성한 문학의 보고"

소설가 김남일이 '한국 근대 문학기행'(학고재) 4부작을 펴냈다. 서울, 평안도와 함경도, 도쿄의 근대 공간과 삶의 이야기를 담았다. 불과 100년 안팎 거슬러 올라간 시공이지만 대부분 역사책이나 단순한 문학지식 차원에서 당시의 삶을 표피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국문학 전공자가 아니라면 탐독하기 쉽지 않은 문학 작품들을 꼼꼼히 탐색해 생생한 생활과 공간과 삶의 결을 흥미롭게 보여주는 미덕이 크다.

▲한국 근대 문학기행을 완성한 소설가 김남일. 그는 "문학을 통해 아시아의 근대를 읽어보자는 게 내 오랜 관심이었다"고 썼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아시아 이웃 도시 사이공 하노이 교토 도쿄 상하이 타이베이 오키나와 등지를 먼저 섭렵했던 김남일은 정작 우리 근대 공간에 대한 지식과 읽기가 턱없이 부족했음을 느끼고 코로나 비대면 국면에서 본격적인 읽기에 돌입, 이번에 그 결실을 본 것이다. 많은 근대 문인들이 옥고를 치렀던 서울 서대문형무소 자리에서 그를 만났다.

-막연히 생각한 근대 서울과 북방의 과거 모습들이 생생하게 드러나서 흥미로웠다.
"광화문 촛불집회에서 평론가 김종철(1947~2020) 선생을 만났을 때 일본 작가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세설'(細雪)이란 작품을 소개받고 자극을 받았다. 이후 일본 근대 작가 작품을 읽어나가다가 우리나라 근대 작품들에 대해 너무 아는 게 없다는 자각을 하면서 이광수의 '무정'부터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새삼스럽게 읽기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읽는 행위를 통해 단순히 지식이 늘어나는 게 아니라 사유의 깊이가 늘어나는 걸 체감했다. 예전에는 그냥 재미삼아 읽었는데 일본 작가부터 시작해서 한국 작가로 넘어오게 되니, 우리 근대문학에 대한 나의 무지가 참혹했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 국문학 전공자가 아니면 교과서에 나온 몇 작품 빼고는 제대로 읽어본 이들이 많지 않을 것이다."

-왜 '근대'인가.
"소설을 못 쓰게 되고 책을 읽으면서 젊은 작가들 작품을 접하다보니 내가 생각했던 그런 소설들이 아니었다. 서사가 사라져버리고 자잘한 어떤 심리적인 걸로 전개되니까 우리는 거대 서사 시절을 지나와서 그런지 너무 왜소해진 느낌이었다. 근대 작가들 작품에는 맞서든 도망가든 어떤 형태로든 시대에 맞부딪치는 모습이 담겨 있다. 요즘 소설들은 더구나 속도가 너무 빨라 현기증이 일어 읽기가 좀 어려웠다. 시대뿐 아니라 장소가 나에게는 굉장히 중요했다. 읽다 보니 서울에 내가 몰랐던 것이 너무 많았다. 북촌이나 서촌도 그렇고 인왕산 등 처처에 다 문학적 스토리가 있는데 그런 거 하나도 제대로 모르면서 뻔뻔하게 작가로 살아왔다는 자괴감이 일었다."


문학 속 장소에 대한 김남일의 관심은 오래전 발아된 것이었다. 1995년 처음 베트남을 다녀온 이래 소설가 방현석 최인석등과 함께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을 결성했고, 이후 수십 번 베트남을 다니면서 아시아 문학에 대한 관심을 넓혀왔다. 이번 한국 근대문학기행은 '어제 그곳 오늘 여기_아시아 이웃 도시 근대문학기행'(학고재, 2020)에 이은 것이다.

김남일은 "아시아 근대에 대해 먼저 공부해 보니 재미있었고 한국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사실을 절감하면서 자연스럽게 관심이 이어졌다"면서 "서울은 기본이고 우리 근대 작가들이 대부분 다녀온 도쿄와, 한 권으로 끝내려고 했던 북방은 평안도와 함경도로 나누어 4부작으로 펴내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서울 이야기'는 유진오(1906~1987)의 단편 '창랑정기'(1938)로부터 시작된다. 조선의 이른바 상류층 사대부가의 고대광실에 깃든 멸망과 쇠락의 그림자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소설이라는 점에 김남일은 의미를 부여했다. 유진오로부터 시작된 서울 이야기는 북촌, 종로, 성북동, 미쓰코시 백화점, 야마토 아파트, 서대문형무소 등 다양한 공간과 이광수, 최남선, 이태준, 이상 등 사람 이야기를 거쳐 다시 유진오를 언급하면서 끝을 맺는다.

▲김남일은 "역사책에 남은 굵은 고딕체 사건들 사이로 빠져나간 장삼이사 갑남을녀들의 무수한 삶의 편린들 보면서 감개에 젖기도 했다"고 썼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유진오는 이광수와 함께 1942년 도쿄에서 열린 '대동문학자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가해 "일본 건국 정신을 동아 10억 민중에게 철저하게 가르치기 위해 우선 일본어를 보급해야 한다"고 역설한 바 있다. 해방 이틀 후 유진오는 종로 원남동 조선문인보국회 사무실에 갔다가 '일본놈 때도 출세를 하고 해방됐어도 또 선두에 나서려 하다니… 이럴 수야 있느냐'는 호통을 듣고 쫓겨났다고 김남일은 기록했다.

-유진오의 '창랑정기'가 서울 편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 단편을 보면 수구파들이 쇄국주의를 고수하다가 무너지게 되는 서울의 모습을 생생하게 알 수 있다. 중간에 초점을 맞췄던 것도 유진오의 '민요'라는 미발표 소설인데, 그 작품이 없었으면 북촌이 예전에 어떤 모습이었는지, 북촌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았는지, 고대광실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지 실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광수는 서민 출신이기 때문에 양반 가문에 대해서 잘 몰라 슬쩍슬쩍 지나가는데, 유진오는 양반 출신이었고 재동에 살아서 눈으로 다 본 거를 그대로 묘사해서 몰락하는 사대부 가문의 모습을 가장 생생하게 드러낼 수 있었다."

-작가들의 '산책'에 초점을 맞춘 배경은?
"통상 구보씨의 산책만 떠올리는데 김남천, 이태준, 노천명 등 각각의 작가들이 산책하며 관찰한 글들이 있다. 이들이 산책할 때는 1930년대 초중반인데, 이 시기는 서울이 식민지 하에서도 가장 화려했던 시기, 아직 탄압이 본격적으로 몰려오기 전 사회주의 운동 끝 무렵, 중일전쟁 전 시점이다. 이때는 아직 약간의 자유가 있었고, 그 자유를 식민지인들도 만끽하는데, 작가들은 산보를 하면서 각자의 시각으로 서울의 풍경을 그려낸다. 이런 산책 풍경들을 작가별로 이번 책에 6~7개 정도 모았다."

▲김남일은 "우리 문학의 근대를 꾸려온 선배 작가들이 실은 그 근대를 당혹으로 맞이했다"고 썼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이번 4부작에서 특히 흥미로운 대목은 함경도와 평안도를 다룬 북방 편이다. 평안도 편에는 평양을 중심으로 기독교가 전파돼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개신교의 뿌리를 세밀하게 살피는 과정과 이야기가 눈길을 끈다. 아울러 만인계, 36계 등에 얽힌 이야기와 평양 기생과 그 시대 문인들의 얽힌 인연 들을 비롯한 흥미로운 읽을 거리가 포진해 있다. 함경도는 부전고원과 주을온천을 비롯해 북방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공간들이 진설돼 있다. 이효석이 서울에서 총독부 검열계에 취직했다가 악담을 듣고 쫓기듯 함경도 경성 처가 고향 쪽으로 가서 살아가는 이야기는 서정적인 향토 소설가쯤으로 알려진 그의 '서구주의' 취향을 여실히 드러낸다.

-북방 편에서는 특히 '눈 내리는' 풍경에 정서적으로 몰입된 듯하다.
"김남천이 평안도 고향 성천에 가서 어린 기생과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바깥에 나왔을 때 내리던 눈, 그 눈 묘사가 제일 아름다웠다. 정지용 시인이 북방을 유람하는데 의주에 가서 묘사한 눈 내리는 풍경도 굉장히 아름답다. 펄펄펄 내리는 주먹 만한 북방의 눈은 남쪽 눈과는 다르다. 독자들이 근대 문학에 접근하는 하나의 키워드나 통로로 '눈'을 따로 모아보고 싶다. 이용악의 눈, 백석의 눈… 어렵고 험한 세월에 내리던 그 눈들은 다르고 아름답다."

-동북아 세 나라의 주요 작가 루쉰, 나스메 소세키, 이광수가 같은 시기에 머물렀던 도쿄에는 어떤 의미를 부여한 건가.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맞닥뜨리게 될 근대가 어떤 모습인지 몰랐고, 우왕좌왕하면서 길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세 나라의 서로 다른 역사를 만들어낸 것이다. 일본은 일본식 길로 근대화를 하고, 중국은 루쉰이 생각하는 길을 갔고, 조선은 식민지로 떨어졌다. 그런 일들의 단초가 되는 공간이었고 시대였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하다고 보았다. 당대 우리 문인 대부분이 거쳐간 곳이기도 했다."

▲김남일은 "국문학 연구자들의 성과를 바탕으로 나는 이야기를 썼다"면서 "스토리텔링은 그 자체로 화자의 모든 것을 드러내는 정치적인 행위"라고 말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도쿄에 유학했던 많은 문인들 중 가장 주체적인 시각으로 그곳을 보았던 사람으로 시인 이상을 꼽았다.
"모던의 극치를 달리던 이상에게 남들이 도쿄를 한 번 가보라고 자꾸만 권유를 했는데 그는 막상 가면 뭐 해, 이런 배짱이 있었다. 이상은 도쿄에 가서 겉만 화려했지 거죽 아래 속살, 화려한 빌딩 속에 숨어 있는 근대의 허무함 같은 것을 간파했다. 다른 작가들은 대부분 도쿄에 가서 주눅부터 들었는데 이상은 참 별거 아니네, 속 모습을 내가 다 알아, 이런 태도였다. 식민자 입장에서 이런 식민지인이 건방지고 오만해 보였을 테다. 불령선인이라는 애매한 이유로 제국주의가 체포해 죽음에 이르게 한 이유일 것이다."

김남일은 "우리 독자들이 시선을 넓혀서 한 세기 전 세계문학뿐 아니라 우리 문학에도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면서 "이번 책들이 근대라는 것은 고루하고 낡은 게 아니라 굉장히 생동감 있고 풍성한 문학의 보고라는 인식을 하는 통로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이제는 시들한 것처럼 보이는 통일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가슴 뛰는 텍스트가 되기를 희망했다. 서문에 밝힌 김남일의 꿈.

'내 가장 큰 꿈은 따로 있으니, 휴전선 너머 동해를 오른쪽으로 끼고 내달리는 함경선 기차를 타고 북상하면 띄엄띄엄 정거장마다 나와 이제나저제나 하고 어리숭한 후배 작가를 기다리고 있을 한설야, 이북명, 안수길, 김기림, 최서해, 김광섭, 현경준, 최정희, 이용악 같은 선배 작가들을 만나고, 또 문산에서 끊어진 경의선 철도를 이어나가면 마침내 평양은 물론이고 성천, 개천, 정주, 삭주, 구성, 희천, 강계, 초산, 벽동, 의주 따위 이름조차 낯설고 그래서 더 아름다운 고장들을 두루 만나는 것!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선, 지난날 우리가 꾸었던 꿈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살피고 묻는 것으로 시작하는 도리밖에 없다. 이래저래 '이야기'가 답이다.'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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